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괜찮다. 괜찮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살겠다고 콘스탄틴을 모르는 척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사이나는 그가 그렇게 차갑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약간 서늘하기는 해도 움직이면 따뜻해지던데? 침대에서라든지…….’
약간 민망한 기억이 이것저것 떠올랐으나 애써 밀어놓으며 어제의 일에 집중했다.
여기저기 탕파를 잔뜩 침대에 포진해놓고 그녀가 안아주니까 어제도 결국 그는 땀까지 뚝뚝 흘리며 앓았었다.
몸 안에 갇혀 있던 열이 점차 바깥으로 빠져나와 해소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여 좀 희한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의 체온 유지 시스템은 멀쩡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콘스탄틴이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유모처럼 서서히 병에 걸리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사이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거겠지.
‘예뻐. 사야. 그대는… 왜 이리 사랑스럽지?’
그런 것치고는 정신만 놓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애정 어린 말들을 쏟아 내놓긴 하지만 말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만지게 해줘…….’
‘괜찮아요. 더 만져요.’
처참했던 그녀의 드레스의 결말과 별개로 둘은 별일이 없었다.
그녀를 꼭 안고 입술을 부딪쳐 오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딘가 따뜻한 난로를 탐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야릇한 느낌으로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어제의 그는 환자였다. 그녀는 인간 탕파였고.
사랑 고백 운운한 것은 정말 심술이었다. 처음 ‘고백’이라는 단어를 쓸 때 만해도 자백한 거 기억이 나느냐를 물은 건데, 그의 반응이 너무 싸늘해서 사랑 고백이라고 뜻을 바꿔 심술을 부려본 것이다.
기억이 나면 당연히 농담인 줄 알 테고, 안 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울어버릴 줄이야.’
남자의 눈물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콘스탄틴의 눈물이라서 그런가.
눈물 자체가 충격적이면서도, 하얀 속눈썹이 젖어서 부위 부위 뭉쳐 있던 게 겨울나무에 엉긴 눈서리처럼 예쁘다는 감상이 들었다.
눈 안에 남은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이나는 한숨처럼 결심했다.
‘더는 이 화제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자.’
결혼 초만 해도 침실을 따로 쓰는 게 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합방은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와 밤을 공유하고, 끝 간 데 없는 애정 표현을 받다 보니 욕심이 커져버렸다.
그게 당연해져 버린 것이다.
‘그게 없다고 해도 내심 원해왔던 이상적인 남편이잖아?’
그러니 욕심부리지 마.
타인과 닿지 못하니 바람도 안 피울 거고, 내비 예산이 어지간한 가문 전체 예산과 맞먹을 만큼 부자인 데다, 까다로운 시댁 식구도 없고, 잘생겼지, 지위도 높잖아?
폭력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남편.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제지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이상적인 남편이 어디 있어?
사실 고르고 골랐더라도 찾기 힘들었을, 과분한 사람이다.
‘그러니 한 가지 부족한 걸로, 투정 부려선 안 돼.’
다른 평범한 귀족들처럼, 서로 존중하고 적당히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사이나는 커틀러리를 들고 다시 식사를 시작하며, 스스로 주문을 외듯 반복해서 다짐했다.
* * *
둘 사이는 다시 괜찮아졌다.
사이나가 시야를 다르게 하기 시작하자, 그의 태도는 더 이상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뜨거운 밤이 없을 뿐, 적절한 거리와 친절한 태도는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보기 좋은 귀족 부부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녀는 낮 동안 공작부인의 업무와 번역에 힘썼고, 밤에는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욜리를 안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욜리는 완전히 호전되었다. 이젠 더 이상 과하게 잠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몸집이 커졌다. 이젠 강아지가 아니라 중형견의 성체쯤은 되는 크기였다.
뭐,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라고 들었지만.
“넌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큥?”
“내내 안 크다가 갑자기 한 번씩 커져? 정체가 뭐야?”
“큐, 큐우…?”
갑자기 또 딴청이다.
분명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주제에 불리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모르는 척을 해댔다.
웃기는 녀석 같으니…….
“난 서재에 갈 예정인데, 욜리 넌 어쩔래?”
“컁?”
“또 말없이 사라지지 말고 어디 나갈 거면 꼭 말하고 나가. 알았어?”
“캬앙?”
컁. 큥. 캬앙밖에 말 못 하는 녀석에게 어찌 말을 하고 나가라는 건지. 말을 하면서도 내심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욜리라면 분명 어떻게든 표현을 해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이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바깥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뭐? 나가고 싶다고?”
“컁!”
“어디 갈 건데?”
“컁!”
창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짖었다.
“밖에?”
“컁!”
“산책?”
“컁!”
“이 근처만 다닐 거지?”
“…컁!”
뭔가 아까보다 대답이 좀 늦게 나온 것 같은데…….
“큐, 큐우….”
미심쩍게 가늘어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더니 또다시 딴청.
“…뭔데. 또 유모네 가려는 거야?”
“뀨앙!”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것이 아니란다.
“알았어. 대신 너무 늦기 전에는 돌아와야 해.”
“컁!”
“해지기 전에. 알았지?”
“컁!”
욜리가 포르르 그녀 쪽으로 달려오기에 손을 내밀었더니 손바닥에 제 정수리를 몇 번 비비고는 문가로 달려갔다.
마치 갈 곳이 미리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두다다 사라졌다.
‘…뭐야, 이제 욜리마저 비밀이 생긴 거야?’
주변이 어째 비밀투성이인 것 같다.
하긴, 자신부터 떳떳하지 못하면서, 이래서야 그간 누굴 탓해온 것인지.
씁쓸한 자조를 삼키며 사이나는 서재로 향했다.
뭐라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근래 들어 사이나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아를어 번역에 매진했다.
시간을 되돌아온 탓에 초반에는 좀 헤맸다. 사이나의 체감으로는 거의 10년간 학업에서 손을 놓았다가 다시 시작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지난 생의 수준을 금세 회복할 수 있었고, 얼마간이 더 지나자 오히려 그 수준을 넘어섰다.
새로 구입하게 된 고서적 덕분이었다.
고서적과 블랙 다이아몬드에 적힌 새로운 문법체계가 같이 연계되어 아를어 전반적인 해독 수준이 확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지난 생에는 아예 편지조차 못 받았었는데.’
주인장이 그땐 편지를 안 보냈던 걸까?
음……. 당시 시간대로는 이미 홀랜더가로 시집을 간 이후라 놓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땐 편지를 받았어도… 어차피 구매할 돈이 없었겠지.’
편지를 받았다면 오히려 씁쓸한 기분만 잔뜩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책이 그녀의 수중에 들어와 있고, 덕분에 아를어에 인생을 바친 것처럼 목을 매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일취월장하고 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고나 할까.
‘콘스탄틴의 등에 있는 문자들도 다 옮겨 적었어야 하는데.’
보석에 새겨져 있던 아를어 체계는 감도 못 잡겠는 문장들이 아주 많았는데, 고서적에서 실마리를 찾은 부분들이 상당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등에 있던 아를어 문양까지 더해지면 훨씬 속도가 높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보여 달라고 해도 될까.’
이젠 침대를 나누지 않는 사이이다 보니 맨살을 보여 달라고 하기가 좀 껄끄럽기는 했다.
‘근데 꼭 필요한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필수적인 일이었다. 잘 말해서 협조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다. 공적인 목적이니 그도 이해하겠지.
“……씨.”
“…….”
“아가씨.”
“헉?”
깊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누군가가 제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루퍼트 경.”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그랬어요?”
“델본에 있던 시절로 돌아가신 것 같군요.”
사이나가 아를어에 빠지고 나서는 서재만 들어가면 함흥차사라 매일 유모가 식사를 챙기러 그녀를 찾으러 다니고는 했다.
“저녁 시간이 되었나요? 배는 별로 안 고픈데.”
“저녁도 저녁이지만, 각하께서 돌아오셨다는군요.”
“공작님이요?”
콘스탄틴은 2주 전쯤 또 토벌에 나갔다.
“뿔 나팔 소리 못 들었는데.”
집중하면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못 듣고 그러긴 했지만…….
“조용히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한데 그게 아닌가 보다. 하긴, 콘스탄틴은 전에도 이런 적이 꽤 있었지. 그땐 한밤중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나팔로 온 영지에 알리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네.
“인사드려야겠네요.”
사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경.”
펼쳐둔 책들을 덮고 책상 한쪽에 잘 갈무리한 뒤 사이나는 문 쪽으로 걸었다.
“아가씨.”
“네?”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무슨 뜻으로 묻는 질문일까.
걷다 말고 멈춰선 사이나가 루퍼트를 응시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뭐든 미약하나마 도움이 필요하시면…….”
“…….”
“제가 껄렁하기는 해도 모시는 분에 관해서는 입이 무겁습니다.”
근래 사이나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나. 답지 않게 루퍼트가 걱정스러움을 비쳤다.
“…경은 괜찮아요?”
“예?”
“듣기로 공작령 기사들은 훈련법이나 전투 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낯선 곳인 데다가 그런 것들이 다 다르면, 혹시 배척받을 수도 있지 않아요?”
“…누가 아가씨를 배척합니까?”
“네? 무슨 소리예요?”
“아, 방금 제게 물으신 게… 혹시나 하고.”
“아니에요. 다들 친절해요. 누가 감히 날 배척하겠어요.”
공작의 비호가 사라진 공작부인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거 홀랜더가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 이놈의 말버릇. 그러고 보니 제가 여태 계속 아가씨라고 불렀지요?”
루퍼트가 제 입을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부인.”
“…나도 그 호칭은 좀 그래요. 다른 거 없을까요?”
왜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직도 이리 부담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내심 준비가 되지 않은 걸까?
“그럼,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