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상냥한 시작과 달리, 그 끝에는
“미, 미안해요.”
사이나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사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요?”
콘스탄틴의 표정이 아까 베개에 얼굴을 묻기 전과 약간 비슷해지더니 또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닙니다.”
“…….”
“그저, 그대는…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내게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그가 그녀를 토닥이며 어딘지 모르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더 자도록 해요.”
그리고는 더 엉거주춤한 느낌으로 침실을 나갔다.
빼곡한 문양이 그려진 등짝이 문을 넘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사이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해가 뜨긴 했어도 아직은 이른 아침이고, 요 며칠 신경을 과도하게 써서인지 조금 더 자고 싶었다.
침구에 배인 콘스탄틴의 향기 속에서 사이나는 꿈결로 스며들었다.
* * *
콘스탄틴이 등짝의 비밀을 밝히고 나름의 화해의 과정을 거친 둘은 전과 비슷한 일상을 보냈다.
아니,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아니, 아니. 조금이 아니라 꽤 많이 달라졌나?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마 그의 스스럼없음이 아닐까 싶다.
이제 그는 그녀 앞에서 거침없이 옷을 벗어젖히기 시작했고, 해 아래 등짝을 드러내는 데에서도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콘스탄틴?”
또 다른 점은 이것이다.
“음. 조금만 더…….”
해가 뜨면 바로 사라졌던 과거와 달리, 콘스탄틴의 기상 시간이 점차 늦춰지며 반대로 침대에서의 시간이 미묘하게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화해를 한 건 좋은데 말이지…….’
아침마다 침대에서 시간을 뭉개기(?) 시작한 이 남자가 새벽부터 일어나 베일 듯한 옷차림을 하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니.
“일어나요. 집사장이 찾는 것 같아요.”
바깥에서 주인님이 깨셨냐고 묻는 나디아의 목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뜨기보다는 사이나를 제 품으로 더 당겨 안기나 했다.
‘완전,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녀는 나름 열심히 그를 파악했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매번 틀리고는 했다.
여태까지의 그는 나름의 선이 있었다.
‘아니, 해뜨기도 전에 기상하던 습관이… 일이 바빠서가 아니었던 거야?’
모든 것은 문양 때문이었던 것이다.
숨겨야 했던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니 그간의 행태는 애써 참아온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굴어왔다.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굴기에 그녀가 꺼려 할까 봐 그런가 싶어 안심시켜 주려 했다.
‘그 문양, 제겐 괜찮아요. 오히려 연구하고 싶은걸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마셨으면 좋겠어요.’
사이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때마다 어쩐지 그는 더 애가 단 표정을 지었다가 사이나로서는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흥분해 달려드는 통에, 과연 성공을 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충분한 것 같다.
“급한 일인지도 몰라요.”
둘이 침실에 있을 때면 어지간해서는 찾아오지 않는 집사장을 알기에, 사이나는 한 번 더 그를 재촉했다.
“하아…….”
결국 콘스탄틴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일어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반짝거리는 흰색의 실크 같은 그의 머리타래가 길게 쏟아져 그녀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그 감촉에 사이나가 흠칫하자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이마 뒤로 넘기며 입가를 늘여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야.”
웃음기 가득한 아침 인사.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
“네. 좋은 아침이요.”
상냥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콘스탄틴이 나가고 사이나도 기지개를 쭈욱 핀 뒤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아래로 어제 대충 던져둔 종이 몇 장이 눈에 띄었다. 사이나는 허리를 숙여 종이들을 주워 들었다.
어제 또 그의 등을 복사해 보겠다고 야심 차게 달려들었던 흔적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글자야.”
야심에 비해 결과는 형편없었지만 말이다.
분명 학구적인 느낌으로 펜을 꼭 쥐며 시작하는데, 어째서 마지막은 항상 침대에서 끝나는 건지…….
옮겨 적은 몇 개 안 되는 글자조차 삐뚤빼뚤해서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니, 거참 민망하고 민망했다.
‘음…. 다음엔 꼭, 잘 적자.’
오늘도 사이나는 반복된 다짐을 하며 종이를 갈무리했다.
‘이제 할 일을 좀 해야지.’
요 며칠 날짜 개념이 사라진 느낌이라 사이나는 일부러 현실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업무 인계랑…….’
아, 이 부분은 공작에게 물어보았어야 했는데. 물어보러 갔다가 집무실에서의 그 사건 때문에 완전 밀렸다.
“음, 다른 거부터 하자. 그럼 블랙 다이아몬드 번역이랑…….”
고서적 번역이랑 그의 등판 아를어랑 같이 연계해서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 욜리!”
욜리는 잘 있나? 대체 며칠을 못 본 거야.
완전 심통이 났을 텐데……. 곰발로 얻어맞지나 않을지 걱정이었다.
“아, 미안해라…….”
전에 콘스탄틴이 사이나의 침실을 찾아오면 욜리는 어쩐지 기겁을 하며 방을 쪼르르 나가버리고는 했다.
묘하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 녀석인지라 부부간의 내밀한 일을 보여주는 것은 사이나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다행이다 싶지만, 침실을 떠난 욜리가 밤새 갈 곳 없이 헤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엄청 불편하기도 했다.
‘똘똘한 욜리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지만.’
짐승인데 뭐 어떠냐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그녀의 방보다 주로 그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데 근래 콘스탄틴의 묘한 절박감과 불안함을 신경 쓰느라 정작 욜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만 것이다.
사이나는 내심 스스로를 자책하며 서둘러 공작부인의 방을 찾았다.
“욜리야~”
녀석도 한참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던 만큼, 방에 들어서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컁컁댈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쩐지 기척도 없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사이나는 녀석이 자주 자리 잡고 있던 소파 위나 침대 옆 베개 쪽을 열심히 살폈다.
“욜리야~ 어디 숨었니?”
삐져서 꼬리 끝도 보여주지 않을 셈인가…….
녀석이 화를 내며 곰발로 때려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여태 녀석을 방치해버린 탓에 매우 찔림을 느끼며 사이나는 열심히 방안을 뒤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결론은, 욜리가 여기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대체 어디 간 거지?’
방이 아니라 응접실 쪽에 있나? 그래,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라.
생각해보니 욜리를 언제나 그녀의 방에 머무르게 하라고 고용인들에게 미리 일러두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침실을 청소하러 온 누군가가 녀석을 발견하고 바깥으로 데리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
욜리는 그냥 일반적인 애완동물이 아니라고 강조해 두었어야 하는 건데…….
불안함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사이나가 침실 밖으로 나갔다.
고용인들을 호출하는 줄을 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가 왔다.
“마님. 부르셨습니까.”
“아, 혹시 욜리 못 보았니?”
“욜리요? 혹시 그 짐승 말씀이신가요?”
“응.”
“전 못 본 거 같습니다. 방 안에 없나요?”
“응. 바깥으로 나간 거 같은데 누가 본 사람 없는지 좀 물어봐 줄래?”
사이나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마님.”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하녀가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불안함이 아까보다 더 싹터서 사이나의 태도에 배여 나왔다.
“어찌 되었니.”
다급함을 숨길 생각도 안하고 묻자 하녀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 마님의 방 청소를 담당한 하녀랑 근처에 올 일이 있는 시종들에게 다 물어봤는데… 본 사람이 없어요.”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것이, 제 답변을 사이나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한 듯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저는 며칠 전, 인 것 같고….”
“정확히 며칠 전.”
“…그, 사흘 전인가… 아니, 나흘 전이요!”
“가장 최근에 본 사람이 누군지 찾아와.”
“네, 네!”
크림성에서의 시간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사이나가 여태 고용인들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하녀는 사이나의 냉랭한 기세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후다닥 나갔다.
‘욜리…. 대체, 어디 간 거야.’
설마 그녀에게 말도 없이 떠나버린 것은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울컥, 가슴이 치미는 느낌에 사이나가 심장께를 손으로 눌렀다.
“…찾아, 찾아야 돼.”
고용인들에게만 맡겨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사이나는 제 공간에 딸린 모든 문을 열어 하나씩 다시 확인했다.
응접실을 기준으로 딸린 침실, 보조 침실, 드레스 룸, 욕실, 다용도실, 테라스까지도…….
전에 유리를 찾겠다며 드보프 가에서 방마다 문을 쾅쾅 열어젖히던 그때처럼, 사이나는 다급한 몸짓이었다.
“마님!”
그때 어찌 알았는지 다리엘이 들이닥쳤다.
“…다리엘!”
“간만에 나오셨다는 소식 듣고 왔는데… 무슨 일이세요?”
“욜리! 욜리가 없어!”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다리엘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근래 마님께서 계속 각하의 방에 계셔서 물류 쪽 일만 보았어요. 죄송해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얼른 찾아야 해!”
“네! 제가 얼른 수소문해보고 올게요!”
“나도 가겠어!”
사이나는 도무지 가만히 앉아서 참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무작정 문을 나섰다.
방 쪽은 더 이상 뒤질 곳도 없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아까 나갔던 하녀가 돌아오다가 사이나를 보고는 속도를 높여 뛰어왔다.
“어찌 되었니!”
숨 고를 틈도 없이 사이나가 물었다.
“성내에서는 근래 사흘간 본 자가 없는 것 같아요.”
“뭐? 사흘?!”
대체 사흘이나 욜리가 없었는데, 아무도 와서 보고를 하지 않다니…….
아니, 아니다. 그 사흘 동안 신경 쓰지 못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사이나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그녀답지 않게 미친 듯이 화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