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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54화 (154/233)

154화. 불순한 마중

“…….”

주인님이라니……. 그것도 좀…….

지금 루퍼트가 사이나를 섬기고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그에게 작위를 주고 녹봉을 주는 건 드보프가였다.

게다가 그가 부르는 ‘주인님’은 뭔가 묘하게 이상했다.

“사이나 님, 이라고 부를까요?”

“아, 네. 그게 나을 것 같네요.”

호칭을 정리한 둘이 서재 밖으로 나갔다.

“내가 요즘 조용해서 걱정한 모양인데… 별일 없어요. 그냥 가족이 좀 보고 싶어서 그런가 봐요. 기분이 좀 처지는 게.”

가족도 친구도 없는 머나먼 영지에 홀로 떨어져 있으니, 누가 생각해도 향수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자연스럽게 그리 핑계를 대었다.

아마 루퍼트의 걱정은 전과는 달라 보이는 공작과의 사이 때문일 것이다.

전에는 공작 쪽에서 사이나를 직접 챙기지 못해 안달하듯 굴었는데 요즘은 거리를 지키고 있으니, 사이가 식은 것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변에서 남편의 애정이 식었을까 봐 걱정하고 있으니 당신은 전처럼 내게 열심히 애정 표현을 하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사이가 극렬하게 나쁜 것은 또 아니니, 신혼이 끝나 잔잔해진 교양 덩어리 귀족 부부 행세나 하는 수밖에.

“각하께 요청해서 황도에 가는 것은 어떠십니까.”

다행히 루퍼트에게는 사이나의 향수병 핑계가 먹힌 듯하다.

“음. 그럴까요.”

“예. 봄기운이 완연하니, 델본에 꽃나무가 곧 만개할 겁니다.”

봄의 델본은 정말 아름다웠다. 델본 전체가 푸르게 물들고 갖가지 꽃향기가 가득해서 산책을 하기에도, 승마를 하기에도 딱 좋았다.

“아니, 이미 한창일지도 모르겠군요.”

변명 삼아 한 말인데 듣고 보니 상당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간 김에 유리 빈자리의 나무로 추측되는 그것이 얼마나 자랐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황도로 가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다.’

“마님!”

때마침 다리엘이 나타났다.

“아, 다리엘. 공작님은 어디 계시니?”

“마중을 가시겠습니까?”

마중? 아직도 바깥에 있나?

“각하께서 매우 기뻐하실 거예요.”

음. 딱히 기뻐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토벌에서 막 돌아온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그는 뿔 나팔을 금지한 채 조용히 돌아왔고, 사이나가 그를 볼 때 즈음엔 이미 샤워를 끝내고 성장을 마친 차림새였으니까.

깔끔한 그의 성정상 토벌에서 막 돌아왔을 때의 먼지 낀 모습을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먼지 낀 콘스탄틴의 모습 자체가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분명! 좋아하실 거라니까요?”

“뭐…, 그러실지도.”

다리엘의 태도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마중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루퍼트를 돌려보내고 사이나는 다리엘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마중이라면서 왜 아래로 안 내려가고?

“다리엘, 왜 이리로 가는 거야?”

“각하께서는 발이 매우 빠르시니 벌써 들어오셨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마님께서 맞아주시면 매우 좋아하실 겁니다!”

…저기? 이미 들어와 버렸으면 마중이 아니잖아?

하지만 무얼 더 따져볼 겨를도 없이 다리엘은 똑똑 문을 두들기더니 벌컥 열었다.

“이건 각하께 드리시면 돼요!”

대뜸 품에 무얼 안겨주기까지 하더니 다리엘은 사이나를 거의 등 떠밀다시피 해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대체…….’

뭔가 폭풍처럼 휩쓸린 기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러 왔으니 인사를 하면 되겠지? 잘 오셨다고 그렇게.

‘근데 어디 있는 거야?’

기본적으로 귀인의 방일수록 복도 문을 열면 침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응접실을 거쳐야 하는 구조다.

그리고 귀인의 방 중에서도 응접실에 연결되는 방의 개수에 따라 급이 나뉜다.

공작의 방이나 공작부인의 방은 당연히 최상급.

응접실을 기준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아주 많아서 어디 있는 줄 바로 알기가 어려웠다. 사이나는 문마다 고개를 돌려가며 살펴보아야 했다.

다행히 유일하게 열린 문이 보였다.

‘저긴가?’

사이나는 별생각 없이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이… 나…….”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에.

인기척으로 그녀가 온 걸 벌써 눈치챘나?

사이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하아…….”

뭔가 억눌린 듯 내뱉은 한숨 소리가 사이나에게 꽂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야릇하기도 했으나, 어딘가 아픈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혹시 또 부상이라도?’

사이나는 혹시나 싶어 열린 문틈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길게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어 늘어져 있고, 두 눈을 감은 그는 고개를 젖히고 욕조에 기대어 있었다.

강렬하게 시야에 꽂혀 들어오는 그의 젖은 몸은 그렇다 치고, 그 표정이 묘했다.

마치, 침대 위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야릇하기 짝이 없었다.

“…….”

그리고 사이나는 제가 한 생각에 당황하여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그저 씻고 있었을 뿐인데, 그런 사람을 훔쳐보며 이 무슨 불순한 생각인가.

당혹스러움에 몸을 물리던 중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너무 경황이 없어 무얼 들고 있었던 것도 잊은 것이다.

파사삭!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그녀의 발밑에서 깨져나갔다.

“누구냐!”

화악-

순식간에 주변에 깔리는 향을 보니 독주가 든 술병.

“……사, 야?”

사이나는 스스로의 불순함에 놀라 1차 패닉, 술병이 깨지며 난 파사삭 소리에 2차 패닉을 거치며 몸이 굳어 버렸다.

“여, 여긴 어찌….”

“이, 인사를… 그, 일부러 본 건 아니…….”

술 냄새 때문에 어지러워 이런 건지, 갑작스럽게 보게 된 장면이 너무 과해서 어지러운 건지 모르겠다.

사이나는 떠듬떠듬 변명하며 물러서다가 다리가 꼬여 주저앉고 말았다.

“잠깐, 조심-!”

콘스탄틴이 다급하게 욕조 바깥으로 나왔다. 그가 일어섬과 동시에 주변으로 딸려 나온 물이 흥건하게 쏟아졌다. 출렁거리며 욕조 밖으로 흘러나온 물이 욕실 바닥을 적시며 유리조각과 섞여들었다.

그 꼴을 보며 콘스탄틴이 재빨리 사이나를 안아 들었다.

“아!”

갑작스럽게 공중에 뜬 몸의 감각에 놀라 사이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홀딱 벗은 상태라 그녀와 맨 피부가 닿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목을 감은 것도 모자라 목덜미에 얼굴을 묻기까지 했다.

콘스탄틴의 몸이 굳어 뻣뻣해졌다.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칼리고의 목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찰나 간에 찾아온 평화.

닿은 부위를 통해 느껴지는 온기.

비강을 파고드는 익숙한 체향.

품 안에 딱 맞는 부드러운 여체의 감촉.

사이나. 사랑스러운 사이나.

콘스탄틴은 자신이 그녀를 매우 그리워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한 달 일정이었을 정기 토벌을 2주 만에 끝내고 돌아온 것도 실은 그 이유였을 테지.

‘하지만…….’

콘스탄틴은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주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사이나를 놓아 주었다. 그녀와 떨어지자 순식간에 다시 혼자 겨울로 떨궈진 기분이다.

그러나 그녀까지 제 겨울로 끌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그는 자꾸 그녀를 향해 뻗어가고 싶어 하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베인 데가 없나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유리 파편을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아…….”

사이나는 바닥을 짚었던 제 손을 살피려고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흐, 끅.”

콘스탄틴이 그녀를 놓아주며 한걸음 물러선 까닭에 그 벗은 몸이 노골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탓이다.

꽉 짜인 근육이 물에 젖어 팽팽하게 번들거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흉흉하기 짝이 없는…….

“…….”

넋을 놓은 듯한 사이나의 시선에 콘스탄틴 역시 나신인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빌어먹을.

그는 급한 대로 중요 부위라도 가리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천이 보이자 허겁지겁 그것을 잡아당겨 허리에 둘렀다.

하나 그것은 탁자를 장식하던 장식보였다. 갑작스럽게 그것을 빼낸 탓에 탁자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꽃병도 있었던 터라 바닥에 떨어져 파사삭 깨어지며 파편들이 튀었다.

‘멍청한 새끼야! 생각을 해라, 생각을…!’

콘스탄틴은 다시금 급히 그녀를 안아서 멀찍이 이동했다.

“…….”

그리고 바로 자괴감에 빠졌다.

유리에 베이는 것보다 더 질 나쁜 게 자신과의 접촉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이따위 행동을 하는 것일까.

“…콘스탄틴?”

아니,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를 하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 여자를……, 이 여자에게 닿고 싶어서…….

그는 이루어져선 안 될 소망과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바람의 괴리에 속이 들끓어,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렸다.

‘한심한 놈, 쓰레기 같은 새끼…….’

스스로에게 욕설을 잔뜩 내뱉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드는 기분이다.

콘스탄틴은 흐트러졌던 마음가짐을 다시금 끌어모으며 호흡을 골랐다.

천천히 두 눈이 다시 뜨였을 때, 거기에는 아까와 같은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정중하게 떨어져 나가며, 더 정중한 목소리로 콘스탄틴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둘 사이에 흐르던 야릇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가 일방적으로 사과했다.

“계속, 사과할 일만 느는군요.”

“아, 니에요. 제가 실수를……. 인사드리러 온 건데.”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당황했으나 사이나는 어찌어찌 문명인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했습니까?”

“…아뇨, 아직.”

“그럼, 같이할까요?”

그리고 또 다른 갑작스러운 전환.

근래 들어 그가 먼저 뭔가를 제의한 적이 없었다.

기뻐야 정상인데…….

분명 온화한 표정에 부드러운 목소리이건만, 사이나는 아까보다 서늘함을 느꼈다.

“싫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거절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좋아요. 저녁…. 좋은, 생각이네요.”

“그래요. 이따 아래 식당에서 만날까요?”

“…네.”

왜지? 뭔가 이상한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사이나는 입을 다물고 잠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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