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다급한 귀환
“…검은 새가 날아왔기에,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검은 새요?”
검은 새 때문에 설마 저 몸을 하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인가?
경황이 없어서 검은 새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사이나는 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온천에서 탈의를 하면서 그때 갈아입을 옷 사이에 묻어놨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그럼 탈의실에서 날아갔다는 건데…….
“그대의 비명이나 충격 등에 반응했을 겁니다.”
“어…. 비명 때문인가 봐요, 그럼.”
“왜 비명을 질렀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에렌혼 때문에 놀랄 일이 있었어요.”
“에렌, 혼 말입니까?”
“네. 갑자기 나타나서…….”
“갑자기 나타나서, 그리고요?”
제 목을 핥……. 이거 말해도 되는 건가?
상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애버딘 공작과 싸움이라도 벌이는 건 아니겠지?
“좀 놀라긴 했는데 잘 해결됐어요.”
후.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별일 없는 겁니까?”
“저보다는 공작님께 더 별일이 있는 것 같은데… 좀 앉으시는 게 어떨까요?”
에렌혼보다 그의 소매에 엉긴 핏자국이 더 신경이 쓰였다. 파리한 안색 역시도.
“아닙니다. 그대에게 별일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었던 대로 일정을 소화한 뒤 돌아오도록 해요.”
“콘스탄틴! 치료라도 받고 가요!”
“…내 피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
“여행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말을 마치고 망토를 크게 두르며 뒤로 돌아섰다.
앞쪽과 달리 망토는 커다란 데다 색이 진해서 피가 튀어도 잘 티가 나지 않을 재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부상을 입었더라도 뒷모습에서는 알아채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성큼성큼 사라지는 뒷모습은 담담하기 짝이 없어서 다시 한번 그를 잡아볼 생각도 못 하고, 사이나는 멍하니 서서 상념에 잠겨야만 했다.
“어? 어디 갔습니까? 금세 가버렸어요?”
애버딘 공작이 어느새 하인 한 명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쟁반 위에 구급약으로 보이는 물품들이 보였다.
“네. 제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나 봐요. 아니란 걸 아시고는 다시 가셨어요.”
“…무슨 일은 무슨. 부인에게 뭘 심어둔 모양이죠?”
“네?”
“그 자식도 중증이네.”
애버딘은 하인을 다시 내보내며 중얼거렸다.
“큐?”
그런데 멀뚱히 여태까지의 상황을 살펴보기만 하던 욜리가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아까 콘스탄틴이 서 있던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꼬리를 탁탁 쳐댔다. 뭔가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욜리? 왜…….”
자세히 보니 욜리가 냄새를 맡던 자리에 피가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색의 핏방울…….
그냥 옷에 묻은 게 아니라 흘러 떨어졌을 정도라면… 마수의 피일 리가 없지 않을까?
“…마수도 피가 붉나요?”
혹시 몰라 사이나는 애버딘 공작에게 물었다.
“음.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선홍색이나 검붉은 색이 더 많습니다. 초록색이나 파란색도 있고.”
“…….”
“색도 색이지만 마수의 피는 냄새가 다릅니다. 보통은 상당히 역한 편이죠.”
아무리 조합해 봐도 콘스탄틴이 다쳤다는 결론만 나온다.
사이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그의 뒷모습을 다시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다.
“저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부인?”
“죄송한데 저 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워프 게이트를 타려면 애버딘 공작의 도움이 필수였기에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짧은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매우 서운해하는 플로리아에게 사과하며 사이나는 꼭 다시 오겠다고, 그땐 아주 오래 있다가 가겠다고 약속을 해야만 했다.
올 때는 즐거운 기분으로 오느라 길다는 생각을 못 했던 마차 이동 시간이, 돌아가는 길에는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 * *
두 번의 워프까지 마치고 크레이머령에 도착하자 이미 해가 한참이나 기운 상태였다.
루퍼트 경을 대동하고 크림성에 도착하자 한밤중이었다.
예고도 없이 한밤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그녀 때문에 고용인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마님.”
나디아가 소식을 듣고 사이나를 찾아왔다.
“각하께서는요?”
하지만 사이나는 다른 것보다 그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침실에 드신 것으로 압니다.”
“벌써요?”
콘스탄틴의 평소 패턴대로라면 침실에 들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었다.
“예. 오늘은 일찍이 주무신다고 하셨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라. 그 ‘아무도’에 자신도 포함인 것일까, 아닐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마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를 준비해 올리라 이를까요.”
“아니요. 난 괜찮은데 여기 내 기사는 필요할 것 같아요. 숙소와 식사를 준비해주세요. 앞으로 계속 내 호위를 할 겁니다.”
루퍼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녕하십니다. 드보프가에서부터 호위를 맡아온 기사, 루퍼트 비쉘르마입니다.”
“비쉘르마 경. 반갑습니다.”
나디아는 시종을 시켜 그를 안내하게 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루퍼트 역시 크림성에서의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부디 다른 기사들과 불협화음 없이 잘 적응하길 바랐다.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하시는 편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님의 식사를 챙기는 것도 아랫것들의 의무라서요.”
“간단한 스튜나 올려주세요, 그럼. 침실로.”
“알겠습니다. 부드러운 것들로 준비해 올리라고 할 테니,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알았어요.”
사이나는 욜리가 든 바구니를 들고 공작부인의 방으로 올라갔다.
욜리는 또다시 잠에 든 상태라서 조심스럽게 꺼내어 침대에 뉘어주었다.
“…여기 있던 베개가 어디 갔지?”
욜리를 눕히고 자리를 만들어주다가 보니 평소 사이나가 쓰던 베개가 하나 없었다.
세탁실에 있나? 근데 세탁을 하려면 보통 침구 전체를 한꺼번에 하지 않나?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베개가 급한 것은 아니라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보다는 도착해서 정리를 끝내고 나니 어쩐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묘해졌다.
전에 홀랜더가에서는 십 년 가까이 살아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어쩔까.”
그러고 났더니 고민이 되었다. 사이나는 연결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건… 누구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건, 그의 벗은 몸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증상과 연관이 있는 것일 테고…….
‘그렇다는 건 다친 게 확실하다는 걸까?’
만약 혼자 치료할 수 없는 부위라면 어쩌지?
사이나가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해도 괜찮은 걸까.
쉽사리 결론이 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인은 필요해.’
직접 보고 결정을 하거나, 그의 말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혹시라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녀가 외면한 거라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테니 말이다.
사이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연결문 앞에 섰다. 잠금 버튼을 해제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스르륵 열리는 문 너머로 불 하나 밝히지 않은 공간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여태 비어 있던 곳은 사이나의 방일 텐데 어째선지 공작의 방이 더 냉랭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등 하나를 손에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
“콘스탄틴?”
사이나는 그의 방 깊숙이 들어갔다가 너무 놀라서 순간 들고 있던 등을 떨어뜨릴 뻔했다.
침대 바깥으로 삐죽이 나온 기다란 두 다리. 거기엔 아까 보았던 부츠가 그대로 신겨져 있었고, 상체에도 마찬가지로 낮에 입었던 정복 차림에 망토까지 그대로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눕다니.
결벽증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깔끔을 떨던 그의 성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절이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순간 사이나는 그가 과다출혈로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급히 등을 내려놓고 사이나는 그의 코밑에 손을 대어 보았다. 다행히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었다.
“…이게 대체.”
하지만 안색이 얼음장 같았다. 방안도 냉골이 따로 없었다.
사이나더러는 끼니 하나만 걸러도 큰일 날 것처럼 굴던 사람이, 제 몸은 왜 이리 다룬단 말인가.
약간 화가 날 정도였다.
‘뭘 해야 하지…….’
사이나는 잠시 머릿속을 가다듬고 일어나 공작부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녀를 호출해 탕파 주머니 여러 개와 달궈진 숯을 몇 덩이 가져오도록 했다.
그사이 사이나는 콘스탄틴 주변에 불을 밝혔다. 사위가 환해지자 콘스탄틴의 처참한 몰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거뭇한 눈 밑, 파리한 안색, 소금꽃이 피어난 입술. 턱선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 살도 좀 내린 것 같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을 보니 의식을 잃은 상태로도 무언가 편치 않은 것 같았다.
망토를 들추자 핏자국은 더 심각했다. 소매 뒷부분은 마치 다른 색의 천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진하게 피로 물들어 있었고, 지혈이 안 되는 것인지 침대에도 핏자국이 옮겨 물든 상태였다.
사람이 어찌 이 상태로…….
치료라도 하고 누웠어야지.
하아. 미동도 없이 모로 누운 그의 안색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공작부인의 방으로 넘어가 탕파와 숯을 받아오며 사이나는 하녀에게 추가 주문을 했다.
“대야에 따뜻한 물이랑, 넉넉히 수건도 좀 준비해줄래.”
“예.”
사이나는 철 양동이에 담긴 숯덩어리를 공작의 방 벽난로에 놓고 그 위로 마른 장작을 쌓았다. 그리고 바람을 피워 불을 피웠다.
보통 귀족 영애라면 어찌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홀랜더가에 살 적에 온갖 일을 도맡아 했던 터라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사이나는 제 방으로 올라온 뜨거운 물과 간단한 식사거리를 모두 콘스탄틴의 방으로 옮겨놓고 가위를 챙겨 들었다.
그의 덩치로 보아 쉽사리 옷을 벗겨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잘라내기로 했다. 망토는 그나마 쉽게 끌러낼 수 있어서 풀어냈다.
그가 모로 누운 터라 상의의 등 한중간을 가위로 썰었다. 잠귀가 꽤 밝은 것 같았는데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별 반응이 없었다.
‘음?’
그보다는 등을 길게 다 잘라낸 그녀가 뒤에서 앞으로 상의를 벗기려고 팔을 젖히는데, 그의 품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