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실종, 그리고
유리가 없는 공백은 욜리가 있기에 그나마 모른 척할 수 있는 거였다.
세상에서 사이나만 홀로 유리를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다.
그것은 이따금 그녀 스스로를 의심하게 했다.
실은 유리의 존재가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이런 의심은 유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독처럼 퍼져나가서 극단으로 치닫고는 했다.
종국에는 사이나의 존재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삶 자체가 허상은 아닐까?’
그런 극단, 말이다.
그럴 때 사이나를 현실에 붙잡고 발붙이도록 하는 것이 욜리였다. 욜리의 존재였다.
녀석의 캬악거림이나, 잠자기 전 톡톡거림 등이 유리의 존재가 거짓이 아니었다고, 다시금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곤 하는 것이다.
멀고 낯선 크림성에서의 생활에 이토록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욜리의 힘이 컸다. 콘스탄틴의 상냥함도 아주 큰 이유지만, 욜리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만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욜리가 사라져버렸다면…….
“마님!”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조여들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며, 사이나는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 * *
실질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사이나의 기절은 십여 분 남짓. 짧았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난리가 났다.
보고를 받은 공작이 일을 하다 말고 들이닥쳤고, 나디아와 다리엘을 비롯해 평소 공작부인의 시중을 조금이라도 들던 자는 모두 소집되었다.
“크림성 고용인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실망이 크군.”
“죄, 죄송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콘스탄틴의 주변으로 냉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욜리!”
그때 사이나의 외침이 그 싸늘함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녀가 방을 뛰쳐나온 것이다.
콘스탄틴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사야! 깨어났습니까?”
그가 내뿜는 한기에 발발 떨던 고용인들은 그 기운이 빠른 속도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토해냈다.
마님의 등장에 매우 안도했음은 물론이다.
“욜리… 유리가, 욜리는… 가버리면 난…….”
하지만 사이나는 여전히 충격에 매몰되어 있었다. 고용인을 살필 겨를은 없었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을 하며 울먹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콘스탄틴은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싶어 단단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 와중에 또 ‘유리’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 심히 신경 쓰였으나, 지금 그것을 물을 타이밍은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찾을 수 있어요. 찾아 줄 테니, 진정해요.”
“…찾을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러니, 진정해요.”
달달 떨고 있는 여린 몸을 감싸며 콘스탄틴이 말했다.
그 짐승을 얼른 찾아 그녀를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리’인지 뭔지가 얽힌 사연(자세히 뭔지는 몰라도)을 생각하면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대체 유리라는 놈이 누구기에…….’
율과 유리, 같은 놈이 틀림없었다. 한참 전에 작게 박힌 가시 같던 그 이름이 어째 점점 더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을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른, 얼른 찾아주세요.”
특히 이렇게 애절한 눈빛을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별수 없다. 사이나의 우는 얼굴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사이나가 울 때 그는 어찌 그녀를 달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근데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
“…모레프.”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하는 게 나았다.
“나가서 싹 뒤져. 그 짐승을, 찾아와.”
휘리릭, 형체를 잡아가기가 무섭게 모레프가 창밖으로 날듯이 사라졌다.
“아…….”
사이나가 보는 수호령의 힘은 만능에 가까웠다. 모레프가 임무를 받고 떠나가는 것을 본 그녀의 눈에 불안함이 옅어지며 동시에 기대감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요, 사야.”
“알았어요.”
콘스탄틴은 모레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숲 쪽으로 향하는 행적을 느끼며 우선 고용인들을 내보냈다.
그 짐승 새끼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녀석은 굉장히 추적하기 쉬운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거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나가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 불안함은 묘하게 그에게 옮아왔는데, 이 일이 단순히 짐승의 행방을 알아내는 선에서 사건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
역시나 예감은 그냥 감에서 끝나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모레프의 신호를 인지한 즉시 미간을 구겼다.
모레프가 녀석을 찾았다며 신호를 보낸 위치가…….
‘…왜 거길 간 거지?’
그는 사이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뒤,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야. 녀석을 찾은 것 같습니다.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찾았어요?! 저도, 저도 갈래요!”
“금방, 아주 금방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같이 가요!”
“혼자 갔다 오는 게 더 빠르고 안전합니다.”
“……하지만.”
사이나는 같이 가겠다고 다시 한번 더 주장하려다가, 그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부디, 제발, 그리해주기를 원하는 것 같은, 아주 애절한 눈빛이었다.
“내… 말대로 해줘요. 지금은.”
욜리를 데리러 간다고 하면서 어째서 저런 눈빛인 거지?
“…혹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위치가 좀…….”
답지 않게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대체 어디기에 저러는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캐묻는 시간에 얼른 데리고 와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꼭, 무사히 데려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콘스탄틴이 테라스로 다가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여긴 3층인데!’
전에도 놀랐지만, 또 놀라고만 사이나가 얼른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그는 멀쩡했다. 수호령의 힘을 이용해 안전하게 착지했고 어느새 저 멀리 날듯이 뛰어가고 있었다.
사이나는 콘스탄틴의 형체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이제나저제나 그가 돌아올까.
사이나는 테라스에서 계속 서성였다.
날듯이 빠른 속도로 간 터라 금세 복귀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물론 초조한 심경 탓에 더 시간이 안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초조함이 극에 달해서 당장에라도 직접 뛰쳐나갈까, 고민할 때쯤이 되어서야 저 멀리 사람의 형태가 잡혔다.
“……!”
익숙한 흰색 예장의 남자.
나무들이 드리운 어두움. 그 그늘로부터 빠져나오듯이 콘스탄틴이 걸어 나왔다.
그는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분명 욜리이리라.
사이나는 그가 제게 도달할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체면이고 뭐고 다다닥 뛰어 아래층으로 향했다.
문 바깥에 서 있던 다리엘이며 하녀가 그런 그녀를 보고 놀라서 뒤를 따랐으나 사이나에게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뛰어 그를 향해 달렸다.
“-콘스탄틴!”
쉬지 않고 달려 그가 포치에 이르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헉헉거리며 달려온 그녀를 보고 그가 멈춰 섰다.
그런데 왜……?
그의 표정이 뭔가, 좋지 않았다.
“왜, 그래요?”
“사야….”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욜리는요!?”
“그게…….”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기색에 사이나는 핏기가 가시는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품 안에 있는 게 욜리가 아니야?
교차된 콘스탄틴의 두 팔이 단단하게 저 안쪽을 가리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사이나는 그의 팔을 붙잡아 당기며 품 안을 매섭게 살폈다.
익숙한 은회색의 터럭이 보였다. 손을 뻗어 만지자 또한 손가락에 감기는 보드라운 털의 느낌이 역시나 익숙했다.
“욜리!”
아, 다행이다. 찾았구나. 찾았어.
안도의 한숨이 깊게 새어 나왔다.
사이나는 그로부터 욜리를 넘겨받아 안으며 친숙한 반응을 기다렸다. 캬앙 댄다거나, 쀼루퉁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거나, 꼬리를 탁탁거리는 그런 반응.
“…욜리?”
그런데 왤까. 반응이 없다.
반응은커녕 미동도 없었다.
“욜, 리가 왜 이래요? 왜…….”
설마, 설마 죽…….
짧게 스친 상상만으로도 사이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올라왔다. 삽시간에 후드득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에 콘스탄틴이 당황했다.
“사야!”
혹여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콘스탄틴은 그녀를 붙잡았다.
“욜리, 욜리가…….”
“사야, 자는 겁니다! 욜리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잔, 다고요?”
그의 말에 사이나가 조금 진정해서 녀석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미세하기는 해도 몸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죽은 건 아니었다.
“하아.”
다행이라는 듯 새어 나오는 안도의 숨결에 콘스탄틴도 한숨 돌렸다.
“발견했을 때도 이리 자고 있었어요?”
“예.”
“왜 바깥에 나가서 자고 있었던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시…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서 삐졌을까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머뭇거리며 콘스탄틴에게 묻는 사이나에게 그는 흔쾌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콘스탄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
“무사히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저 잠을 자는 거라면 뭐, 이리 찾게 된 것만으로 다행 중 다행이지 않은가.
“이리 찾아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한데요.”
그가 욜리를 내보낸 것도, 재운 것도 아닌데 사과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했다.
“욜리를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무사히 욜리가 돌아왔다.
그렇게 욜리 실종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욜리가 그저 밤엔 자고 낮엔 일어나는 보통의 패턴처럼 다음 날 깨어났다면, 그리 훈훈하게 끝났을 것이다.
‘…대체 왜 안 깨어나는 거지?’
문제는 욜리가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