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집착의 요소
‘아, 술 취해서 잠든 건가.’
어떤 전조 증상 하나 없이 갑자기 이렇게 쓰러지다니…….
일말의 홍조도, 혀 꼬임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 아주 위험한 술버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버릇을 알고 계셨다면 애버딘 공작님이 왜 술을 못 마시게 했는지 이해가 가는걸.’
본인의 주량과 술버릇은 꼭 알아야 한다. 특히 여성이라면 더.
내일 플로리아에게 넌지시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와, 진짜 놀랐어.’
사이나는 주변을 둘러본 뒤 설렁줄을 찾아 당겼다. 하녀를 불러 플로리아를 침실로 옮기라고 할 생각이었다.
똑똑. 그런데 바로 노크 소리가 났다.
‘엄청 빠르네.’
애버딘의 하녀들은 대체 어디서 대기 중이기에 이렇게 바로 온 걸까, 속으로 놀라며 사이나가 문을 열었다.
“야! 너, 또 과일 꼬냑 들고 갔! ……다며…….”
대뜸 큰 소리가 났다.
하녀가 아니었다.
“……공작님?”
“아, 부인…. 리아가…….”
애버딘 공작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플로리아는 오빠의 허락 없이 술 창고를 몰래 털어온 모양이다.
“플로리아는 잠들었어요.”
“혹시 갑자기…….”
“네. 갑자기요.”
“하아, 이 자식을 그냥…….”
“깨어나면 잘 설명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술도 약한 게 꾸역꾸역 왜 마시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원래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습성이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만 하는 것보다, 그 위험성에 대해 잘 설명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본인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게 공작님께서 날 잡고 같이 마셔 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자기 주량을 모르는 것에 대한 위험성에 관하여 설명하자면, 사이나가 산증인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이나는 이제 자신의 주량을 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여태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 듯 애버딘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하녀가 도착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아니다. 손님께서 호출하셨다.”
“아, 플로리아를 침대로 옮겨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요.”
“그건, 제가 하지요.”
애버딘 공작은 성큼 응접실로 들어서더니 손쉽게 플로리아를 안아 들었다.
“너는 손님을 방으로 모셔라.”
공작이 하녀에게 명했다.
“아니에요. 방이 어딘지 알아요. 플로리아 옷을 갈아입혀야 할 것 같으니 수발을 들라 하는 게 낫겠네요.”
“하녀를 더 부르면 돼요.”
“제가 따로 부르면 되죠.”
“그럴래요?”
“네.”
애버딘이 걸음을 옮기고 하녀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본 뒤, 사이나는 응접실을 나섰다.
홀짝거리며 입만 적시는 수준으로 마셨음에도 취기가 꽤 올랐다. 독주라 그런 것 같았다.
바로 방으로 가려던 마음을 바꿔, 사이나는 잠시 바람을 좀 쐬기로 했다. 그렇다고 건물 바깥까지 나가기에는 좀 부담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마침 좋은 곳이 있었다.
건물이 가운데가 뚫린 네모 형으로 지어진 터라 1층 중앙에 내부 정원이 작게 있었던 것이다.
사이나는 슬슬 걸어 그곳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꼭 어두운 곳에서 들여다본 콘스탄틴의 눈빛과 비슷한 색이다.
생각이 저도 모르게 또 그를 향해 흘렀다.
‘그놈의 비밀…….’
누가 비밀스러운 남자나 미스터리한 남자가 멋있다고 하면 이젠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사이나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라 어지간하면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밀이라는 건, 관계의 발전에 치명적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사이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 있어요?”
“……?!”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사이나는 흠칫, 놀랐다.
“왜 그리 한숨을 쉬어요?”
“아, 공작님.”
애버딘 공작이었다.
플로리아를 눕히고 나와 그녀를 발견한 모양이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중이었어요.”
“무슨 생각인데요.”
어디에다 말할 만한 고민은 아닌데…….
사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맹약의 주인이라는 건 어때요?”
“…제 삶이 어떠냐는 질문입니까?”
“네. 다들 맹약의 주인을 부러워하기만 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나른하고 퇴폐적이지만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던 애버딘 주변의 공기가 일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 건 왜, 묻는 건가요?”
“가까이서 살아보니, 상상과 다르더라고요.”
“흐음.”
여전히 조금은 가벼운 태도였으나, 눈빛만은 진지했다.
“그렇죠. 막상 이 자리에 앉아보면 물리고 싶어 할 작자들이 많을 겁니다.”
“…….”
“맥페이든 제국의 공작이라는 건 사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면이 많거든요. 토벌도 잦고, 사람보다 못생긴 마수 면상을 더 많이 보고 살아야 하기도 하고.”
애버딘 공작은 약간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맹약에… 부작용도 있나요?”
사이나는 전에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대답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부작용이요?”
“네. 수호령을 부린다는 게 쉽기만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공작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있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대번에 답이 나왔다. 부작용이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였다.
콘스탄틴만 그런 게 아닌가 보네.
“…뭔지 물어도 되나요?”
애버딘 공작은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손바닥 위에 턱을 걸치더니 입을 열었다.
“음. 데이트 중에 키스만 할라치면 튀어나와 구경하려고 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왕창 깨먹는다거나…….”
“…네?”
“침대 위에서도 좀…….”
공작이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에 사이나의 말문이 막혔다.
“수호령을 좋아하신다지요?”
“아, 네.”
“이제 맹약자의 부인이시니, 이 정도는 알고 계셔도 좋을 것 같군요. 몇 가지 말씀드리죠.”
뭔가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알아서 더 이야기를 해줄 줄은 몰랐다. 사이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수호령에 대한 환상은 버리는 게 좋아요.”
“…….”
“정령들이 수호령이 되었을 때는 나름의 바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바람이라 함은?”
“인간에게나 좋자고 일방적인 맹약을 맺었겠습니까.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는 거죠.”
아,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안 해봤다. 어쩌면 당연한 걸 텐데도.
고귀한 힘이니, 제국의 수호자니 하는 표현으로 불려서인가.
‘아를-프로메사’에 환장했던 사이나도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형성된 그런 이미지를 벗어나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이다.
관련 정보 자체가 제한되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놈들은 종류는 달라도 대부분 집착 요소를 갖고 있어요.”
“집착, 요소요?”
“정령계가 아닌 인간 세상에 그들을 묶어 놓은 계기 같은 겁니다.”
그니까, 수호령들이 각각 집착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지? 근데 정령이 대체 뭐에 집착을…….
알 듯 말 듯 하다.
“이를테면…….”
여전히 아리송해 보이는 사이나의 표정을 보더니 애버딘 공작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에렌혼 같은 경우는 사람 사이의 접촉… 이랄까. 그런 것에 관심이 많죠.”
“접촉, 이요?”
“스킨십… 뭐, 그런 거요.”
“…….”
접촉이라니. 뭔가 좀 포장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거지? 그래서 ‘변태 유니콘’이라고 불리게 된 건가?
정말 깨는 내용이었다. 특히나 사이나는 수호령 중에서도 에렌혼을 제일 좋아했던 사람이라, 더 충격이 컸다.
“부작용이…… 심하네요.”
“대부분은 모르는 사실이기는 한데, 수호령들이… 성격이 딱히 아름답지는 않아요.”
“…….”
“대부분 지랄 맞죠.”
전에 아마도 수호령에게 욕설을 내뱉던 콘스탄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들과 습성 자체가 달라서 그런 것 같은데… 또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이 자식들이 인간계에 오래 살아서 인간들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거라서 더 열 받는 거거든요.”
“아.”
애버딘 공작은 가벼운 듯 이야기했지만, 사이나는 이면에 생략된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가 수호령, 아켈리온의 계승 조건은 알고 있죠?”
“네.”
헤베타라는 제도가 있는 이상 저 부분은 비밀이 될 수 없으니까.
“황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어느 가문이든 수호령을 계승하려면 나름의 자격 증명이 필요해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황가의 수호령은 계승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가문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것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단순히 그 가문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것만으로는 부합하지 않아요.”
“그럼…….”
“첫 맹약 때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따라 아마 다를 텐데, 승계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어요.”
그 녹록지 않은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애버딘 공작은 나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다른 맹약자들과 달리 자신은 딱히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반대로 지나치게 녹록지 않았기에 차라리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사이나는 후자일 것이라는 가능성에 더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게 맞는다면 애버딘 공작의 가볍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미소나 그 태도는, 일종의 자기방어 같은 거였던 걸까?
‘그렇다면 당장 이해하기 힘든 콘스탄틴의 태도도 실은…….’
또다시 생각이 그에게로 흘렀다.
실상 더 괴로운 사람은 그녀보다 콘스탄틴일까?
괴로움이라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안다. 누구도 내 괴로움이 타인의 것보다 작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괴로움이 가장 크게 느껴질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한 번이나마 더 그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어떤 고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맹약자의 고통.
맹약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비밀.
이런 것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맹약자는 그저 자신이 가진 의무를 충실히 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맹약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한없이 가벼워 보였던 애버딘 공작 또한, 나름의 고통을 숨기며 저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역시 사람은 절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이나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