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상처받은 건 난데 왜 당신이 이래
“키잉…….”
이마 위로 무언가 할짝거리는 느낌에 사이나는 깨어났다.
“…….”
의식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동안, 현실인 듯, 현실 같지 않은 느낌이 교차되었다.
천천히 눈꺼풀이 몇 번 감겼다가 뜨임과 함께, 뇌가 자연스럽게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아.”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떨어지더니 덜덜 몸이 떨려왔다.
사방을 감싼 어둠이 숨 막히게 그녀를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여긴…….’
깜깜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누웠다 일어난 침대로 보아 집무실은 아닌 것이 분명했고, 느낌상 분명 자신의 방인 것 같다.
“큥…….”
그때, 누운 그녀의 볼에 부들부들한 털이 비벼졌다.
“…누구, 욜리?”
욜리였다. 녀석이 작은 곰발로 사이나의 이마를 톡톡 쳤다. 마치, 괜찮다는 것처럼.
그러자 몸을 감싸던 떨림이 신기하게도 차차 가라앉았다.
“하.”
부스스 몸을 일으킨 사이나가 욜리를 들어 품에 꾸욱, 안았다. 평소라면 답답하다고 발버둥을 칠 녀석이 웬일로 얌전하다.
‘나름의 위로인 걸까. 어찌 알고?’
녀석은 언제나 그녀의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했으니, 사실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욜리야…….”
“큐웅…….”
비혼으로 살았어야 하는 건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나, 이번에도 결혼을 잘못한 걸까?”
“큐우웅…….”
“뭐가 뭔지 모르겠어…….”
“큐우우웅…….”
부드러운 털 뭉치를 한참이나 안고 비비적거리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새까만 밤의 장막 가운데 깨어나 사방이 어두운 곳에서 상념에 잠겨서일까.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제 몸집을 키워가는 것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사이나는 더듬거리며 일어나 방 안에 있던 모든 불을 다 켜서 최대한 밝게 만들었다.
대낮에 의식을 잃어서인지 이리 애매한 한밤에 깨어난 모양이다.
“하아…….”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행이랄지 콘스탄틴은 없었다.
염치가 없어서 안 온 걸까. 아니면 오늘은 충분히 욕구를 해소했으니 안 온 걸까.
지금으로서는 콘스탄틴이 별로 보고 싶지는 않으나, 밤이 되면 늦게라도 항상 곁으로 스며들어오던 남자가 없으니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혹시 본색을 드러낸 건가? 본래 그런 강압적인 성벽이 있었던 걸까?
나쁜 습성을 어떻게든 숨기다가 결혼 후에 본성을 드러내는 남자들이 있다고 들은 것도 같다. 설마 그런 걸까?
“아니야…….”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타이밍이 좀 이상했다.
그녀가 단추를 풀자마자 돌변해서는…….
‘…결벽증을 건드렸나?’
그녀가 뭘 모르고 그의 결벽증을 자극하는 바람에 그렇게 갑자기 사람이 돌변해서 막, 그런 걸까?
언제나 넘치는 욕구를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달려들기는 했지만, 제 욕구만 채우려고 하는 남자는 아니었는데…….
어제는 달랐다.
몸이 뒤집혀 거친 그를 배려 없이 받아내는 동안, 순식간에 그녀는 과거에 잠식되었다.
조지 홀랜더와의 끔찍했던 부부관계. 바로 그 시절의 기억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쏟아졌다.
그만큼 어제의 그는 말도 안 되게 그녀를 대했다.
다시는 그와 침대를 공유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각방을 쓰자고 해야겠어.’
아니, 그녀가 머무르는 방이 공작부인의 방이고 그에겐 공작의 방이 있으니 사실 이미 각방이기는 하다.
본래 귀족 부부는 각방이 기본이기도 하고.
그간 연결문을 그녀가 항상 열어둔 채로 살았기에 그게 의미가 없었을 뿐이다.(크림성은 타운 하우스에 있던 공작과 공작부인의 방과 비슷한 구조로 역시 연결문이 있었다.)
흘끔.
불안한 눈으로 사이나가 연결문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그가 들이닥치면 어쩌나 싶다. 당분간은 도무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 잘난 포션으로 그녀가 의식이 없는 동안 다 치료를 해두었는지 둔통 외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울며 책상을 긁다가 손톱이 까득- 뒤집히던 통증을. 그리고 그 통증과 함께 제 의식도 같이 뒤집혀 사그라지던 감각을.
펼친 손의 끝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매끈했으나, 상처가 없다고 기억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나는 주먹을 쥐며 다시 연결문 쪽을 살폈다.
단단하게 잠겼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가 마음먹고 들어오려면 다른 쪽으로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을 테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그간 열어두었던 연결문은 사이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게 이제는 불편해져버린 것이다.
슬며시, 걸음을 뗐다.
천천히 연결문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다리가 살짝 떨렸다.
더듬거리는 손길로 잠금쇠를 확인하자 잘 잠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후, 안심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문은 그가 잠근 건가?’
물론 닫기만 하면 잠기니까 굳이 잠근 건 아니겠지만, 닫은 건 그겠지?
실컷 상처 주고 비싼 포션으로 치료한 것처럼, 볼일 끝났으니 문 닫고 사라지라는 건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제 생각이 비약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삐딱해진 감상은 계속 삐딱하게 흘렀다.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연결문이 만약 열려 있었다면 더 불편해하며 원망했을 거면서 당장은 그랬다. 심지어 무섭고 두려워했을 거면서 그랬다.
비이성적인 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별수 없었다.
‘최소한 와서 기다리다가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
이 방에 그가 여태 있었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소스라쳤을 테지만 불평 어린 심경은 또 그랬다.
자신의 마음이 왜 이런지는 그녀도 몰랐다. 삐딱할 대로 삐딱해진 상태라,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히 상황을 이렇게 만든 콘스탄틴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이나는 갑자기 그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자신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놓고 쿨쿨 잘 자고 있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잘은 몰라도 크게 뭔가가 변할지도 모르겠다. 상상만 해도 어찌 그럴 수가 있겠냐 싶으니.
‘인간 실격 남편을 또 만나게 되어 버린 건가.’
가정만으로도 소름 끼치는데? 정말로 그런 모습이 보고 싶은 건가, 나는?
만약 정말로 그렇기라도 하면, 어째야 하는 거지?
살짝 떨리는 손이 잠금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어찌나 잘되어 있는지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
빠끔 열린 틈새로 어둠이 들여다보였다.
한껏 붉을 밝혀둔 그녀의 방과 대조적으로, 암흑처럼 깜깜한 공간이 저 너머에 있었다.
갑자기 용기가 사그라진다.
사이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가장 가까운 데에 있던 등을 잡아들었다.
“큥?”
도로록, 달려온 욜리가 제 종아리를 툭툭 쳤다. 도리도리 젖는 것을 보니 가지 말라는 것 같다.
그럴까? 가지 말까?
‘하지만…….’
현재의 남편이 제2의 조지 홀랜더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녀의 감정은 어느 쪽으로도 뻗어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 고여 썩어들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과 달리 꼭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의 다짐은 어찌한단 말인가.
똑같이 비참함으로 종지부를 찍는, 그런 삶은 원하지 않았다.
저벅.
결국 그녀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동그란 빛무리가 같이 움직였다.
“…….”
하지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거긴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는 누웠다가 일어난 흔적 하나 없이 매끈했다.
묘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용기 내어 왔는데…….’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다시 돌아가려는 차에, 챙그랑 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침대 저쪽에서 뭔가 떨어져서 떼구르르 구르는 소리였다.
순간 흠칫하여 몸이 굳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후 다른 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뭐지? 사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너머를 보았으나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더 옮겨, 들고 있던 등불의 불빛의 영역을 이동시켰다.
“어…….”
침대 반대편.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
콘스탄틴이었다. 그가 높다란 침대 너머 바닥에 앉아 있었던 탓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한 팔을 길게 얹어 놓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콘스탄틴 주변 바닥에는 뭔가가 잔뜩 있었는데, 보니 술병이었다. 한두 개도 아닌 여러 개.
인식을 하고 보니 방안에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짙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잠든 건가.
“…사야.”
갑자기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란 사이나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크, 읏.”
그런데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부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더 깊게 머리를 박으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동그랗게 말린 커다란 몸체가 이따금 움찔거렸다.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침대 아래에 쪼그린 남자의 모습을 보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악몽을 꿨었지. 악몽을 자주 꾸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으나 사이나는 무얼 어째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그저 멀찌감치 서서 그를 바라만 보았다.
낮의 일 때문인지 이제는 선뜻 그에게 다가가기 힘들었다.
“흐…….”
그런데 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모로 쓰러졌다.
문제는 그 덩치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병인지 잔인지를 깔아뭉개는 바람에 뭔가 파삭,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
뭐, 뭐야? 괜찮은 건가?
사이나는 깜짝 놀라서 바닥에 등을 내려놓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 대한 반감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일으켜 보려 했으나 그녀가 감당하기엔 그의 덩치가 너무 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피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분명 유리에 찔려 베인 모양인데 도무지, 그를 잔해 위에서 들어 일으킬 힘이 없었다.
“……하, 좀 꺼져…….”
그리고 그때, 웅얼거리듯 그가 내뱉은 말이 귀에 박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