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해 아래 드러난 그곳은
‘저리 많은 문양을 새기려면…….’
엄청 아프지 않았을까?
유리에 베인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검붉게 덕지덕지 묻은 모양새는…… 마치 문양이 피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문양의 틈새에서 피가 배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새길 수 있는 양처럼은 더더욱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사이나는 어쩐지 짠한 기분이 들어 그 등을 쓸다가, 소매 끝으로 상처를 피해 흐르는 피를 닦았다.
“…사이, 나.”
숨을 삼키는 것처럼 스며드는 목소리로 그가 겨우 그녀의 이름을 뱉어냈다.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깐 약간 고소했다면, 지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웃기게도 낮에 그가 그녀에게 선사했던 공포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수호령. 부러운 게 아니네.’
여태 철없이 그를 부러워했던 제 발언들을 나름 반성하게 되었다.
“많이…… 아팠어요, 이거 새길 때?”
그가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내더니 어느새 돌아서서 그녀의 팔목을 붙들며 내려다보았다.
혼란에 찬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그 눈동자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혹시, 지금도 아파요? 그래서 만지거나 하면…….”
“아니요.”
다급하게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콘스탄틴이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화답했다.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다만…….”
“…….”
“소름이 돋거나…… 징그럽지 않습니까?”
그는 무엇보다 사이나의 감상이 중요하다는 듯이, 그리 물었다.
“그렇다기보다는…….”
“…….”
“수호령이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각하께서 제국의 공작으로서, 얼마나 큰… 의무를 지탱하고 계시는지도.”
남들은 그가 크레이머 공작으로서 누리는 부와 권리만을 보며 부러워하겠지만, 막상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보자 그의 삶은 오히려 어지간한 백작이나 후작보다 못했다.
기껏 서너 시간 자는 수면 시간, 끝도 없는 마수와의 전쟁, 침대보다 막사에서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국경에서의 거친 시간.
이제 그녀는 드보프 백작과 크레이머 공작 중에 고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전자를 고를 수 있었다.
크레이머 공작. 그는 분명, 권리보다 의무에 짓눌린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제국민의 한 명으로서 감사드리고 싶어요.”
“…….”
“여태 제가 위험 없이 살아온 게, 거저가 아니었네요.”
입에 발린 감사일망정, 사이나는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
나름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사이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랬다가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기묘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어딘가 모르게 끓어오르는 것 같은 시선은 광폭한 것 같으면서, 또 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직된 입가 역시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대는… 그대는…….”
“…? 콘스, 흡!”
그가 찰나 간에 그녀의 목과 허리를 감으며 입술을 삼켰다.
그녀의 하관을 죄다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깊게 입술을 맞물린 그가,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고개의 각도를 틀어 더 깊게 침입했다.
성대라도 핥을 듯이 안쪽까지 들어온 혀가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며 나가다가 그녀의 혀를 붙들었다.
“하윽, 으…….”
목 줄기를 따라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좌악 펴며 올라오더니 두피를 파고들었다.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그 손끝의 압박이 마치 은밀한 부위를 더듬는 것처럼 찌르르하게 흘렀다.
사이나는 그가 붙잡고 있음에도 뒤로 기울어진 제 몸의 균형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맨살의 느낌에 쥘 것이 없자 어깨 너머로 팔을 넘겨 등을 크게 붙들며 매달렸다.
손바닥에 바로 닿는 서늘한 피부의 느낌이 단단해서 자꾸 미끄러지자 사이나는 손톱을 세웠다.
그의 목울대에서 낮은 울림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그가 그녀의 허리를 받친 채 너무도 쉽게 훌쩍 들어서는 침대 위로 올려 눕혔다.
어젯밤 그가 갈아입혔을 잠옷 자락이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가며 맨다리가 드러나자 그 사이로 그녀의 것이 아닌 두꺼운 허벅지가 바로 파고들었다.
“자, 잠까안, 음!”
그녀가 다리를 바동거리며 그의 어깨를 쳤다.
콘스탄틴은 약간 이성이 끊어진 사람처럼 미친 듯이 그녀의 입 안을 탐했다.
“콘스탄틴!”
사이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입술을 확보하자마자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헉.”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가 몸을 굳히며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하아, 하아.”
벌판을 전력 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고르며 사이나가 상체를 일으켰다.
“…미안합니다. 내가 또…….”
콘스탄틴이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물렸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서둘러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오히려 사이나였다.
“어디 가요?”
“…내가 곁에 있으면 불안할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리예요?”
“…….”
그는 짐승이 어쩌고를 웅얼거리며 뭔가 변명하려는 것 같았지만 잘 안 들렸다.
“피나요. 등에서.”
아까 그의 등을 쓸다가 손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나서 사이나는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왜 그가 셔츠를 벗었던 것인지.
“상처, 안 봤잖아요.”
“…그래서 막은 겁니까?”
“치료부터 해야죠.”
그를 붙잡고 돌려세우려는 그녀의 손길에 저항하며 그가 물었다.
“내가, 싫지 않습니까?”
“네?”
“내가 만져도 괜찮습니까? 이 등…….”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사이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징그럽지 않습니까? 난 그대가…….”
아, 그가 오해했구나.
사이나가 그를 말린 것은 그가 짐승처럼 달려들어서가 아니다.
물론 낮의 일은 충격이었지만, 이유를 알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쉽게 용서가 되었다.
“왜 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신도 낮엔 좀 심했다는 자각은 있었나 보죠?”
“……미안합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또 그럴 거예요?”
“아니요. 절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어떻게 믿어요.”
그녀의 대꾸에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침대 시트를 들어 흐트러진 차림새의 그녀에게 둘러주며 아주 나직하게 말했다.
“……그대가 다치는 것이 내가 다치는 것보다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그대를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 나아요.”
이마에 흐른 머리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사이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다고 무슨 전쟁까지…….
좀 과도한 표현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여태 그녀에게 그리 믿음직한 남자였다.
집무실에서 그녀가 손톱이 빠질 정도로 바닥을 긁으며 울기는 했지만, 실상 그가 아프게 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원하지 않음에도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지나친 절정의 극한까지 사이나를 강제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 상태가 쉴 틈도 없이 몇 시간이고 반복되자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반복된 강제적인 절정은 그녀의 체력과 이지를 빼앗아 갔고, 빠듯한 자세로 잠도 못 자게 몰아붙여졌던 통에 인형처럼 흔들리며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밤들과 달리 심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쾌락이 넘치도록 있어도 배려가 없는 관계는 불유쾌하다 못해 메스꺼웠다.
그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던 만큼, 그 부분이 무너지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배려는 당연히 없고, 쾌락은커녕 인격모독과 더러운 짓거리만 가득했던 조지 홀랜더와의 기억을 불러들일 정도로, 그 정도로 최악이었다.
‘헌데…….’
조지 홀랜더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콘스탄틴은 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도 할 줄 안다는 점이다.
재발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반성도 할 줄 아는 것 같다. 뭐, 한 입으로 두말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으니 제가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한 만큼 그것을 지킬 것이란 편에 더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문양’ 때문이라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게 되자 그의 말이 믿어졌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집무실에서 있었던 사건은 기실 그리 쉽게 용서할 만한 일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콘스탄틴에 대해서는 사이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쉽게 용서가 되었다. 왜일까?
그녀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어쩌면 사이나는 아직도 그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 ‘믿고 싶은’ 사람쯤은 되겠지.
그는…… 그녀를 여러 번 구해주었던 남자고, 자칫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던 그녀의 삶을 구해준 은인 같은 사람이니까.
사이나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그에게 맞추며 덧붙였다.
“아니, 소중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배려를 가지고 대해주세요. 저, 그 정도 자격은 되잖아요.”
그의 부인이지 않은가. 크레이머 공작부인이지 않은가. 억지로 결혼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소중합니다. 그대는 충분히-”
한데 그녀의 요청에 그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소중해요.”
콘스탄틴이 느릿하게 그녀의 손을 가져가더니 손끝에 살짝 입술을 찍었다. 기사가 경애하는 레이디에게 하듯, 그렇게.
“미안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 부족함이… 나를 자꾸 못난 놈으로 만들어요.”
대체 그가 자신에 비해 뭐가 부족하다고 저럴까.
사이나는 그가 끌고 간 제 손을 보다가 또 화들짝 놀랐다. 그 끝에 뭍은 핏자국을 보자 잊고 있던 게 다시 떠오른 탓이다.
“아차, 상처요.”
또 상처는 제쳐 두고 딴짓을 했다.
“별로, 안 아픕니다.”
“피가 나는데 뭐가 안 아파요.”
사이나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뒤돌게 한 뒤 상처를 살폈다.
상처를 세심하게 닦아낸 뒤 표면을 만지는데 그가 자꾸 움찔거렸다. 다행히 유리가 박힌 것은 없어 보였다.
그리되자 상처 치료는 금방이었다. 크레이머가의 특수 포션 약간에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고 가려는데 그가 머뭇대며 그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