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놈의 비밀들.
하나를 까면 또 하나가 나온다. 치사하다. 맹약에 관한 것이라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앙탈을 부리고 떼를 쓴들, 금지된 영역 아닌가.
사이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그래서 이젠 이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서로 데면데면하게 앞으로도 계속이요?”
이런 상황이라면 사이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여전히 그에게선 대답이 없고, 해결점도 보이지 않는데.
“하, 차라리…….”
기대를 하게 하지 말지.
처음부터 그냥 귀족가의 평범한 부부관계 수준으로 대해주지.
차라리 그랬다면…….
“…….”
만약을 곱씹으며 침잠해가는 사이나의 안색을 콘스탄틴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뭐라도 더 말을 잇기를 바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밀어내는 건 당신이잖아. 왜 그렇게 간절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상황이다. 어디까지가 비밀인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라기보다는 고작 수긍에 불과했다.
싫든 좋든 간에.
‘미안… 합니다. 녀석의 일도, 그저 내 탓을 하도록 해요.’
그는 스스로를 탓하라고 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라는 듯이.
“그거 아세요?”
하지만 그게 실제로 그렇던, 그러하지 않던, 진실의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욜리 깨어났어요.”
콘스탄틴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욜리가 이렇게 쉽게 깨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탓한다면…….”
대체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거기엔 사이나의 의지가 없었다.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닐 거예요.”
‘비밀’이라는 단어에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금세 시선을 내리깔아 가리어졌다.
“그건, 당신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내 그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붙잡았다.
“선택의 기회. 진실을 알 기회.”
전생에 그 더러운 꼴을 보며 살았어도, 사이나는 누굴 탓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렇기에 감수하며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 끝이 어떻든 선택에 따른 결과, 그건 제 몫이었다.
그러니 콘스탄틴의 비밀의 끝에 그 무엇이 있더라도, 그게 자신의 선택이라면, 사이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참아낼 수 있었다.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지 홀랜더와 살면서도 했던 일을, 콘스탄틴을 위해서라면 왜 못할까.
심지어 그녀는 ‘집무실 사건’조차 콘스탄틴이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이리되고 보니, 뭔가 배로 더 억울하고 분한 것 같다.
사이나의 눈빛이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할 수 없길 원하는 것이 당신의 ‘선택’이라면…….”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기를 원하는 거라면.
“전 탓하지 않을 거예요.”
“…….”
“탓하지 않는 대신 또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여기까지인 거겠지.
“그리고 공작님과 저,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겠죠.”
기대가 없으면 믿음도, 애정도 없을 테니까.
그래. 명목뿐인 부부가 될 거라면, 어쩌면 그 정도 거리가 더 적정할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밤들이 얼마나 깊고 뜨거웠다고 한들.
아니, 진하고 뜨거웠기에 일부로라도 더 지워버려야 되겠지.
흔적조차 남지 않게끔. 그렇게.
‘그걸 원하는 거예요?’
이 질문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을 뒤로한 채 사이나는 돌아섰다.
* * *
다음 날.
그녀의 마음과 다르게 날이 매우 좋았다.
전날 콘스탄틴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말처럼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 넘어간 선을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사람인 이상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이유로 사이나의 기분은 예민했고 속은 부글거렸다. 방 안에 있으려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욜리는 여전히 자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침에 잠깐 깨어나 그녀의 이마를 핥아준 뒤 콧방울 위를 톡톡하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사람이 아픈 뒤 기력을 되찾기 위해 많은 잠을 자는 것처럼, 욜리는 오래 잠을 잤다.
그런 욜리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다가 사이나는 밖으로 나섰다.
답답한 속을 잊게끔 뭔가 열중할 것이 필요했다.
‘…나가고 싶어.’
전에는 이런 기분을 못 느꼈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의 영역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선지 탈출 욕구가 치솟았다.
친우들를 만나고 싶어도 여긴 황도가 아니니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콘스탄틴에게 워프 게이트를 태워달라고 부탁하러 가기도 싫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플로리아의 편지가.
[……나도 사교 시즌 전에는 잠시 본령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시간이 되면 놀러와.
아니면 내가 오빠한테 부탁해서 그쪽으로 가도 되고~]
플로리아가 이쪽으로 오는 것보다는 사이나가 저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 경우엔 사이나가 플로리아에게, 플로리아가 애버딘 공작에게, 이중으로 부탁을 해야 하는 구조라서 솔직히 망설여졌다.
하지만 당장의 심정으로는 콘스탄틴에게 부탁하기가 더 싫었다.
‘우선… 편지를 써서 물어보기나 하자.’ 안 된다고 하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니.
사이나는 당장 편지지를 꺼내 서신을 완성했다. 다리엘을 통해 부쳐 달라 전했다.
본의 아니게 성내 모든 고용인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터라, 다들 행동이 빠릿빠릿했다. 덕분에 편지는 아주 빠른 편으로 애버딘 성에 도착했다.
[사이나!
당연히 좋지! 당장 오빠를 보낼게!
너무 기대된다.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릴 테니 꼭 와야 해?]
그리고 답장 역시 엄청난 속도로 도착했다.
생각 이상으로 격한 환영에 약간 얼떨떨함과 동시에, 요즘 그다지 좋지 않았던 기분이 상당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플로리아가 오빠를 보낸다고 적혀 있는 날짜는…….
‘…내일이네?’
답장이 도착하는 시간을 감안해 가장 빠른 날짜를 잡은 것 같았다.
엄청난 행동력에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님. 좋은 소식이에요?”
답장을 가져온 다리엘이 근처에 있다가 사이나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근래 저기압이던 사이나만 보다가 드물게 표정이 온화해졌으니 말을 걸어 본 다리엘이었다.
“응.”
“친한 친구분인가 봐요. 보고 싶으세요?”
“그러게. 보고 싶네.”
하지만 간만에 웃는 공작부인의 기분에 덩달아 밝아지던 다리엘은 이어지는 말에 매우 당황했다.
“그러니 보러 가야지.”
“……네?”
“내일 갈 거야. 준비 좀 해줄래?”
“내, 내일요? 준비라 하심은…….”
워프 게이트까지는 사이나가 직접 가야 한다. 전에 모레프를 타고 왔던 여정을 복기해보니 마차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마차는 필요하고, 음… 짐은 필요 없고, 하녀도 필요 없고, 호위기사도 필요 없어.”
“네에? 어디 가시는데요? 시내를 나가셔도 홀로 외출은 안 되셔요!”
“애버딘령. 워프 게이트 탈 거라 어차피 아무도 못 데려가. 마차만 준비해.”
“……갑자기요?”
“자고 올 거야.”
“…….”
산사태라도 만난 듯한 표정을 짓는 다리엘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사이나는 방긋 웃었다.
* * *
“…사이나.”
근래 들어 처음. 콘스탄틴이 제 발로 찾아왔다.
둘은 여전히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그의 비밀로 인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고, 최근 답답함을 넘어 분노 비슷한 감정까지 느끼고 있던 터라 사이나는 뭐라도 할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이나의 선택은 아를어 번역이었고, 덕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 중이었다.
이런저런 조합으로 아를어를 분석하고 있던 사이나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늘어선 종이들에서 잠깐 시선을 떼어 그를 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보나 마나 그녀의 외출 소식을 들은 거겠지. 하지만 모른 척 물었다.
사이나는 보고 있던 연구지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외출, 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자고… 온다고요?”
“네.”
“…….”
단답형의 대답 때문인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애버딘령, 말고 델본에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족도 만나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콘스탄틴이 꾸준히 말을 붙였다.
“황자 때문에 황도는 아직 좀 그렇지만, 델본만이라면…….”
사이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가 오기 직전 분해했던 뜻글자를 다시 조합하며 펜을 움직였다.
“내가 데려다줄게요.”
그녀의 펜이 잠시 멈췄다.
그에게 부탁하기 싫어서 플로리아에게 편지한 건데? 공교롭기도 하다.
사이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럼…….”
그녀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저와 닿아야 하시잖아요?”
워프 게이트를 탈 때의 방법적인 문제가 있었다. 비록 맨살끼리 닿는 것은 아니지만, 몇 번 대차게 접촉을 거절당하다 보니 그조차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
“됐어요.”
그렇다고 황도에 영원히 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짧은 접촉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그와 말도 섞기 싫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야죠.”
황도가 아니라.
사이나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분석을 하던 흐름이 깨져 다시 집중을 하기엔 요원했으나, 기계적으로 다음 구절을 읽으며 옮겨 적어 보았다.
“꼭… 가야겠습니까?”
콘스탄틴은 잠시 제 얼굴을 크게 쓸더니 한숨처럼 물었다.
꼭 가야겠냐니, 무슨 뜻으로 묻는 질문인지 모르겠다.
“아니, 돌아, 올 거지요?”
“…….”
사이나는 결국 보던 종이에서 다시 시선을 떼고 그를 향했다.
“친구 만나러 가는 거예요. ‘일시적인’ 방문이요.”
아무리 그와 좋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떠날 사람으로 보이나?
돌아올 거냐고? 하는 질문마다 대체 왜 이래?
“가면 에렌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약간 짜증이 나서일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수호령은 에렌혼이거든요.”
불현듯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