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39화 (139/233)

139화. 국면 전환

“사, 사야?”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저기. 아까 한 말은…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고…….”

콘스탄틴은 허둥지둥 다가와서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기를 반복하며 중얼중얼 변명했다.

“정말로,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말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근데 여기, 저밖에 없는데요.”

“난 여기 그대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분명 문소리가…….”

“제 이름 부르시고… 바로 닥…… 그리 말하셨잖아요.”

“그건, 자꾸 그대를 찾게 되니까…….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닥치라 하신 거라고요? 제 이름 부르시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고.”

그는 매우 난감한 표정이었다.

“공교롭게 그리 들렸겠지만 절대로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그건 칼… 모레프에게 한 말이에요.”

“…모레프요?”

“예. 자꾸 개소, 아니 헛소리를 해대서.”

알고 보니 수호령과 쌍방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양이다. 하긴 명령을 전하고 수행하려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네.

막연하게 사이나는 수호령이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짧게 튀어나왔던 ‘칼’이라는 발음.

‘아마도 칼리고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순간 너무 날카로운 욕설에 놀라기는 했으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그녀에게 욕을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대신 사이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당황함에 물든 그의 표정이 아까 한껏 가라앉았던 그 표정보다는 나아 보였으니 말이다.

‘…눈 밑이.’

매우 퀭했다. 핏발도 살짝 선 것이 누가 봐도 잘 자지 못한 얼굴이다.

사이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 밑을 엄지로 쓸었다.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손이 닿자 그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사, 사야?”

“눈, 빨간 거 알아요?”

“…….”

“오래 못 잔 얼굴이에요.”

“아… 괜, 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

“나 자고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가버려요?”

콘스탄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치, 마음과 달리 대답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욜리 때문에 제가 좀 예민하게 군 것 같아요. 죄송했어요.”

사이나에게야 욜리가 매우 소중한 존재지만, 남들에게는 말 그대로 한낱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이해를 바랄 수는 있지만 폐를 끼쳐서는 안 될 일.

사과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굳어버렸다. 파란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댄 그 상태로 잠시 멈췄다. 마치 그 손길이 다시는 없을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음미하듯이 그렇게.

그리고는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눈을 뜬 콘스탄틴의 얼굴에는 어딘가 자괴감이 어린 표정이 담겨있었다.

“어쩌면…… 나 때문이 맞을 겁니다.”

“네?”

“녀석이요. 결국은… 내가 문제인 거 같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지금 욜리가 공작님 때문에 저리 되었다는 말씀이세요?”

“아마도.”

“아마도, 는 뭐예요? 직접 저리 잠들게 하셨다는 거예요? 왜 안 깨어나는 건데요?”

“모릅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대가 녀석을 얼마나 아끼는지 아는데 내가 어찌…….”

“그런데 왜 공작님 때문이라고 하세요.”

“간접적으로는, 내가 원인일 것이 분명하니까.”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콘스탄틴은 고개를 돌리더니 창 너머로 보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그대는 괜찮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내 이기심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었을 뿐이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그대도…….”

“…….”

“역시… 난 누구와도 닿아서는 안 됩니다.”

다시 돌아와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방금 바라본 어둠을 담아온 것 같았다.

“미안, 합니다. 녀석의 일도, 그저 내 탓을 하도록 해요. 깨우는 방법은……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입에서 나온 소리와 다르게 그는 손을 천천히 그녀 쪽으로 뻗어왔다.

그녀의 귀 옆을 손으로 짚으며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사이나는 고개를 위로 꺾어야 했다.

딸깍.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문이 열렸다.

그저 그가 손을 대었을 뿐인데.

공작 쪽에서는 열 수 없다던 그 문이 너무도 쉽게 열렸다.

“돌아가요. 그대의 방으로.”

어느새 그녀는 밀려 문의 경계를 넘어섰다.

문이 닫혔다.

* * *

‘……밀어냈어.’

그가 그녀를.

콘스탄틴이 사이나를.

사이나는 충격으로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눕기는 했으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겨우 설핏 잠이 들었는데, 그사이 꿈을 꾸었다.

『먼저 가.』

『예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달라고, 공작부인. 이쪽 궁합은 또 죽이잖아, 우리가.』

『알았어.』

조지 홀랜더와 엘리자베스의 불륜을 알게 되었던 그날.

『천박한 새끼.』

낯설었던 엘리자베스의 욕설.

충격으로 굳어져 어쩔 줄 몰랐던 그날.

그날의 기억은 생각해보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꿈은 이후에 있었던 일들의 기억을 일깨우며 이어졌다.

당시 불륜을 비롯해 그 상대 중 엘리자베스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 여파로 석상처럼 굳어있던 그녀를 깨우는 인기척이 있었다.

치익- 탁. 낯선 음향.

테라스 아래에는 그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몸을 튼 사이나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앗.』

당시 엘리자베스의 남편.

당시만 해도 데면데면한 친구의 남편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궐련을 피우고 있었더랬다.

『…….』

『…….』

테라스 위에서 불륜을 저지른 남자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여자의 남편이 그 아래에서 만났다.

남자의 표정은 여상하다 못해 무심해서 무정하기까지 했다.

지난 기억을 꿈으로 되돌아보면서 사이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무기질의 시선이라니…….

사이나는 콘스탄틴을 만난 후 저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어 되레 생경했고, 그 때문에 꿈속의 남자는 마치 모르는 사람 같았다.

『괜찮나?』

『…네?』

『안색이 창백한데.』

상황과 맞지 않게 사이나의 안색에 대해 묻는 그의 말투가 또한 지극히 무감해서, 그녀는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었다.

감정이라고는 어떤 종류도 비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멀뚱하게 보다가 사이나는 흠칫해져서 시선을 내렸다.

남자는 사실 사이나가 이렇게 뻔히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눈을 내리깐 그녀를 보며 뭔가 오해를 했는지 남자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는 내밀었다.

흰색의 손수건이었다.

사이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수건을 받아들었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깨끗한 흰색의 손수건을 쥐자마자 핏방울이 스미며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이제 보니 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까 급히 테라스 아래로 숨어들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이 긁혔던 모양이었다. 하필 벽을 따라 덩굴 식물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한 상태라 손바닥이 긁힌지도 몰랐다.

『아, 죄송합니다. 손수건이…….』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이걸 어쩌면 좋담…….

비싸 보이는 실크 손수건이 순식간에 더러워지는 것을 보며 당시의 사이나는 제일 먼저 돈 걱정을 했다.

『울지 않는군.』

남자는 손수건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궐련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의외라는 투였다.

울고 있는 줄 알고 손수건을 내밀었던 건가.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 사이나는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상대 중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어서 놀란 것뿐.

우습지만 남편의 외도보다 그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이 남자도 사실 자신과 같은 입장일 텐데,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

입을 열었지만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사이나는 작게 숨을 내쉰 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람은 남편이 피웠는데, 왜 그녀가 사과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나는 사과했다.

상대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에 집안을 통째로 망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사과한 것은 아니다. 어쩐지 입에서 사과의 말이 새어 나왔다.

『흠……. 개새끼.』

『…네?』

『망할 놈, 빌어먹을 놈, X같은 새끼.』

남자는 건조한 말투로 그녀를 바라보며 욕설을 읊조렸다.

갑작스러운 욕설의 나열에 사이나는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따라 해봐.』

그러더니 갑자기 따라 해보란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갑자기 단계가 너무 센가?』

『…….』

『그럼, 음. 나쁜 새끼.』

남자는 얼른 따라 하라는 듯 계속 그녀를 보며 보채는 눈빛을 보냈다.

『너무 참기만 해도 병이 되는 법이야.』

『…….』

『별건 아니지만, 가끔은 욕이라도 하면 좀 나을 때가 있지 않은가.』

아, 자신의 남편에게 하라는 뜻이었나.

욕먹어도 싼 놈이기는 했지만, 사이나는 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남편에게 욕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욕을 하면…… 조금은 나아질까? 정말?

사이나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쁜, 나쁜 새끼…….』

그리고,

『나쁜….』

……년.

“컁!”

꿈속의 기억이 흐르다가 연해졌다. 욕설이 장면을 뭉갰고, 쨍한 음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욕설을 흩어버렸다.

그 순간, 사이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나쁜 …컁?’

급작스럽고 이상하게 마무리 지어진 꿈에서 깨어나며 사이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