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요
집 안에서도 온몸을 다 가리는 답답한 옷을 입었고, 빳빳하게 줄이 선 모양을 보면 저 옷을 입고 어디 앉기는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구김도 없었다.
그나마 손은 맨손인가 했더니 그것도 사이나 앞에서나 그런 것 같고, 집무실에서나 침실 바깥에서는 장갑까지 꼭꼭 착용해 다니고는 했다.
집안 내에서도 목욕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귀족은 물론 없지만(이런 부분은 대개 다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불편한 차림새로 집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신기했다.
‘…역시나 결벽증인가?’
자신에겐 스스럼없이 손을 대오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싶다가도, 그런 행태를 보면 또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선택적 결벽증? 그건 또 이상한데 말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이나. 더 자요.”
“으음…….”
매 아침마다 각 잡힌 제복 차림의 콘스탄틴을 이리 발견할 때면, 졸음이 묻은 멍한 눈매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일하러 가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엄청 바쁘신 거 같아요. 일이 많아요?”
콘스탄틴이 뭔가 묘한 표정으로 웃더니, 침대 가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찍었다.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것이, 내겐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냥 아침도 아니고 해가 뜬 직후면 바로 기상이라니. 사이나에겐 부지런하다 못해 고행처럼 느껴질 정도의 습관이었다.
“그대는 충분히 자도록 해요. 내 책임도 있으니. 굳이 내 습관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이마에 입술을 찍고는 일어났다.
어딘가 미련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으나, 그렇다고 다시 앉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밤새 그녀를 탐하면서도 해가 뜨면 매번 딱 부러지게 침실을 떠나고는 했다.
‘성실한 사람…….’
성실하다 못해 책임감 그 자체. 아니, 과히 일중독자 수준이 아닌가.
남들은 공작이라고, 수호령의 주인이라고, 그를 엄청 부러워할 텐데…….
막상 쉴 시간도 없이 꼭두새벽부터 이리 매일매일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알면, 부러워할까?
‘나도 찔리는걸.’
사이나는 자신도 이제 좀 바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공작부인이라고 와서는 한 게 없는 것 같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침대에서…….
‘…으음.’
매우 민망해졌다.
‘그래도 딱… 한 시간만 더 자고.’
콘스탄틴처럼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못 할 짓이다.
사이나는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 * *
한 시간보다는 조금 더 자고 일어난 사이나는 최대한 빠른 식사를 마치고 단장했다.
그리고 다리엘을 통해 바로 나디아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도울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
적응기가 끝났으니 이제 일을 할 때다.
“하지만 내가 본령에서만 머무르는 것은 또 아니니, 지나치게 모든 영역을 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느 선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네? 각하께서요?”
“예.”
벌써 이런 부분에 언질을 넣어두었단 말이야?
이따금 이렇게 섬세하다 못해 치밀할 정도의 배려를 인지하게 되면 정말 기분이 이상해졌다.
“각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계시나요?”
“예.”
나디아는 정말 묻는 말에만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 끝이었다.
“마님, 잠깐 찾아가셔서 차라도 한잔 같이하시면 어때요? 각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무얼 바라고 그것을 물었는지 사이나 스스로도 몰랐었는데,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 것은 다리엘이었다.
“티 세트를 준비할까요?”
“…….”
“마님이 잠깐 방문하시면 각하께서도 숨 좀 돌리실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쉴 틈 없이 일만 하신다니까요?”
설마 정말 그러겠느냐 싶었다. 그냥,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려는 다리엘의 변명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배려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금방 준비됩니다!”
유능한 다리엘이 활짝 웃으며 후다닥 나갔다.
그리고 불과 십 몇 분 뒤, 사이나는 그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다리엘이 자신이 밀고 있던 티 세트 트롤리를 사이나에게 넘기더니 그의 집무실을 거침없이 똑똑, 노크했다.
“들어와.”
방긋 웃은 다리엘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더니 사이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사야?”
“…아, 저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책상에 앉아 있던 그가 그녀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갑자기 집무실로 찾아와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놀란 모양이다.
“그, 잠시… 쉬시면 좋을 것 같아서 차를 좀 챙겨왔어요.”
“차, 말입니까?”
“네. 엄밀히 말하자면 차를 챙긴 건 다리엘이지만……. 음, 바쁘세요?”
“아닙니다. 그대가 원하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방문이 기꺼운지, 그가 짙게 웃었다.
매끄럽게 문이 닫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쩐지 그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자연스럽게 내부를 살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집무실 인테리어는 아주 심플했다.
타운 하우스에 있던 집무실과 달리 이곳엔 소파가 없었다. 그러니 커피 테이블도 없었다.
티 세트를 차릴 자리가 마땅치 않아 잠시 당황하고 있는데 그가 트롤리를 그녀의 손에서 떼더니 책상 옆에 두었다.
“그대가 올 줄 알았다면, 티 테이블을 두었을 텐데요.”
“일하시는 동안은 차를 안 드시나 봐요.”
괜히 찾아왔나 싶어 사이나가 멋쩍게 물었다.
사실 콘스탄틴의 입장에서는 업무를 보는 등,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칼리고가 더 집요하게 수다를 떨고는 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집무실에는 사람을 잘 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는 차도 잘 마시지 않았다.
보고 받을 일이 있으면 옆 방 회의실을 이용했다.
타운 하우스 집무실에 있던 소파와 테이블은 순전히 사이나와의 수요일 때문에 들여놓은 거였다.
그녀는 모를 테지만…….
“…아닙니다. 오늘 당장 티 테이블을 이쪽에 놓아두라 할 테니, 언제든 와도 좋아요.”
“하지만…….”
“혼자 마시면 맛이 없어서요.”
아. 혼자 마시기 싫어서 안 마신 건가.
그래도 일하다 보면 중간에 목이 마르지 않나?
“그럼… 차를 우릴게요.”
“직접이요? 그러고 보니 이건…….”
사이나는 일부러 구식 다구 화로를 챙겨달라고 했다. 전에 유모가 콘스탄틴이 이 방식으로 우린 차 맛을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데면 어쩌려고, 굳이…….”
“괜찮아요. 저 구식 다구를 잘 다루는 편이거든요. 잠시만요.”
트롤리에서 사이나가 능숙하게 차를 우리는 것을 보더니, 콘스탄틴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자칫 손을 데일까 눈을 떼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우려진 차를 찻잔 두 개에 쪼르르 따라냈다. 근데 찻잔을 놓을 곳이었다.
사이나가 찻잔을 들고 두리번거리자 콘스탄틴이 서류를 대강 챙기더니 한쪽으로 밀어두고는 소서 채로 받아서 책상 위에 두었다.
“그대는, 이리.”
콘스탄틴이 하나 달랑 있는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제 무릎을 두들겼다.
“앉아요.”
“네? 그건… 앗!”
농담이 아니었던지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겨서는 정말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고, 다른 손으로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정말 그 맛이네.”
맛이 괜찮은지 콘스탄틴이 사이나의 눈가에 입술을 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방금 마신 따뜻한 차 때문인지 눈꺼풀에 열기가 느껴졌다.
“어찌 이런 재주가 다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 구식 화로를 써볼 일이 있었어요.”
“아를-프로메사를 좋아하듯, 이런 오래된 방식을 좋아하는 겁니까?”
그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시릴 정도로 파랗던 그 눈빛이 지금은 따뜻하게 보였다.
마치 사랑스러움이 담겨있는 것처럼…….
사이나는 대답도 잊은 채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흠. 티 테이블이 없는 것도 괜찮군요.”
“…….”
“들여놓지 말까요?”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눈빛에 홀려, 사이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갔다.
쪽. 닿은 입술에 하얗고 빽빽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보다도 더 풍성한 속눈썹의 느낌에 입술이 간지러워 흠칫, 떨어졌다.
“…….”
아까 따뜻하게 물들었던 파란색은 착각이었다는 듯, 짙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그가 사이나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눈이… 예뻐서.”
충동적으로 행동했던 게 갑자기 민망해진 사이나가 변명으로 입을 열었으나 소용없었다.
“사람이 기껏 참고 있는 줄도 모르고.”
뭘 참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를 악물듯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목덜미를 감아 당기며 입술을 뭉개듯 키스해왔다.
“…흡!”
며칠 굶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가 핥아댔다. 숨결이라도 죄다 삼킬 것처럼 밀착한 채로 가득 혀를 넣어 작은 입 안을 유영했다.
마치 처음 맛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치아와 연구개, 혀 아래며 입술 뒤쪽까지 온갖 곳을 긁으며 동시에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빨았다.
“으응, 으?”
그러다 어느새 훌쩍 들려 책상 위에 앉혀졌다. 미리 서류를 치워둔 것은 마치 이때를 위한 것처럼 그 빈자리에 사이나가 자리했다.
콘스탄틴은 입도 떼지 않고 그녀에게 키스하는 동시에 찻잔을 한쪽 구석으로 밀었다.
그리고 돌아온 손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코, 콘스탄틴!”
더 경악스러운 것은 벌린 다리 사이로 들어간 그의 허리가 숙여지더니, 하얀 머리꼭지가 치마 아래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으응!”
대번에 엉덩이가 잡혀 고정되며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