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가출, 아니, 외출합니다
“…….”
“너어무 기대가 되네요.”
사이나는 ‘너어무’라고 강조한 뒤 ‘기대’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말투 자체는 무미건조했으나, 인위적일지언정 눈매를 휘며 웃으려 노력했다.
사실 심술이었다. 말을 해놓고 보니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자조가 들기는 했지만 뱉은 말을 다시 회수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또 아니다. 나름의 기대감은 있었다.
순수하게 수호령을 선망했던 시절과는 달라져 버려서, 단순하게 실물을 보고 싶다는 기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다른 수호령에게도 콘스탄틴의 것과 같은 문제가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느낌의 기대감에 더 가까웠다.
“에렌혼은…….
그런데 콘스탄틴은 상당히 번민에 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하필…. 그 자식은… 하아…….”
그러더니 한숨까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럼… 호위기사라도 데려가요.”
콘스탄틴은 결국 사이나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반대하는 이유를 사이나가 납득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호위라니? 그간 없었던 호위기사를 이제야 붙여 준다고? 같이 가라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워프 게이트를 어떻게 타라는 거지?
“그럼 애버딘 공작님이 힘을 더 쓰셔야 하잖아요?”
저쪽이라고 이동 방식이 다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한 번에 두셋이 이동하는 정도는 거뜬하다는 뜻인가?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그럼 델본에서 제 호위기사를 데려왔어도 괜찮았겠네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튀어나왔다.
루퍼트가 전에 자신을 꼭 데려가라고 했었지.
부부 싸움이라도 하면 푸념할 자기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굳이 제게 호위기사를 동행시키고 싶으시면 드보프가에 연통을 넣으세요.”
어쩌면 루퍼트 경이 말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루퍼트 경이라면 같이 가겠어요. 공작님께서 데리고 오셔야 하긴 할 테지만요.”
별것 아닌 토로라도, 할 곳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를 테니까.
인정하기엔 슬프지만 콘스탄틴의 빈자리가 상당히 커서, 꽤 허하기도 하고…….
“그 기사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쪽 생리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이쪽 생리? 뭘 말하는 거지? 호위? 수호령? 아니면 마수?
아니면 그저 무조건 크레이머가의 기사를 대동하라는 뜻인가?
“대체 무슨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어디 오지나 험지에 가는 게 아니다.
이쪽 워프 게이트에서 저쪽 워프 게이트에 도착해서 적당히 성에나 머무르다가 오는 게 다일 텐데 말이다.
“단순한 친구네 방문일 뿐인걸요?”
콘스탄틴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는 무얼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결국 수긍하는 말을 내보냈다.
“알겠습니다. 루퍼트 경을 애버딘령으로 보낼 테니…… 꼭 동행해서 다녀 주십시오.”
뭐? 루퍼트 경을 정말 데려온다고?
막상 그가 정말 그리해 준다고 하자 사이나가 더 놀랐다.
“그리고… 이것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콘스탄틴은 둘 사이에서 전령조 역할을 하던 검은 새를 내밀며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띄워 보내요. 즉시 내가 가겠습니다.”
“…….”
이쯤 되자 오히려 찜찜해진 것은 사이나였다.
아니, 애버딘령에 뭐가 있나? 왜 이렇게 과하게 굴지?
“혹시… 애버딘령이 이곳보다 매우 위험하기라도 한 거예요?”
“성 밖으로 멀리 가지 않으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대체 왜…….”
이렇게 당장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군단 말인가.
“애버딘 공작님이 좀 이상한 분인가요? 절 잡아먹기라도 하신대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귀찮게 굴거든 꼭-”
귀찮게? 설마 작업이라도 건다는 말인가?
동생의 친구인 데다, 이미 유부녀이고, 심지어 크레이머 공작부인인 나에게?
그는 잠시 한숨을 삼키더니 덧붙였다.
“아니, 그냥 내가 데려다주면 안 되겠습니까?”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사이나는 여전히 미심쩍었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그대를 걱정한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읽었는지 콘스탄틴이 덧붙였다.
“그대는 내 부인이고 내…….”
그 뒤에 뭔가 더 있는 듯했지만, 그는 단어를 삼켰다.
하지만 ‘부인’,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둘의 사이가 어떻든 사이나는 그의 책임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거 하나는 투철한 사람이니까.
“그렇죠. 제가 이제는 크레이머라는 성을 달았네요.
“…….”
“이해했어요.”
이제 사이나는 그의 보호와 책임 아래에 있는 존재고, 사이나 역시 그 이름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 조심할 테니 걱정 마세요.”
“…….”
콘스탄틴은 또다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왜 자꾸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워프 게이트는 그냥 애버딘 공작님의 도움을 받아 탈게요.”
“…….”
“저도 당신과 닿고 싶지 않거든요.”
투정이라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말이죠.
* * *
멀리 흐르는 구름이 예뻤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르란 하늘을 한참 보다가 사이나는 커튼을 쳤다.
바깥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사이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른 주제였다.
‘사실 마지막에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약간의 진심과 약간의 심술.
사이나는 어제의 대화를 복기 중이었다.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생각이 자꾸 거기에 머무르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자꾸 삐뚤거리는 마음 때문에 말이 좋게 나가지 않았다.
지난밤 사이나가 내뱉은 마지막 말에 그는 꽤 크게 동요하는 듯 보였다.
금세 그가 눈을 내리깐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깊이 침잠하던 기색이…….
‘…모르겠다.’
어느새 워프 게이트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결국 해결 방법이 없기에 사이나는 하던 생각을 끊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놓고 한 남자가 눈에 띈다. 장신에 분홍색 머리카락.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다.
“어?! 아니, 아가씨?”
아차. 그러고 보니 애버딘 공작이 저 남자였지.
조각 공원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떠오르자 사이나도 살짝 당황해 버렸다.
그나저나 이분은 왜 건물 바깥에 벌써 나와 대기 중인 거지?
“…맹약의 주인, 애버딘 공작을 뵙습니다.”
어쩐지 상당히 한량이나 시정잡배 같은 이미지를 풍겼던 탓에 애버딘 공작으로 알려진 특징들을 대놓고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알아채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사이나는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아니… 어째서 당신이…….”
그런데 그런 그녀를 보고 애버딘 공작이 왜인지 매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것 같은 반응.
사이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그때 이름을 밝혔던가?
“…….”
음. 신분이 높다고 소개도 안 하냐며 나무라놓고 나 역시 그냥 가버렸던 것 같다.
더 무례한 건 자신이 아닌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결혼식이 있었네.’
따져보면 마지막 만남이 조각 공원에서가 아니라 사이나의 결혼식이어야 맞다. 에렌혼이 날아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선명하니까.
실상 주인인 애버딘 공작을 본 기억은 없지만, 그쪽에서도 사이나를 알아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지금 저런 반응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아, 베일 때문인가.’
식 내내 베일을 쓰고 있었으니, 못 알아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베일은 얇았지만, 투명한 재질은 아니었다.
피로연 첫날엔 그래도 짧게나마 연회장을 돌았지만, 그땐 또 애버딘 공작이 불참이었던 것 같고.
그러니 뭐, 결국 지금 이 상황이다.
“……사이나 크레이머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꼭 통성명을 하자고 강조했던 것은 기억난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녀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 테지만, 그 기억대로 사이나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애버딘 공작이 그리 알기 원했던 사이나의 이름. 하지만 ‘크레이머’로 성이 바뀐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은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아가씨가… 사이나였구나.”
애버딘 공작은 어쩐지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한참이나 사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쉰다.
“아, 이럴 수가.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하다 했더니, 정말일 줄이야. 완전히 놓쳤네.”
“……?”
“진짜 운명인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애버딘 공작은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몽글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마구 헝클어졌다.
“와. 충격이다. 충격이야. 진짜 어떻게 인생이 이러냐.”
“…….”
“대체 왜 벌써 결혼을 했어요?”
“…네?”
“데뷔도 작년에 했다며?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고 결정할 것이지, 왜 이리 후다닥 결혼을 해버렸느냐고요.”
네? 대체 무슨 상관…….
“콘스탄틴 이 자식이 왜 이리 결혼을 서두르나 했더니…….”
그의 혼잣말은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치달았다. 진짜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이나는 어쩐지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그를 꽤 지켜보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재촉했다.
“…애버딘 공작 각하? 안 가시나요?”
“아차. 아, 그렇지. 맞네. 플로리아 만나러 간다고 했죠?”
“네.”
“이 꼬맹이가… 초대를 할 거면 좀 일찍 하지. 왜 이제야 했을까요?”
…네? 글쎄요?
“둘이 친하게 지낸 지 꽤 됐잖아요?”
데뷔 이후 만나서 이후 줄곧 교제해 왔으니 몇 달 되기는 했다. 몇 년씩 교제한 영애들도 많으니까 거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몇 개월 정도는 되었죠.”
“그러니까요! 만나자마자 초대 좀 하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엄청 대화가 부산한 타입인 것 같다. 아니면 실없이 빈말을 잘 하는 타입이거나.
공작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에 관해 정의했던 마음속 이미지는 변하지 않은 탓에 사이나의 평가는 상당히 박하게 튀어나왔다.
“계속 길에서 이러실 건 아니시죠?”
결국 사이나가 또 주변을 환기시켰다.
“아, 그래요……. 가야죠, 갑시다.”
애버딘 공작이 어딘가 축 처진 기색으로 돌아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이나는 들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 다리엘에게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