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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27화 (127/233)

127화. 미묘한 변화

사이나 혼자서도 충분히 부축을 할 수 있을 만큼 마른 몸이라 상관은 없었지만 이상하기는 했다.

“제가 죽기 전에 우리 도련님 결혼하시는 것도 보고……. 너무 기쁩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침대에 누우며 유모가 말했다.

“왜 자꾸 죽는다고 그러세요. 조금 더 기력을 내셔서 오래 살다가 가셔야죠.”

“제 몸은 제가 알아요. 그저 제 걱정은… 이후에 도련님께서 괜한 자책으로 괴로워하실까 봐…….”

자책? 그가 왜 자책을 하지?

유모의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성공하지 못해서?

엄청난 부와 권력이 있다 한들 사랑하는 사람의 병도 고칠 수 없다면 자괴감을 느낄 법도 하다만은, 그래도 자책이라는 단어는 좀 이상하지 않나?

유모의 병의 원인이 그에게 있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에야…….

“그런 게 걱정되신다면 갑자기 홀로 쓰러지시는 일이 없게 본 성에 머무르시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유모는 극구 사양했다.

“각하께 전해주세요. 이 유모는… 그분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정말 기쁘고 행복했노라고…….”

“……네. 그럴게요.”

자칫하면 유언처럼 들릴 것 같은 말을 마치고 유모는 기력이 다했는지 잠에 들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였다.

‘몸 상태가 엄청 불안해 보이는데…… 왜 이런 외딴곳을 고집하여 떠나지 않으려는 걸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콘스탄틴은 이유를 알려나.

이런저런 의문을 가진 채 침실의 문을 닫고 나오다가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양 무릎에 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맞잡은 상태로 상체를 숙여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가 있는 곳에만 깊게 그늘이 드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질식할 것 같은 우울함과 짙은 어두움에 곧이라도 잠식되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콘, 스탄틴?”

사이나는 황급히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잡은 손 아래로 그가 움찔하며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그의 파란 눈동자가 흐렸다. 서서히 사이나에게 초점을 맞춰오기 시작하는 느린 반응이 마치, 어딘가로 떠내려갔던 그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사, 야…….”

덥석. 그가 그녀를 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묻었다. 그 불안정해 보이는 분위기에 사이나는 추측했다.

아마도 어미 같은 유모의 죽음이 지척이라 이리 슬퍼하는 것인가 보다, 라고.

“유모님께선 괜찮으실 거예요.”

“…….”

“웃으시며 당신을 키워내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하시더라고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아오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을 뿐.

* * *

“아흑.”

콘스탄틴은 이날 밤에 평소보다 더 격하고 조급하게 그녀를 안았다.

“사야, 하아…. 사야.”

밤새 그녀의 안을 들락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려댔다.

“그, 그만……. 읏.”

반쯤 풀리기까지 한 눈을 하고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녀를 품었다.

그 와중에도 손길과 입술은 지극히 소중한 것을 만지듯 부드러운 반면, 허리 아래로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이 오락가락한 마음이 들었다.

자정이 넘어갈 때 즈음에 이미 사이나는 계속해서 벌어져 있던 허벅지 안쪽이 파들거리고 지쳐서 그만하고 싶었으나, 이날의 콘스탄틴은 묘하게 절박해 보였다.

그 모습에 또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버티다가 결국,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다.

다음 날 사이나는 또 내내 자버렸다.

나름대로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던 일상이 다시 밀려나고 느지막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며 사이나는 허리를 짚었다.

‘삭신이야…….’

오늘에야말로 정말 마사지가 필요한 날인 것 같았다.

“마님? 기침하셨어요?”

“…들어와.”

때마침 다리엘이 찾아왔다. 정말 어쩜 이 아이는 이렇게 내가 깨어나는 시점을 잘 아는 걸까. 신기할 따름이다.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오늘은…… 저번에 말한 그거. 마사지부터 가능할까?”

“앗! 그럼요! 당장 준비시킬게요.”

다리엘이 데리고 온 마사지사는 정말 대단했다. 뭉치고 결리고 삐걱거리던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

“와…….”

풀코스로 마사지를 받고 나자 온몸이 노곤노곤 풀려서 다시 잠이 들 뻔했지만 참아냈다.

“마사지, 괜찮으셨어요?”

“아, 응. 너무 좋았어.”

“다행이에요.”

사실 사이나는 혼자인 것이 워낙 익숙해서 수발드는 사람일지라도 가까이 있으면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리엘의 거리감이 워낙에 뛰어나서 불편함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럼 식사가 다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고 올 테니, 그동안 이것들을 살펴보고 계시겠어요? 마님께 온 서신들이에요.”

“응? 알았어.”

다리엘은 사이나의 개인 영역을 유지해 주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완벽한 시녀였다.

‘…유, 유능해!’

며칠 만에 사이나는 다리엘의 존재를 뼛속 깊이 새기고 말았다.

다리엘이 나가고 사이나는 가운을 걸쳐 입으며 개인 응접실로 가서 앉았다.

그새 야무지게 티 세트까지 지시해 두고 갔는지 하녀 한 명이 갓 우린 차를 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한쪽 어깨로 넘기고 사이나는 서신이 놓인 함을 살폈다.

“앗, 키키 언니다. 에비앙 언니도 있네.”

비슷한 시기에 도착해서 답신 역시 함께 도착한 것인지 친우들의 답신이 다 있는 듯했다.

사이나는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편지 봉투를 열었다.

둘의 편지에는 갑자기 떠나버려서 서운하지만 이해한다는 등의 내용과 이런저런 근황이 적혀 있었다.

사이나가 중앙 사교계와 떨어져 있는 동안 정보에 뒤쳐지지 않도록 배려해준 듯했다.

다음 편지를 열자 이번엔 플로리아의 것이었다.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네.

언제 다시 황도에 올지는 모르는 거지?

나도 사교 시즌 전에는 잠시 본령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시간이 되면 놀러 와.

아니면 내가 오빠한테 부탁해서 그쪽으로 가도 되고~]

플로리아도 영지로 가는 모양이네?

그리고 오빠에게 부탁을 한다는 표현을 보니(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녀는 워프 게이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육로로 오가면 아무리 빠른 말을 탄다고 해도 한 달 거리 여정인데, 이리 쉽게 오갈까 묻는 것을 보니 말이다.

‘어쩐지 그립네.’ 친우들의 편지를 읽으니 엄청 반갑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넷이서 함께하던 모임과 수다가 말이다.

황도에 가면 또 보겠지만, 당장은 아니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편지는 황녀님의 것이었다.

결혼식 답례품과 함께 보낸 서신에 대한 형식적인 답신 정도를 예상한 편지는 손에 잡히는 느낌이 상당히 두꺼워서 의외였다.

사이나는 인장을 뜯고 편지지를 꺼냈다. 낱장이 아니었다.

내용에 생각외의 사담이 상당해 또 한번 의외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기분은 어떠한지 너무 궁금하오……]

…에? 사랑하는 사람?

‘왜 이런 착각을 하신 걸까.’

사이나는 자신이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객관적인 느낌으로 되짚어 보았다.

‘음……. 착각할 만하구나.’

귀족답지 않은 결혼까지의 최단 준비 시간부터, 근래 콘스탄틴이 바깥에 보인 태도 등을 보면, 아마도 대부분 그리 생각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구절절 이러저러해서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하고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라고 사람들이 여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고 사이나 자네가 괜찮다면, 만남부터 이루어지기까지 직접 듣고 싶소. 벌써부터 낭만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오……]

편지를 계속해서 읽다가 사이나는 슬쩍, 웃고 말았다.

고귀한 핏줄. 황녀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구나, 하는 공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하듯, 편하게 하는 말과 문장들에서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황녀님도 사랑을 하고 계셔서 그런 게 아닐까.’

잘은 몰라도 그 호위기사와 절대 가벼운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잠깐. 황녀님‘도’ 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콘스탄틴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사랑을 운운할 사이는 아니다.

‘사랑이 아니면 어때.’

사이나는 현재에 아주 만족했다.

황자와의 결혼도 피했고, 콘스탄틴은 아주 훌륭한 남편이었다.

그녀가 예상했고 상상했던 것보다 한참이나 더.

전생에 엘리자베스에게 대하는 것을 본 바가 있어(그리 따뜻하지는 않아도) 부인에 대한 예는 지켜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상냥하고 배려 깊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무얼 더 바라랴.

‘근데 호위기사랑… 이어질 수가 있던가?’

아무래도 신분 차이 때문에 불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헤베타의 자리야 신분의 차이보다 정령력의 유무를 더 크게 보지만, 황녀의 부군 자리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아, 이런…….”

인식을 하고 나자 갑자기 걱정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감정이 깊을수록 나중에 더 힘들어질 텐데. 이를 어쩌면 좋을까.

갑자기 답장의 말투를 아주 행복한 척 써야 할지, 그럭저럭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이나는 적당한 진실과, 적절한 얼버무림을 섞어 답장을 보내되, 콘스탄틴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 한해서는 진심을 담아 서신을 작성했다.

* * *

며칠이 지났다.

유모와의 만남 이후로 콘스탄틴은 뭔가 미묘하게 달라져서 밤마다 약간 절박하다 싶게 그녀를 안았다.

마치 누군가가 뒤를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통에 사이나는 덩달아 휩쓸려서 매일 죽을 맛이었다.

뭐, 죽을 맛인 것은 사이나뿐인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는 거람?’

그녀는 콘스탄틴이 자신보다 일찍 잠드는 것을 못 봤다. 언제나 먼저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은 사이나 쪽이고, 깨어보면 콘스탄틴은 진즉 일어나 있었다.

그것도 이미 다 씻고, 옷까지 다 차려입은 상태로.

옷도 그냥 옷이 아니라 당장 황성에 입궁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각이 선 그런 차림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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