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끝내주는 걸 할 거야
“근데 내 생각에도 오빠보다는 크레이머 공작님이 더 나은 것 같아. 그분이 은근히 엄청 다정하더라고. 오빠는 좀… 진심이 얄팍한 편이잖아.”
“야! 내가 뭐 어때서? 크레이머 그 자식이? 다정? 다아정? 허,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다, 없어.”
“…….”
사이나는 갑자기 애버딘령에 온다고 했던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일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사야는 내 친구니까 내가 독점할 거야. 오빤 가서 일이나 해.”
“…….”
애버딘 공작은 짧게 플로리아를 노려보더니 아까보다 더 공격적으로 스테이크를 썰어댔다. 접시까지 썰 기세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둘, 사이나와 플로리아는 소소하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이나 묵었다가 갈 거야, 사야?”
“딱히 정하고 오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자고 갈 거고…….”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하루만 잔다고? 안 될 소리지! 내일 온천도 가야 하고, 우리 영지 구경도 해야 하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 그래?”
“당연하지!”
사실 사이나는 플로리아와의 사이를 그저 나쁜 사이는 아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편지를 쓰면서도 ‘괜찮을까?’ 고민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리 격하게 반겨주지를 않나, 진심으로 그녀와의 시간을 괜찮아하는 것 같아 사이나가 오히려 당황하는 중이었다.
사이나는 아마 남자로 태어났으면 분명 어디 아카데미 연구실에 박혀 연구나 하다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실제 성향은 방구석 공부벌레에 가장 가까웠으니.
서재에 진득하게 틀어박혀 공부나 할 줄 알았지,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는 젬병인 성향이라 사람들에게서 이렇게 예상과 다른 면모를 발견할 때마다 당황스러워지고는 했다.
‘플로리아는 참 착하고 예쁘구나.’
매번 사람에 대한 예상이 틀리니 예상을 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건 또 잘 안 된다. 사이나는 반성을 시작했다.
“너무 고마워. 아까 꽃밭도 그렇고. 이렇게 반겨주어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인 광경이었어.”
사이나는 해사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깊게 미소 지었다.
“뭐…, 벼, 별거 아니야! 더 좋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플로리아는 어째서인지 발개진 얼굴로 소리치듯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외에도 둘은 한참이나 이것저것 수다를 떨었다. 주로 앞으로는 무얼 할 건지, 어딜 구경 가야 하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었고, 사이나는 열성적인 플로리아의 주장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에 시종이 플로리아를 찾아왔다.
“아가씨.”
“응? 무슨 일이야?”
“아가씨 손님의 호위기사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 루퍼트 경이 왔나 보구나. 정말 보내주셨네?
접촉을 해야만 워프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 특성상, 그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 자체에 꽤 고민을 해야 했다.
‘게이트 넘을 때 접촉이라고 해봐야 잠깐이기는 하지만.’
피부 이야기를 몇 번 했던 것을 보면 모든 접촉보다는 맨살끼리 닿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래 그는 사람과 닿는 것 자체를 아예 피하던 사람이다.
예외가 바로 사이나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호쾌하게(그의 입장에서는 호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루퍼트를 보내준 것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꼬여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좋게 생각하자.’
애버딘령에서 특별히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곳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루퍼트 경과 같이 크레이머령으로 갈 수 있으니까.
“응? 지금 말이야?”
“예.”
하지만 플로리아는 워프 게이트가 아니면 오지 못할 지역인 이곳에 애매한 시간에 도착한 손님에 대한 의문이 드는 모양이다.
“원래 같이 왔어야 하는 건데 좀 늦었지.”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왜 호위도 없이 왔나 했더니 그랬구나. 근데 왜 같이 안 오고?”
“크레이머 기사가 아니고 루퍼트 경이 오느라 그래. 본가에서.”
“아, 그 주홍 머리 기사?”
“응.”
“그럼 크레이머 공작님이 직접 데리고 오셨나 보네?”
“그, 렇겠지?”
그가 아니면 워프 게이트를 이동할 사람이 없으니까.
“뭐 해? 남편 보고 오지 않아도 괜찮아?”
“…응?”
“여기까지 같이 오신 거 아니야?”
“아마……, 그건 아니실걸.”
사이나는 내심 당황해서 변명했다. 진짜 그가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사실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것을 애버딘가에 알게 할 수는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난 또 뜨거운 신혼이라 그새 못 참고 호위기사 핑계로 여기 오신 줄 알았지.”
“…….”
실제와 다르게 둘은 바깥에 열렬하게 좋아해서 결혼한 사이로 비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분명 그 반대보다는 좋은 일인데, 지금 심정으로는 그것이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졌다.
사이나는 스스로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같아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공작님도… 요즘 바쁘시더라고. 기사만 데려다주고 바로 가셨을 거야.”
“아, 공작령이야 뭐. 그놈의 마수들이 우리 사정 봐주면서 창궐하는 게 아니니까.”
“응.”
공작은 공작의 일을 하고,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놀면 된다며 플로리아는 헤헤 웃었다.
“오늘은 외출 계획 없으니까 그 기사에게는 숙소를 배정해주고 쉬라고 해.”
“예.”
시종이 물러갔다.
“그리고 사야, 우리는…….”
“음?”
“끝내주는 걸 할 거야.”
플로리아가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끝내주는 게 뭔데?”
뭔가 수상하게 웃는 표정에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플로리아가 외쳤다.
“애버딘령의 특산물 잔치!”
“…….”
특산물 잔치라니……. 아니, 근데 왜 저런 표정으로……. 괜히 이상한 생각했잖아.
암튼 플로리아는 엄청 귀엽다. 작은 것(?)에도 저렇게 신나 하다니.
‘그건 그렇고 애버딘령의 특산물이 뭐더라…….’
사이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루비가 유명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짠!”
“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애버딘령은 전체적으로 높은 온도를 가진 지열 때문인지 당도 높은 과일이 유명했고, 그 과일로 만든 2차 가공물 또한 유명했다.
눈앞에 잔뜩 차려진 과일과 과일 절임, 말린 과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과일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꼬냑이 유명했는데 엄청난 도수를 자랑하면서도 입 안에 머금으면 달큼하고 향긋한 과일 내음이 나서 애주가들이 매우 좋아하는 술 중에 하나라고 들었던 것이 이제 생각났다.
사실 전생에 사이나는 알콜 의존증이 꽤 심했다.
술에 데였으니 술을 멀리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마음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홀랜더가의 살림을 꾸리느라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와인을 찾아 울며 겨자 먹기로 엄청 시음을 해야 했다.
그렇게 술의 장점을 알게 되었다.
예민한 신경줄을 느슨하게 해주는 효과를 크게 보고 나서 홀짝홀짝 마시게 되었던 것이다.
딱히 취향을 가리며 마실 형편은 아니었으나, 애버딘령의 과일 꼬냑은 마셔본 적이 없었다. 독주인 것은 그렇다 치고 유명한 만큼 비쌌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오빠도 날 말릴 수 없지!”
주먹을 불끈 쥔 플로리아의 의지 충만한 표정을 보니, 손님 접대를 빙자한 사심이 아주 많이 섞인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아까 그 표정이었구나.’
사이나는 방금 전 플로리아의 귀엽게 음흉했던 미소를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지금의 몸은 그다지 술에 익숙한 몸이 아니라 독주를 마셔도 될까 싶었으나, 플로리아의 기대감 가득한 눈이 말도 못 하게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딴 걸 달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냥 입만 축이며 플로리아와의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어때? 맛있지?”
“와- 응. 독한데 맛있네?”
그런데 막상 마셔 보니 왜 애버딘의 과일 꼬냑이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도수에 비해 목 넘김이 상당히 좋고 향 자체가 매우 향기로웠다. 남자든 여자든 다 좋아할 맛이랄까?
“……그래서 그 영식이랑 데이트를 할 뻔했어. 근데 갑자기 오빠가 나타난 거야!”
“어. 정말?”
술이 약간 들어가자 플로리아는 이것저것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풀어놓기 시작했다. 얼굴은 멀쩡한데 묘하게 말이 많아졌다.
“자기는 온갖 여자를 후리고 다니면서 나한테만 그런다니까!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음. 그렇구나.”
애버딘 공작은 아무래도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같이 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이나는 반응에 유의했다.
“근데 그 영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잘 말해보면 안 돼?”
“…사실 딱히 그런 건 아니라서. 생긴 게 조금 마음에 든 거지.”
“…….”
“그냥 난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던 거라고!”
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다.
“키키 언니가 그러는데, 이놈 저놈 많이 만나봐야 쓰레기도 거를 수 있는 거랬어!”
“……그래, 그건 맞는 말일지도.”
사이나도 그랬다면 남자 보는 눈이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지? 사야도 그렇게 생각하지?”
플로리아는 울분을 토하며 또다시 애버딘 공작 욕을 해댔다. 어째선지 요즘은 여기저기서 높으신 분들의 욕을 많이 듣는 기분이다.
“언니들이 나 엄청 부러워할걸. 특히 키키 언니.”
그러더니 급격하게 화제가 변경되었다. 갑자기 키얼스틴이 왜 나와?
“헤헤. 내일 편지 써서 자랑해야지.”
여태 오빠 욕을 하다가 왜 갑자기 자랑으로 화제가 튀는지 모르겠다.
무슨 자랑을 말하는 걸까 잠시 갸우뚱하는 사이, 플로리아의 몸이 스르르 기울더니 갑자기 옆으로 폴싹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플로리아?”
“…….”
“프, 플로리아?!”
사이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플로리아! 괜찮아?”
그녀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으로 다가가 허겁지겁 플로리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