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비밀과 욕설
“네?”
“그런데 사실 이리 다시 깨어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몸 상태도 전보다 좋고…….”
“세상에. 얼마나 다행인가요.”
아무도 임종을 못 지킨 상태로 유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콘스탄틴이라고 해서 괜찮을 것 같지 않았다. 겉으로야 담담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속내는…….
“착한 녀석이었는데, 인사도 못 해서…….”
유모는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이나에게 의문만 잔뜩 넘겨준 채로 말이다.
죽음에 임박했던 유모님.
그즈음 갑자기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던 욜리.
유모가 깨어난 대신, 지금은 네가 잠에 들어 있지.
그럼 넌 어디에서 그 의식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상한 점.
‘콘스탄틴은 그럼 욜리를 이 집에서 데리고 왔다는 건데.’
욜리를 찾으러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기어코 만류하던 그의 태도가 떠올랐다.
욜리를 여기서 데려온 것이 굳이 숨길 만한 일인가?
왜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은 거지?
대체 그와 유모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유모의 증세와 욜리의 증세가 상관이 있는 걸까?
또 다른 비밀?
의문은 끝도 없이 솟아올랐으나,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그저 점점 불어나기만 하는 의문을 삭히며, 사이나는 크림성으로 돌아왔다.
* * *
크림성으로 돌아가자 바로 나디아가 찾아왔다.
“어제, 찾으셨다 들어 아까 방문했으나 이미 외출하셨더군요.”
아, 유모에게 간 동안 나디아가 왔었나 보다.
“물어볼 것이 있었어요.”
“하문하시지요.”
“여기…….”
사이나는 공작부인 앞으로 배정된 내비 예산과 개인 예산안을 내밀며 말했다.
“금액이 좀 이상해서요. 뭔가 뒤로 숫자가 더 적힌 거 아닌가요?
사이나가 생각하기로 개인 예산도, 내비 예산도 지나치게 많았다. 심지어 1년 치가 아닌 분기 예산인지라 더 이상했다.
“음……. 아니요. 맞습니다, 마님.”
나디아는 예산안을 넘기며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맞는 금액이라고요?”
“예. 참고로 이 예산은 이 영지에 머무르시는 동안만 해당되는 거고, 황도 쪽 예산은 또 따로 그쪽에 배정된 것이 있을 겁니다.”
“…….”
여기 적힌 금액만으로도 어지간한 가문의 전체 예산과 맞먹는데, 황도 쪽 예산이 또 있다고?
“공작령은 거대한 만큼 부유하기도 합니다. 지위에 맞는 예산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걱정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오랜 시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유지된 4대 공작가는 무력만큼이나 다들 대단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공작가가 부유하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어째서 부유한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 나디아의 설명에 따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기반은 바로 ‘광산’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보석 광산이나 광물 광산이 발견되는 산맥에는 유독 다른 곳보다 마수가 더 득시글거린다고 했다.
4대 공작가의 도움이 없이는 소유를 하더라도 채굴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런 이유로 제국에 유통되는 보석과 광물의 70% 이상이 황가와 4대 공작가의 이름 아래에서 유통된단다. 수백 년간 계속 그래왔단다. 그러니 그 부가 얼마나 크겠는가.
“…….”
아, 그래서 ‘라피스’에 납품되는 원석이 대부분 공작가의 것이었나 보구나. 그냥 계약을 그렇게 맺은 줄 알았더니.
납득과 동시에 말문이 막힌 사이나는 그저 알았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 분장에 관한 이야기는 콘스탄틴이 돌아오고 난 이후에 다시 해야 할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이나는 나디아를 물렸다.
‘무슨 공작부인 개인 예산 하나가 전에 홀랜더가 전체 예산보다 크네.’
없는 돈에 미치도록 전전긍긍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리되고 나니 뭔가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더 꿈같기도 하다.
‘돈은 없는 것보다야 많은 게 낫지.’
어쩐지 공작부인의 의무를 엄청 열심히 해야 한다고, 거대한 예산이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덕분이랄지, 그 탓이랄지, 사이나는 이날 상당히 빡빡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 * *
일상을 열심히 살고 있는 요즘, 또 다른 알찬 하루를 보내고 사이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 습관대로 침대맡에 둔 책을 집어 들었다. 잠들기 전에 읽는 용이다.
“어, 이거 어제 다 읽었지.”
그냥 잘까.
잠깐 고민하던 사이나는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아직 크게 졸리지 않아서 책을 좀 챙겨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욜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사이나는 가운을 걸쳤다.
서재로 가서 책 몇 권을 골라 들고 다시 돌아오는데 공기 중에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잘 시간에 가까울 때라 더 의아했다.
“…마님.”
게다가 복도에서 나디아를 마주쳤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직계의 침실이 있는 층이라 아무리 집사장이라고 해도, 이리 늦은 시간에는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각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이 밤에요? 나팔 소리도 없이요?”
보통 영주가 성으로 귀환할 때는 나팔을 불어 모든 이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했다.
“각하께서 금하셨습니다. 본래 좋아하지도 않으시고, 늦게 귀환하실 때는 더욱 그리하십니다.”
“아, 그럼 지금은 어디에 계시죠? 방에?”
“지금 아마 씻고 계실 겁니다.”
“나디아는요? 지금 각하께 가는 길인가요?”
“아니요. 저는 이미 뵈었습니다. 간단하게 보고 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네. 편한 밤 보내십시오, 마님.”
나디아는 인사를 하고 다시 사라졌다.
사이나는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책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침대에 앉았다.
‘인사는…… 해야겠지? 아님, 내일 날이 밝고 나서?’
몰랐으면 모를까, 귀환 소식을 들어버려서 고민이 되었다.
‘꽤 오래… 잠을 잘 못 잤을 텐데.’
그의 상태가 어쩔는지.
사이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연결문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는 먼저 열릴 일이 없는 문이기는 하지만, 그의 방과 연결된 문이어선지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했던 결심이 생각났다. 그가 돌아오면 기쁘게 맞아주자고 했던 그 결심이.
사이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연결문 쪽으로 다가갔다.
근래 묘하게 서먹해져서 어색하기도 하고, 얼굴을 보면 이것저것 캐묻고 싶어질 것 같아 내일로 만남을 미루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다시금 마음을 굳게 다듬었다.
‘잘 오셨다고, 잘 자라고, 인사만 하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문고리를 잡고 잠시 고민하던 사이나가 잠금 버튼을 꾹 누르고 문을 열었다.
“……!”
“……!”
그런데 문 바로 앞에 콘스탄틴이 있었다. 예상과 다르게 코앞에서 시선을 마주하게 된 둘이 서로 움찔했다.
“어…… 다녀, 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예. 없습니다.”
“…….”
인사를 하고 났더니 할 말이 없어졌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 사이나는 슬쩍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그 모습에 콘스탄틴의 눈빛이 잠시 짙어졌다.
“저는… 인사드리려고…….”
“그렇습니까.”
“각하께서는 왜, 여기 문 앞에, 서 계셨는지.”
“…녀석은 좀, 어떻습니까?”
“아, 욜리요?”
사이나는 뒤를 돌아 침대 쪽을 흘깃하고는 대답했다.
“아직, 똑같아요.”
“…….”
“근데, 숨은 잘 쉬고 표정도 편안해 보이고. 뭐, 금방 깨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괜찮은 겁니까?”
“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각하께서도…….”
사이나는 순간 흠칫했다. 어느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볼 언저리를 가볍게 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닿은 손이 묘하게 차서 사이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사실 그가 갑자기 만져올지 몰라서 더 그랬다. 그가 그녀를 만져 올 때면, 항상 긴장이 되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일순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딘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을 떼며 걸음을 한 발 뒤로 물렸다.
“…공작님?”
“……미안합니다.”
그가 사이나를 만지던 손으로 제 입가를 감싸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자요, 사야. 나도 자러 갈 테니…….”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횡설수설 인사를 남기고는 뒤로 돌았다.
“…….”
사이나는 그렇게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서 눈을 깜박였다.
평소 같지 않게 매우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표정도 이상하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답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닿지 못해 안달하던 그였는데, 황급히 떨어져 멀어지더니 저렇게 가버리는 것이다.
어딘가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침대로 가서 이불을 걷고 들어간 그는, 마치 그녀를 의식하듯 등을 돌린 방향으로 누웠다.
그 모습에서 사이나는 어쩐지 단절감을 느꼈다.
‘저게 진심이라면 난…….’
스르르, 쾅.
그녀가 잡고 있던 문을 놓자 연결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가 어깨를 움찔, 하더니 천천히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콘스탄틴은 그녀가 공작부인의 방으로 돌아가며 닫은 문에서 난 소리인 줄 알 것이다.
하지만 반대였다. 사이나는 손에서 문을 놓으면서 자신의 방이 아니라 공작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걸음이 그렇게 옮겨졌다.
“……사야.”
한숨처럼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 입 좀 닥쳐. 이 지긋지긋하고 X같은 새끼야.”
그리고는 바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사방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선명하게 귀에 와서 꽂혔다.
“…….”
설마… 나에게 하는 말일까? 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사이나는 진득한 욕설에 흠칫해서 몸을 뒤로 물렸다가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덜컹, 하는 소리에 콘스탄틴이 번뜩 고개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