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 이건 반칙이지
“예? 무슨…….”
앞으로도 맹약자들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콘스탄틴을 이해하고 싶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을 완전히 해낼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몰랐다면 모르되 약간이나마 알게 된 입장에서, 사이나가 할 수 있는 것.
“쉽지 않다는 거잖아요. 맹약자로 사는 것이.”
미약할지언정 진심을 담은 말.
“공작님 같은 분들께서 대신 피 흘려주신 덕분에,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평안할 수 있다는 거니까.”
전에 콘스탄틴에게도 했듯이, 수호의 맹약의 의무를 진 자들에 대한 감사를 조금이라도 표하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거라는 걸… 새삼 깨닫게 돼요.”
사실 따져보면 공작가는 누구나 높이 바라보는 위치에 있지만, 딱히 군림하지는 않는다.
권리도 권력도 크지만, 의무가 더 큰 자리.
어쩌면 누군가는 직위보다 평안을 선택하고 싶어 할 정도로.
“그러니 사실 제 감사의 표현도 보잘것없는 말뿐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이나는 애버딘 공작을 향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드려요.”
바람이 불었다.
어쩐 일인지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애버딘 공작을 보다가, 바람에 섞여 들어온 먼지에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질끈 감았던 눈은 바람이 잦아든 후에야 다시 뜨였다. 그리고 다시 뜬 시야에 제 얼굴을 모로 틀고 손으로 눈가를 가린 공작이 보였다.
“아, 이건… 반칙이지.”
“……?”
“하아…….”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사이나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자신이 한 말을 복기할 무렵, 애버딘 공작이 어딘가 음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콘스탄틴, 사랑합니까?”
“…네?”
“아니, 아닙니다. 미친놈. 헛소리가 자꾸 튀어나오네요.”
“…….”
“잊어버리세요.”
애버딘 공작은 풍성한 고수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가끔은 너무 예쁜 말을 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자요. 밤이 늦었어요.”
애버딘 공작은 사이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졌다.
‘네. 공작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한마디 대답할 틈도 없이.
* * *
다음 날.
플로리아의 진두지휘 아래, 이른 아침부터 사이나는 마차에 탑승해야 했다.
“애버딘령에 왔으면 온천 여행은 필수지!”
그냥 온천 탐방도 아니고 온천 여행이다. 자동으로 가출(?) 기간 연장이다.
‘뭐, 딱 하루만 있다가 간다고 말한 적은 없으니까.’
정확하게 며칠 일정이라고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장거리 방문을 왔는데 딱 하루 만에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는 편이 더 일반적이지 않으니 알아서 감안하고 있을 것이다.
“자자, 서두르라구!”
플로리아는 기운이 넘쳤다.
어제 갑자기 그렇게 기절한 것 치고 플로리아는 일말의 숙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입만 축인 게 다인 사이나가 지금 더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았다.
‘…플로리아. 술이 센 건지, 약한 건지 모르겠어.’
하녀들이 실을 짐이 남았는지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가씨.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 루퍼트 경. 어제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푹 쉬었나요?”
“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불러들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도 오히려 좋아하셨습니다.”
익숙한 드보프가의 식솔 하나 없이 사이나 혼자 떠난 것이 아버지도 내심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특별히 큰일이 있어 부른 것은 아니에요. 다만 낯선 곳에 간다고 공작님께서…….”
“예. 호위 기사는 어딜 가든 대동하셔야지요. 이제 공작부인이 되셨으니, 더 귀한 몸이 아니십니까.”
루퍼트의 태도는 평소와 매우 달랐다. 일말의 장난기나 헐렁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곳이라서 그런 건지, 남이 보는 앞에서 사이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이유든 그의 태도는 바뀐 사이나의 위치를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자, 준비 끝! 출발하자!”
하녀 군단을 데리고 플로리아가 다시 나타났다. 하녀들은 각자 들고 온 짐들을 착착 짐칸에 싣더니 나뉘어 마차에 탑승했다.
사이나와 플로리아 둘이 가는 여행인데 어째서인지 마차만 세 대다. 새삼 사이나가 단출하게 다녔었구나를 알 수 있었다.
“어, 당신이로군요?”
플로리아가 루퍼트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요. 저쪽 우리 기사단에 말을 해놓았으니 가서 호위 위치를 배정받도록 해요.”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루퍼트가 떠나고 플로리아가 탑승하자 마차들이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저 기사 쓸 만해?”
“누구? 루퍼트 경?”
“응.”
“실력은 확실하다고 오빠가 붙여준 기사인데?”
“음. 듣기로 황도에서 아무리 잘나가도 공작령에서는 다르다고 들어서.”
“뭐가 다른데?”
“아무래도 공작령은 마수들이 나오잖아. 싸우는 방식이나 전술 등이 아예 다르다고 들었어.”
“아…….”
이쪽 생리 운운하던 콘스탄틴의 말이 그런 뜻이었나.
“뭐, 그래도 괜찮아! 우리가 가는 곳은 마수가 나오는 지역이 아니거든.”
하긴, 마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면 온천 여행지로 개발되지도 않았겠지.
두어 시간 거리였다.
플로리아와 수다를 떨며 오니 금방이었다.
“짜잔-! 애버딘의 온천 휴양도시 ‘콜도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휴양 도시? 세상에. 그저 어딘가 온천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나 생각했지 휴양 도시라니. 이렇게 본격적일 줄은 몰랐다.
플로리아는 보기와 달리 엄청난 행동파였다.
아니, 사이나 빼고 사이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동력이 대단한 것 같다.
“와…. 엄청 멋있다. 여기.”
그리고 마차 창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길부터 매우 잘 깔려 있었고, 건물들 하나하나와 구획 자체를 계획해서 지은 듯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는 형태로 조화로움을 이루고 있었다.
활발한 유동 인구나 마차 등의 수를 볼 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상업 도시로 보였다.
서북지역이 워낙 멀다 보니 황도에서만 살던 사이나는 잘 몰랐지만, 이 근처에서는 매우 유명한 관광 도시였던 것이다.
“사람이 엄청 많네.”
“여기 온천수는 피부에 좋은 것으로 유명해. 근데 또 치료 효과도 있거든. 특히 부인병 관련한 병에 효능이 좋아서 여성 관광객이 특히 많아.”
“와, 그래?”
“응.”
정말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남자들은 손님이라기보다는 주인을 따라온 시종이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버는 콜도라 주민처럼 보였다.
활기가 넘치는 도시의 모습이 신기해서 사이나는 한참을 더 창에 매달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둘의 마차는 콜도라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더 달렸다. 그리고 내리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였다.
“애버딘가의 전용 온천이야. 저 아래에는 노천탕도 있긴 한데 우리가 그런 델 쓸 수는 없잖아.”
“와아.”
이곳은 콜도라에 있는 애버딘가의 별장인 듯했다. 영주의 별장답게 가장 좋은 곳에 지어져 있었고, 독립된 형태였다.
“각자 방에서 잠시 쉬었다가 온천에서 만나자. 하녀가 안내해줄 거야.”
“응. 알았어.”
사이나는 하녀가 짐을 풀고 정리하는 동안 바구니에 있던 욜리를 꺼내 침대 위에 눕혔다. 꽤 멀리 가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오늘도 엄청 자는구나.”
아침에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든 것을 보아서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욜리의 머리를 쓸어주며 푹 자고 일어나라고 속삭이며 사이나도 잠시 몸을 누였다.
한 시간 정도 쉬었을까.
하녀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사이나는 욜리의 콧잔등을 약하게 두 번 톡톡하고는 하녀의 안내를 따라 나섰다.
건물을 나가서 후원을 가로지르자 너머에 대리석으로 지어진 또 다른 건물이 있었다.
‘어, 건물이네?’
막연하게 노천을 상상해서 그런지, 번듯한 건물이 어쩐지 약간 의외였다.
온천물을 끌어다 받아서 담그는 형태인가?
온천탕의 형태를 상상해 보며 사이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건물은 외부의 시야와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겉보기에 건물처럼 지은 거지, 막상 들어가니 노천이나 다름없었다.
탈의를 위한 공간이 있는 쪽에만 지붕이 있을 뿐, 하늘은 뻥 뚫려 있었고 입구 반대쪽에는 아예 벽조차 없었다. 다만 그쪽으로는 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
몸을 담그는 동안 초록을 눈에 담아 심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구조였다.
“사야! 얼른 들어와!”
내부로 들어가니 플로리아는 벌써 탕에 들어가 있었다.
행동파답게 빠르기도 했다.
“어, 잠깐만.”
사이나는 탈의실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의 도움을 받아 도톰한 가운으로 갈아입고 탕으로 들어섰다.
뜨끈한 온천수는 무슨 성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투명하지 않고 약간 우윳빛이었다. 피부위로 적셔보자 약간 미끈거리기도 했다.
“이게 온천수구나.”
“온천 처음이야?”
“응.”
“잘됐다! 좋은 경험이었으면 좋겠네.”
“응, 너무 신기해. 좋은 곳에 데려와 줘서 고마워, 플로리아.”
“뭘! 흠흠.”
물이 뜨거워서인지 플로리아는 볼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나의 볼 역시 발그레 달아올랐다.
고지대라 그런지 공기 자체가 서늘한 편이었는데도 온천에 계속 들어가 있자 약간 더운 감이 들었던 것이다.
약간 시간이 지나고 하녀들이 간단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들고 왔다. 그중에는 얼음을 동동 띄운 레모네이드도 있어서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다.
언젠지 모르게 온천 한쪽에 담가두었던 달걀도 다 익었다며 들고 오기에 까서 먹었다. 손으로 까서 소금만 찍어서 먹는 삶은 달걀은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온천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둘은 물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먹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플로리아…. 너 어제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나?”
그러다가 사이나가 조심스럽게 어제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