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요?
‘아, 이상한 꿈…….’
아, 대체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욕설 때문인가.
이상한 꿈이기는 했지만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게도 했다.
‘그리고 보니 전생에도 그와 직접적인 접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네.’
그때의 그는 냉랭했다. 파란 눈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똑같은 그 파란 눈을 보며 이번 생에서는 차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어제는…….’
서늘하게 가라앉아가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도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이다.
부족한 잠 때문인지 뻑뻑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몇 번 누르며 사이나는 몸을 틀어 모로 누웠다.
그러자 이마에 할짝거리는 느낌이 났다.
‘…할짝?’
“……!”
흠칫 놀란 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컁!”
“어, 어? 요, 욜리?!”
욜리가 깨어나 있었다.
“캬아앙!”
녀석이 제 자리에서 꼬리잡기를 하듯 뱅뱅 돌며 짖었다.
“욜리! 깨어났구나!”
사이나는 얼른 녀석을 들어 품에 안았다.
“키양-!”
“너, 너!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고 그래!”
울먹거리며 사이나가 외쳤다.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놀랍고 기쁘고 새삼 반가워서 사이나의 목소리가 물기로 잠겨 들었다.
욜리가 이해한다는 듯, 이번에는 눈가를 할짝 핥아주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캬하항~?”
뭐, 이런 걸로 걱정하냐는 그런 뜻 같아서 사이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깨어날 줄 알았어. 언제일지는 몰랐지만…….”
“캬웅.”
“괜히 지레 과잉 반응한 거라니까, 그 사람은.”
“크와앙?”
욜리의 꼬리가 불만족스럽게 또 탁탁,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사이나는 또다시 지난밤의 기억에 붙잡혔다.
‘역시… 난 누구와도 닿아서는 안 됩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걸까.
피부의 한기 때문에? 하지만 그건 사이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로 결론 난 것이 아니었나?
‘돌아가요. 그대의 방으로.’
언제까지? 앞으로 계속? 그럼 영원히 그냥 각자의 방에서 살면 되는 건가? 다른 귀족 부부들처럼?
“캬앙?”
처음부터 그런 사이였다면 차라리 상관없었겠지. 사이나도 처음에는 이 결혼에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저 황자를 피하기 위한 결혼.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존중하는 사이, 그 정도에 족할 수 있었다. 때리거나 억압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가족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결혼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선은 이미 넘어버렸잖아…….’
이미 넘어간 선을 어찌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린단 말인가. 그것도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이었는데…….
“크왕, 크아와앙?”
갓 깨어난 저를 앞에 두고 어찌 이리 딴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욜리가 강한 의사를 표했지만, 깊이 생각에 빠진 사이나는 인식도 못 하고 있었다.
“하, 모르겠어.”
원인을 모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하다.
“컁?”
“그래. 모르겠어. 욜리, 네가 왜 갑자기 잠에 든 건지도, 왜 유모님네서 발견된 건지도.”
“…….”
“그러고 보니 너 대체 거긴 왜 간 거야? 엄청 자주 갔다며? 그것도 모자라 거기서 잤다며?”
“…큐우?”
갑자기 욜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웠다.
“대체 왜 그랬느냐니까?”
“…큐, 큐후.”
“어휴. 진짜…. 물어서 뭐 하겠냐. 네가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의사소통은 되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항상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왜 거길 갔느냐 같은 질문은 단답형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종류다.
“캬항.”
“너, 이렇게 소식도 없이 또 사라지면 알아서 해!”
나름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사이나가 경고했다.
“…캬앙?”
“알았어, 몰랐어!”
“컁.”
대충 알았다는 정도의 대답을 하고는 욜리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로 톡 떨어졌다. 그리고는 하품을 크암- 하더니 다시 몸을 또르르 말며 잠에 들 자세를 취했다.
“…너 잠깐 자는 거지? 또 안 깨어날 건 아니지?”
방금 전 신나게 다그치던 것과 달리 순식간에 불안해진 사이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컁!”
당연하지, 하는 것 같은 대답에 사이나가 안심했다. 녀석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는 일어났다.
선잠 잔 게 다이긴 하지만 더 잔다고 누웠다가 잡꿈만 계속 꾸면 오히려 더 피곤해질 것 같았다.
‘오찬 때 다시 한번 대화를 해보자.’
어지간히 바쁜 일이 있지 않으면 그녀와 항상 같이 점심을 들고는 했던 그니까, 오늘도 오겠지. 아마도.
그렇게 점심시간 때 식당을 향했으나.
“…….”
예상은 틀렸다. 그는 오지 않았다.
저녁에는 오겠지, 싶어 반나절을 더 참았으나 마찬가지로 그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긴장한 고용인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만이 넘쳐흐르는 식당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팽개치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던지 식사 시중을 들 위치가 아닌 집사장이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쩔까. 그가 원하는 대로 둘까?’
기계적으로 포크에 찍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사이나는 고민했다.
‘돌아가요. 그대의 방으로.’
접시 위의 음식 덩어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마구잡이로 썰던 그녀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에게 떠밀려 면전에서 문이 닫혔던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거절당하던 순간의 기분은…… 꽤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다시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의식적으로라도 그가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꿈에서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라서?’
엘리자베스의 불륜을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그는 일말의 불쾌함이나 분노도 비치지 않았지.
분노는커녕 남의 일을 보는 듯한……. 아니, 남의 일이라도 그런 삿된 상황에서는 약간의 흥미나 관심이라도 가지는 것이 사람 아닌가?
건조하기 짝이 없던 그 반응을 떠올리자, 새삼 전생의 그가 얼마나 결혼에 형식적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나와도, 그러려는 걸까?’
자신이 엘리자베스에 비해 특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콘스탄틴을 기준으로는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갈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여태 그녀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았나.
‘내가 누군가와 바람을 펴도, 그렇게 똑같이 무감하려나?’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니 사이나가 엘리자베스에 비해 크게 다른 입장인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분노나 배신감에 휩싸여 사이나를 노려볼 콘스탄틴의 모습도, 극렬한 질투에 휩싸여 몸을 떨 콘스탄틴의 모습도, 전혀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콘스탄틴이 일말의 관심도 없이 무심하게 대하는 것도 그려지지 않기는 한데…….
사이나는 지금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하아…….”
그녀의 한숨에 나디아와 고용인들이 움찔했으나, 사이나는 계속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그가 바람을 피운다면…….’
전생부터 보아온 그의 성품이나 결벽 증세로 보아서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한번 가정을 해 보았다.
그가 어떤 여자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상냥하게 에스코트하고… 심지어 키스하고… 심지어 더한 것도…….
“으음…….”
탁. 양손에 쥐고 있던 커트러리가 바닥에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나디아와 고용인들은 더 깜짝 놀라서 몸을 굳혔다.
“나디아.”
“네넵! 마님!”
평소보다 지나치게 큰 대답을 하는 나디아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하고 사이나는 물었다.
“각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죠?”
“…일이 많다고 식사도 그리 올려드렸으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사이나는 벌떡 일어났다.
“마님?”
“오늘 식사는 여기까지 할게요.”
사이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냅킨으로 대강 입을 찍어 닦고는 식탁 위에 내팽개치듯 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
모르겠다.
하지만 어쩐지 당장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뭐라도 말을 해보긴 해야겠다 싶다.
똑똑.
약간은 소심한 노크 소리가 나무문을 울렸으나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사이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다시 노크했다.
똑. 똑.
“…….”
혹시 집무실을 떠난 걸까?
여전히 대답이 없는 저 너머를 향해 투시라도 할 듯 문을 노려보다가, 사이나는 충동적으로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그리고 바로 눈이 마주쳤다.
책상 저편에 앉아 있는 콘스탄틴과.
“…사야?”
“안에, 계셨네요.”
왜 있으면서 대답을 안 했지? 혼자 있고 싶었던 걸까?
사이나는 그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이 없으면, 오면 안 되나요?”
“…….”
그녀는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이나의 뒤로 문이 닫히며 공간이 밀폐되자, 그가 어쩐지 어깨를 굳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이나는 안쪽에 들어가 그의 책상, 정확하게는 그녀가 까드득 긁어둔 손톱자국이 난 부분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콘스탄틴의 어깨가 더 굳어졌다.
“소중하다면서요.”
‘…소중합니다. 그대는 충분히- 소중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그다.
“배려를 가지고 대해 주신다면서요.”
“…….”
“다치길 원하지 않으신다면서요.”
“…….”
“제가 다치느니… 전쟁을 치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왜 이러는 거예요?
생략된 물음을 눈길에 담아 사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콘스탄틴은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이래야만 하는 겁니다.”
한결 진지해진 표정.
“무슨……. 그러니까, 그래서 저랑 닿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
대답하고 싶지 않거나, 대답할 수 없거나.
아마도 수호령과 연관한 비밀.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요?”
콘스탄틴의 턱선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