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빌어먹을 타이밍
중앙에 있는 기둥만 남은 건물터. 거기엔 오랜 시간 이곳에 존재해 온 작은 샘이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온천이다.
‘그러고 보니 사이나에게 보여주지도 못한 곳이군…….’
데려왔다면 분명 엄청 좋아하며 제게 웃어주었을 텐데. 이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콘스탄틴은 그 실망감까지 분노로 치환해 칼리고의 힘을 뽑아냈다. 그리고 묵검에 칼리고의 기운을 강제로 주입한 뒤에 온천수에다 박아버렸다.
-으아아아악! 꺄우아아와아아아악!
머릿속에 괴성이 가득 차며 두통을 자아냈다. 그의 미간이 자동으로 일그러졌으나 검을 빼내지는 않았다.
이 온천은 단순히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다. 사실 수온 자체는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다만 빛 속성을 함유한 특이한 물로서, 수면을 들여다보면 마치 별빛이 반사된 것처럼 반짝거리는 샘이었다.
-와악! 으아아악! 주인아아우와악!
당연하게도 칼리고와는 상극.
다른 수호령들처럼 실체화를 시켜서 패줄 수가 없다 보니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부작용이 심해서 잘 안 쓰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꾸르르르르르륵…….
겨우 머릿속이 잠잠해졌다.
칼리고가 일종의 기절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제야 조금 만족한 콘스탄틴이 검에서 손을 뗐다.
“하아.”
그는 뻑뻑한 눈가를 비비며 유적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지친 기분이다. 적당한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머릿속이 잠잠할 때 수면을 보충해두는 편이 좋았다.
가뭄처럼 버석한 수면의 질로 버티고 있던 그는 기절하듯 잠에 잠겨들었다.
-꺄아아아악
얼마나 잤을까.
그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어쩐지… 사이나의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 혹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좋지 않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제길.”
태양의 기울기를 보니 눈을 붙인 시간이라고 해봐야 한 시간도 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깨버린 것이다.
칼리고 역시 아직 잠잠했다.
하지만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나마 눈을 붙인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묵검을 뽑아 들어 물기를 털고는 칼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유적지를 벗어났다.
“……!”
유적지의 결계를 벗어나자마자 그는 이변을 느꼈다. 근처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포르르.
사이나에게 주었던 검은 새. 그것이 근처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주인의 기운을 찾아내서 그에게 날아온 것이다.
유적지에는 결계가 있어 바깥 기운과 닿지 않기에 여태 근처만 날아다니고 있었던 듯했다.
왜 새가 날아온 거지?
‘…설마 무슨 일이 있나?’
아니다. 그냥 짧은 서신을 보냈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비록 요즘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그녀는 상냥하니까…….
하지만 새는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다. 그것은 사이나 스스로 이 새를 날려 보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콘스탄틴은 반사적으로 힘을 개방했다.
“…빌어먹을!”
하필. 하필 이런 때에!
죽도록 열이 받아도 칼리고를 기절시켜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미친 듯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나마 모레프는 소환이 가능하니 다행이다. 그는 모레프에 올라타서 최고 속도로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 새끼야! 좀 깨어나라고!”
워프 게이트 앞에서 콘스탄틴은 초조함으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힘을 끌어올 수가 없었다. 당연히 워프 게이트를 열 수도 없었다.
“하…….”
그는 초조하게 게이트 앞을 서성이다가 결국 묵검을 꺼내어 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모서리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그 검으로 팔뚝 바깥쪽 문양 있는 부위를 길게 그었다. 순식간에 기다랗게 살성이 벌어지며 피를 뿜어냈다.
다른 쪽도 소매를 걷고 같은 방법으로 그었다.
투두둑 떨어지는 피를 보며 그가 양팔을 90도로 꺾어 손 부분을 위쪽으로 들었다. 피가 팔뚝을 타고 팔꿈치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팔뚝 바깥쪽에 있는 문양에 닿은 피가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가 줄어들고 문양으로 흡수되었다.
-……흐암?
효과가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금기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만 든다.
콘스탄틴은 칼리고가 깨어나는 느낌이 들자마자 힘을 뽑아내어 워프 게이트에 밀어 넣었다.
-피다! 피 냄새! 완전 맛있다! 황홀하다아! 더 줘라! 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터라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용이하지는 않았으나, 콘스탄틴은 집중했다.
겨우 워프 게이트의 형태가 이루어지자마자 거침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으하하하하! 13대 크레이머 공작이 생각나는구나! 그때 마수와 싸우다가 내가 기운이 다했었지! 그런데 아직도 마수가 드글거렸거든! 그래서 내가 그때 주인한테 아주 좋은 방법을 알려줬었지!
기절시켰던 것이 무색하게 평소보다 더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칼리고의 수다 소리가 콘스탄틴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는 황궁의 게이트 존에 도착하고 나서 팔뚝을 다시 한번 그었다. 칼리고가 신나서 날뛰며 그의 피를 미친 듯이 흡수했다.
애버딘 영지로 이어지는 워프 게이트를 넘자 머리가 띵했다.
억지로 과도하게 힘을 끌어 쓴 데다 칼리고가 엄청난 속도로 피를 빨아들이고 있다 보니 체력이라면 자신 있는 그로서도 잠시 휘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칼리고를 제어하기보다 먼저 사이나에게 심어둔 힙스의 기운을 추적했다.
‘…….’
하지만 느껴지지 않는다. 성내에 있다면 감지가 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불안감이 두 배로 치솟았다.
루카스. 이 빌어먹을 새끼.
아직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대뜸 애버딘 공작을 향해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는 욕할 대상이 필요했고, 루카스는 당장 적합한 상대였다. 본능 같은 것이기도 했다.
“칼리고. 힙스 어디 있어.”
그는 칼리고를 시켜 힙스를 추적하게 했다. 아무래도 직속 사령이다보니 칼리고가 그보다 더 넓은 영역을 추적할 수 있었다.
-피 더 주면 알려주~지! 암냠냠냠!
“…….”
그는 겨우 지혈이 되어가는 왼쪽 팔뚝을 다시금 그었다.
-캬하하하핫! 힙스? 동남쪽! 멀다! 좀 가야 돼!
대체 어딜 간 것이란 말인가. 설마 마수를 마주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그는 점차 창백해지는 안색 위로 숨마저 가빠오는 것 같았으나, 무시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워프 게이트가 있는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칼리고의 기운을 둘러 그림자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동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콜도라?’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자 콘스탄틴도 힙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애버딘령의 유명한 온천 관광 도시다.
이쪽으로 관광을 온 건가? 근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검은 새가…….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불길한 상념을 애써 뒤쪽으로 밀어놓으며 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이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별장에 도착했다.
그는 정식으로 출입을 요청하지 않고 담을 넘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검은 새가 날아온 것인지 모른다. 하나 이 별장의 누군가가 사이나에게 뭔 짓을 한 것이라면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거리낌 없이 무단침입을 강행했다.
내부에는 기사들이 여럿 있는 것 같았지만, 작정한 콘스탄틴은 한 명도 마주치지 않고 내부로 스며들 수 있었다.
-맹약자가 있네? 말 새끼 주인 같다?
그리고 예민하게 날을 세운 그의 기감에 익숙한 기운이 걸려들었다. 분명, 루카스의 기운.
문제는 힙스의 기운과 루카스의 기운이 같은 곳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이 있는 곳이 아무리 따져 봐도…….
‘침실……?’
-오오! 주인아! 네 부인 바람났나 보다! 하긴 네가 그리 재수 없이 구니 별수 있냐! 잘됐다! 이참에 헤어져라!
“…….”
평소라면 분명 개소리로 여겼을 칼리고의 말이 가슴에 박혀 드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바닥없이 가라앉으며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 손을 꽉 쥐자 아물어가던 자상이 다시 터져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으나 느낄 수도 없었다.
그 틈새를 타고 칼리고가 또 날름날름 핏방울을 삼키며 소란을 피웠지만, 그는 칼리고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
갑자기 문 안을 들여다보기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시금 검은 새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니다. 새가 날아왔다는 것은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잠깐 망설인 시간조차 후회가 되었다.
그는 검을 빼어 들며 문을 넘었다.
* * *
“……콘스탄틴?”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보게 되어 놀라기도 했지만, 여태 그와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안색 때문에 놀랐다.
얼음처럼 굳은 표정은 그렇다 치고, 안색도 얼음장 같았다.
‘…대체 무슨.’
그러다 그가 검을 빼어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이곳에 전투를 하러 온 것 같은 기세다.
“크레이머야? 너 여긴, 어찌…. 아니 그리고 이 피 냄새는 뭐야?”
피 냄새라는 단어에 또 한 번 놀란 사이나가 콘스탄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흰색 정복 바짓단 아래와 앞섶에 점점이 튄 핏방울이 보였고, 소매 끝과 장갑에 붉은 얼룩이 보였다.
“…다쳤어요?”
사이나가 놀라 그에게 다가가자 콘스탄틴이 움찔하더니 걸음을 한 발짝 뒤로 물렸다.
“다친 거예요?”
사이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닙니다.”
그제야 대답한 콘스탄틴이 검을 얼른 칼집에 갈무리했다.
사이나는 그가 검을 들어 칼집에 넣는 과정에서 팔을 굽히면서 소매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흥건히 젖은 것을 보게 되었다.
“아니라고요? 근데 왜!”
그녀는 지나치게 넓은 핏자국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잡았다.
옷감 아래로 그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금 그가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이 떨어지게끔 유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그녀와 닿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였다.
“…….”
이번엔 사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다쳤으면 얼른 치료를 해야지! 잠깐 있어 봐. 얼른 약을 가져올 테니.”
루카스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약을 가져오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애버딘 공작이 나가자 콘스탄틴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