155화. 밤에, 찾아갈게요.
“바닥을 좀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그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비끼며 바닥을 훑었다.
“하녀를 부를까요?”
“아니요. 내가 해도 됩니다. 유리 밟지 않게 조심히 나가도록 해요.”
그녀를 위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묘하게 축객령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보더니 그가 물었다.
“안아서 옮겨줄까요?”
뭐?
물음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웠으나 역시 묘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절반의 진심, 절반의 빈말.
‘아니요. 괜찮아요.’
분명, 그녀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것을 알고 묻는 것 같은 말투다.
“젖었네요, 잔뜩.”
그리고 한술 더 떴다.
콘스탄틴은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넘기며 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젖어서 약간 짙은 색이 된 그의 은발이 그의 등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근육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드레스 말입니다.”
사이나는 홀린 듯 그 물방울의 궤적을 보다가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드레스? 아까 욕조에서 막 나온 그가 그녀를 들어 옮겼으니 당연히 젖었겠지.
근데 저 대사에 저 말투는 뭐야?
사이나 혼자 당황했다.
여상한 눈빛, 여전히 부드럽게 꼬리 짓고 있는 입매.
저 그린 듯한 온화함을 그의 얼굴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약간의 원망마저 품은 눈으로 콘스탄틴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네. 젖었네요, 잔뜩.”
당황해서 얼른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예상을 깨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반걸음 다가갔다.
“부탁이 있어요.”
“…….”
그의 무표정은 고정된 채 그대로였으나, 그녀와 가까워지자 가슴 근육이 약하게 움찔했다.
“이따 밤에 찾아갈 테니…….”
사이나가 반걸음 더 가까이 가자, 그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옷 좀 벗어주실 수 있어요?”
“……예?”
결국 그가 움찔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보고 싶어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랏빛 눈동자가 콘스탄틴의 파란 눈을 촉촉하게 올려다보았다.
“그, 아, 안…….”
파르란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흐려졌다.
“안… 됩니다.”
“안 돼요?”
꼬옥, 꼭 부탁을 들어달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가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
“공작님 등의 문양, 꼭 필요한 걸요.”
“……예?”
그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사이나를 보았다.
“번역 작업을 하는데,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공작님 등에 있는 아를어 문법 체계가 꼭 필요해요.”
“…….”
“공작님도 아시다시피 전에는……. 적으려고 했다가 자꾸 딴 데로 새는 바람에. 음, 아시죠?”
“…….”
어딘가 삐끗 굳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콘스탄틴을 향해 사이나가 성큼 또 다가갔다.
“네? 부탁드려요.”
움찔한 콘스탄틴이 다시 한걸음을 물리며 대답했다.
“-알겠, 습니다.”
아까의 그린 듯한 표정은 깨어졌다.
그 표정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제, 만족스러워?’
아니, 잘 모르겠어.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그 미소, 아껴두었다가 ‘아, 내가 이놈을 한번 꼬셔 봐야겠다.’ 싶은 사람이 있거든 써먹으세요. 직방일 겁니다.’
루퍼트가 했던 그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사이나는 어쩐지 미소 짓고 싶어졌다.
눈만 웃는 것도, 입만 웃는 것도 아닌, 얼굴 가득, 그렇게 미소 짓고 싶어졌다.
“고마워요.”
사이나의 얼굴에 나붓하게 아름다운 곡선이 피어올랐다.
“그럼 밤에 공작님 방으로… 갈게요.”
콘스탄틴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누군가 그의 생체 시계를 멈춘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그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사이나는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깔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식전부터 독주를 마시는 건, 좋지 않아요.”
이번에는 사이나가 그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그래서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응접실을 나서는 자신의 뒤로 금세 무너져버린 그의 표정을.
* * *
그리고 그날 저녁.
사이나는 자꾸만 불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선을 일부러 들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종이와 펜이라든지 필기구를 열심히 쳐다보며 최대한 학구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연구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괜히 더 자극적으로 말한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 문양의 체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손에 펜을 꼭 쥐며 콘스탄틴을 올려다보자, 그가 약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물었다.
“벗으면 됩니까?”
“…네.”
“알겠습니다.”
콘스탄틴은 상의를 탈의하기 시작했다.
사부작사부작. 천끼리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기분이다.
이러다 침이라도 삼키면 그 소리가 바깥으로 울릴 것 같은 기분에 사이나는 목을 매만졌다.
“벗었습니다.”
“네….”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필기구를 조심히 챙겨 든 사이나가 이윽고 시선을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이나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어깨와 가슴판이었다.
강인해 보이는 목선과 반듯한 빗장뼈, 두툼한 가슴 근육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여섯 조각의 복근, 그녀의 다리보다도 더 두꺼운 것 같은 팔뚝의 곡선과 상대적으로 날렵해 보이는 허리선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남자의 맨살에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등판을 먼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은요?”
“…네?”
“뒤를 돌면 되겠습니까?”
그의 배꼽 즈음에 머물러 있던 사이나의 시선이 콘스탄틴의 말을 듣고 위로 올라갔다.
단정하고 정적인 표정의 얼굴.
또다시 그는 한 껍질을 덮어쓰고 여유로운 어른으로 돌아간 듯했다.
“…네. 등을 살펴봐야 하니까요.”
천천히 그가 돌아서자 눈앞에 너른 등이 펼쳐졌다.
날렵한 어깨뼈와 역삼각형으로 잘 빠진 형태를 보면 뼈대 자체가 참 예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상 거기 새겨진 문양보다 왜 이런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그럼… 시작할게요.”
“그래요.”
사이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가장 간단해 보이는 팔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반라를 볼 때(등일 뿐인데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지만, 문양 부분, 부분에 집중하다보니 점차 그 부위만 눈에 들어오며 빠져들었다.
문자는 익숙하면서도 어려웠다. 겹쳐 그려진 부분이 많고 문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너무 많았다. 특히나 새로 보는 문자들이 많다 보니 더더욱 생소한 구문들이 넘쳐났다.
‘…왜 이 글자가 이렇게 쓰이는 거지?’
전에는 몰랐는데 집중해서 옮겨 적다 보니 아는 글자임에도 전혀 해석이 안 되는 곳이 대다수였다.
옮겨 적는 것조차 힘든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연구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보이는 대로 열심히 옮겨 적었다.
“이 정도로 하지요.”
“…네?”
한참 집중하다가 그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사이나는 손을 멈췄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
“아, 그렇죠.”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나머지는 다른 날 하도록 합시다.”
“네….”
사이나는 머뭇거리다가 흩어져있던 종이들을 추슬렀다.
콘스탄틴이 요동 없는 표정으로 가운을 입고 허리끈을 묶더니 약간 헐거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사이나를 향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잘 자요, 사이나.”
“…네. 공작님도요.”
* * *
다음 날이 되었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어 사이나는 필기도구를 챙겨 들었다. 다시 그의 방으로 갈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사이나는 감정 기복에 시달렸다.
이유라면…….
‘나도 참 이상하네…….’
지난밤, 짜증이 날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던 그의 모습이 거슬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가 저돌적으로 달려들 때는 저돌적이라서 휘둘리고, 한걸음 물러서니 이제는 혼자 안달복달하는 기분.
‘그에게서 난 뭘 바라기에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실상은 그걸 모르는 채, 기분만 나쁘다는 게 더 문제랄까.
사이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연결문을 열었다.
“왔습니까.”
그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
어제처럼 여상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손에 독주가 든 크리스털 잔을 느릿하게 돌리고 있는 모습.
미리 가운만 입고 있었는지 앞섶이 길게 벌어진 틈새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한잔, 하겠습니까?”
“…아뇨.”
그는 두 번 권하지 않고 잔에 있던 술을 한입에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부터 축제가 열릴 겁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네? 축제요?”
“크레이머령에 안주인이 입성했으니 당연히 축제를 해야지요. 토벌 때문에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입성 당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겨울보다는 봄에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시기를 미룬 것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황도에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었지…….
“황도에 가고 싶겠지만, 그건 조금만 더 참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콘스탄틴이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댈 혼자 보내기에는 아직 황자가 걸립니다.”
“…….”
황자….
불쾌했던 마지막 만남을 끝으로, 콘스탄틴과 결혼까지 무사히 끝냈으니, 그에 관한 것은 사실 저 뒤로 미뤄두었었다.
“이미 결혼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크레이머 공작부인을 데려다가 헤베타를 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꽤나 집요한 성격입니다.”
하나 콘스탄틴은 그렇지 않다는 듯 부정했다.
“헤베타 건은 무산되었다고 해도, 개인적인 복수까지 참을 위인은 못 됩니다.”
“……복수요?”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복수까지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