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갑작스러운 방문객
‘…방문객?’
대체 누구지? 이곳에 그녀를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공녀님이시니?”
“아니요. 애버딘 공작 각하십니다.”
“……?”
“사과를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아.”
정식으로 사과를 하러 오셨나 보구나.
사고는 수호령이 치고, 사과는 맹약자가 해야 하는 거군.
알면 알수록 맹약자의 삶이 참 녹록하지 않다 싶다.
“응접실로 안내해드려.”
“네.”
사이나는 매무새를 점검한 후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공작부인.”
확실히 애버딘 공작이었다.
“맹약의 주인을 뵙습니다.”
“됐습니다.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받을 입장도 아니고.”
애버딘 공작은 면구한 듯한 얼굴이었다.
둘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곧 하녀가 차를 내왔다.
“미리 전했다시피……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음, 진짜 소스라치게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어쨌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이었다면 엄청나게 소름 끼치는 일이었겠지.
“그래도 제 소관이니까요.”
“…….”
의문은 몇 개 있기는 하다.
대체 본성이 아니라 왜 여기에 애버딘 공작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런 거래요?”
대체 에렌혼이 왜 그런 건지.
“…….”
애버딘 공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제 말씀드렸죠? 수호령마다 집착 요소가 있다고.”
“네.”
“에렌혼 같은 경우는…….”
설마.
“그냥. 뭐라 해야 할지. 음…. 그 자식 성향이 원래 그래요. 약간… 관음증이 있어요.”
“…….”
지금 내 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과, 관음증이라고?
“여자를 좋아하고.”
나름의 취향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애버딘 공작이 구시렁거렸다.
아니. 아무래도 어제 말한 ‘접촉’이랄지, ‘스킨십’이라는 표현은 엄청 포장된 게 맞았네.
에렌혼을 향했던 그간의 애정이 상당히 식을 것 같은데…….
“왜, 나와 있었던 건데요? 보통은…….”
“아, 부인께선 크레이머의 수호령만 보셨을 테니 그게 일반적인 줄 아시겠군요. 보통은 실체화를 해두는 편이 더 맹약자에게 부담이 없습니다.”
“…그런 거예요?”
“크레이머 그 녀석이 독한 거죠. 아니면 그쪽 수호령의 특성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고. 보통은 실체화를 안 하고 오래 품고 있는 게 더 힘들어요.”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콘스탄틴의 경우, 아마도 칼리고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사이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제가 말릴 새도 없이….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그럼 어디 있어요?”
“지금은…… 회수한 상탭니다.”
“힘드시다면서요?”
“그래도 또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렇구나.
콘스탄틴과 달리 애버딘 공작은 물음 하나를 주면 알아서 부가 설명까지 잘 해주는 타입이었다.
덕분에 사이나는 수호령과 맹약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콘스탄틴과 지낸 시간은 더 많은데도, 애버딘 공작이 알려준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근데,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예?”
“본성에 안 계시고. 갑자기 콜도라에 나타나셔서 놀랐거든요.”
“…….”
애버딘 공작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궁금하다고 직접 물어보실 줄은 몰랐는데.”
와. 훅 치고 들어오네요. 애버딘 공작이 중얼거렸다.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보통은 궁금하다고 다 물어보지는 않지. 특히 상대방의 신분이 공작쯤 되면 더더욱.
“뭐……. 실은… 잠깐 보고 가려고 했는데. 흠흠.”
누굴 잠깐 보고, 설마…….
“여동생을, 엄청 아끼시나 봐요.”
오빠가 연애도 방해하고 엄격하다더니, 정말이네. 여기까지 감시하러 왔나 보구나.
‘시스콤… 같은 건가.’
그래도, 이 정도면 심각한 편 아닌가?
“……아, 예. 혹시 사고라도 칠까 싶어서. 흠흠.”
세이지는 그래도 감시까지는 안 하는데, 부러워할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게다가 사고는 본인의 수호령이 더 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저래서야…….
“플로리아도 데뷔까지 한 영애인데, 너무 심한 간섭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과하면 오히려 엇나갈 수도 있잖아요.”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나는 플로리아를 위해 한마디 했다. 괜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 별수 없지만.
게다가 본인은 그렇게 바람둥이로 사시면서 왜 동생만…….
“……아직 철이 없어서요. 그래도, 참고하겠습니다.”
아무튼 경험해 본 놈(?)이 더하다니까.
사이나는 내심 속으로 혀를 찼다.
“아, 그러고 보니 부탁이 있습니다.”
“네?”
“부탁을 드릴 입장이 아니기는 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면요.”
“음. 아까 온천에서 본 짐승이 부인의 것이라던데.”
“욜리요?”
“네. 늑대 비슷한 그 녀석이요.”
욜리가 왜?
“그 녀석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왜요? 혹시 에렌혼의 뿔이 잘못되기라도… 했어요?”
덩치만 보면 욜리는 에렌혼의 뒷발차기 한 방에 뻥 날아갈 크기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물고 늘어졌으니 뿔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사이나는 옆집 아이를 때리고 온 아이 엄마의 마음이 되어 조마조마하게 물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기운이 독특하기에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요.”
“아…….”
전에 콘스탄틴도 비슷한 말을 하며 살펴본 적이 있지.
맹약자들만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럼.”
사이나는 애버딘 공작을 침실로 안내했다.
“자고 있거든요.”
침실인 게 좀 걸리기는 했지만, 자는 욜리를 들어 옮기는 것이 더 내키지 않았다.
아까 그 사건 이후로 루퍼트 경이 매의 눈으로 그녀 주변을 지키고 있기도 하니 괜찮을 것 같다. 문도 열어둘 거고.
“여기 원래 플로리아가 올 때마다 묵는 방인데, 양보한 모양이네요. 진짜 친한 사이인가 봅니다?”
“정말요?”
방이 좋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 줄은 또 몰랐네.
공작도 동생 때문에 방이 익숙한지 편안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쿨쿨 자고 있는 욜리 녀석을 사이나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져 봐도 돼요?”
“아, 네. 괜찮을 거예요. 아마.”
애버딘 공작은 욜리의 털을 슬쩍 더듬으며 뭔가를 관찰하는 듯했다.
“신기하네……. 뭐지.”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사이나 쪽으로 시선을 돌려 또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으로 살폈다.
“맹약자는 아니시죠?”
“…저요?”
“네.”
“당연히 아니죠.”
“그래요.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애버딘 공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또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어디서 났습니까?”
“저희 집 후원에서…….”
“후원이요? 황도?”
“아뇨. 드보프 본령에서요. 델본.”
“흠.”
그리고는 한참을 더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욜리의 귀가 쫑긋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어, 욜리?”
욜리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무색했다. 너무 시끄러웠던 걸까?
“큐?”
동그랗게 뜨인 녀석의 눈이 둘을 지나 문가에 꽂혔다.
“왜, 왜 그래?”
“…컁?”
왜 문 쪽을 보나 싶어서 시선을 돌렸다가 사이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자네?”
“……콘스탄틴?”
거기에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크레이머 공작이 서 있었다.
엄청나게 굳은 표정을 하고서.
* * *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수호령은 에렌혼이에요.’
그 말이 끊임없이 콘스탄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작년 건국제 때 퍼레이드를 간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럼 사이나, 그대가 선택한 남자는 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
사람 눈은 다 똑같다.
루카스 애버딘. 그도 사이나를 직접 만나본다면 분명 알아챌 것이다. 그녀가…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걸.
-그 시답잖은 말 새끼를 제일 좋아하다니. 네 부인도 안목이 참 이상하다. 자고로 위엄이라 함은 이 칼리고 아니냐?
뭐, 생긴 거로만 보면 칼리고 네 자식보다는 낫지.
에렌혼뿐만 아니라 루카스도 자신 같은 문제는 없을 테니…… 그녀를 외롭게 두지 않을 거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런저런 가정을 할 때마다 환장할 것 같았다.
그녀와 닿을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그녀를 놓아준다는 상상을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지. 차라리 애버딘 공작이랑 결혼했으면 파장도 맞았을 텐데! 주인아! 그 보아라! 이 결혼 내가 말리지 않았냐! 긴 세월 경험이 축적된 어르신의 말을 무시하면 좋을 게 없는 것이야!
기계적으로 서류를 읽고 사인을 하고 있던 그의 펜이 손끝에서 부러졌다.
“…닥쳐라, 좀.”
-내가 틀린 말 했냐! 어차피 이제 손도 못 댈 여자 끼고 살아서 뭐 하냐! 당장 헤어져라!
콰앙!
-…….
십 년 넘게 공작의 집무실을 지켜오던 단단한 흑단목 책상이 반으로 쪼개졌다.
“하, 더 이상은 못 참겠군.”
-주, 주인아? 헤헤. 화났어? 이 칼리고가 말은 좀 많지만 틀린 말은 안 하는 것 알지 않냐. 그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지.
인간계에 살면서 주워들은 것은 많아서 양심까지 운운하는 꼴을 보니 더 열이 받는다.
콘스탄틴은 묵검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인아? 주인아! 어디 가냐? 갑자기 묵검은 왜 챙겨? 설마 너 거기 가는 거 아니지?
콘스탄틴은 힘을 개방하여 모레프를 소환했다. 칼리고가 속도는 더 빠르지만 아직은 해가 있는 시간이라 모레프를 타고 달렸다.
칼리고의 힘을 두르는 게 짜증 나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야! 주인아! 이쪽 방향은 거기잖아! 왜 이리로 가는 건데!
몇 주째 쌓인 불면에다가 사이나를 향한 그리움. 그녀를 손에 쥐고서도 결국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
스트레스가 쌓일 때로 쌓인 그는 이것을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너는 맞는 말을 들었다고 이렇게 화를 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신사라면 충고도 들을 줄 알아야지!
이미 이 새끼를 뒤지게 패버리기로 결심한 터라 뭐라고 지껄이든 동요치 않았다.
어느새 유적지에 도착한 그는 중앙으로 이동했다.
-주, 주인아! 이러지 말자? 나 그러면 힘 못 써! 그사이에 마수라도 출몰하면 어떻게 하냐! 응?
그래. 언제나 그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피해왔던 일이다. 그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언제나 참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못 참겠다.
-주인아! 야! 으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