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애정 사이, 기묘한 거리감
‘가문의 어른을 뵈러 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후원을 가로질러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뭔가, 익숙한데? 여기?’
심지어 어딘가 낯익은 느낌까지 들었다.
숲길 사이. 산책로에서 다소 벗어난, 묘하게 인적이 드물고 약간 숨겨진 듯한 경로. 중간중간 나타나는 헷갈리는 구획.
‘아…….’
알 것 같다. 이 길은 분명 붉은 벽돌집으로 향하는…….
‘유모님을 소개시켜 주려는 거구나.’
저번에 봤을 때 건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이쪽에서 찾아가는 게 이해가 되었다.
다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콘스탄틴의 태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미묘하게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사이나를 보며 말했다.
“유모가 있습니다.”
“…….”
사이나는 저번에 이미 만난 적이 있다며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날… 내 친부모보다 더 사랑해준 분입니다.”
친부모보다? 사이나도 엄마 없이 마르다의 보살핌 아래 자라났기에 그 말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저 말은 뭐랄까. 친부모가 분명 있는데 전혀 사랑해주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친부모보다 더 사랑해준 분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굳어 있는 느낌이라 말의 내용과 괴리가 느껴졌다.
“유모가 그댈 보면 굉장히 좋아할 겁니다. 내가 결혼하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어, 전에 공작님께서도 결혼이 급하시다고 하셨는데 혹시…….”
“…맞습니다.”
그럼 전생에도 그가 계약이나마 결혼을 했던 게 유모 때문이었나?
사랑하는 유모의 죽음이 지척이고 유모의 소원이 그랬다면, 그녀가 죽기 전에 결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예?”
“만약에 제가 없었다면 말이에요.”
“…….”
“이런 상황에 혹시 누군가가 계약 결혼을 제의했다면, 공작님께서는 하셨을까요?”
콘스탄틴은 그녀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긴, 사이나도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심 아직도 엘리자베스의 자리를 뺏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결혼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계약이라면.”
전생에 그가 대체 왜 계약 결혼을 했나 했더니 이런 이유였다면…… 남의 자리를 차지한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은 좀 덜어도 되는 거겠지?
“그렇다 한들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군요.”
“…네?”
“그건 어디까지나 그대의 말처럼 만약일 뿐이니.”
“…….”
“난 그대와,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네, 네?”
“결혼, 말입니다.”
대단한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사이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네. 그, 저도…….”
“그대도……?”
“시, 싫지는 않았어요.”
“이런. 그냥 싫지 않은 수준이었습니까?”
“…아니, 아니요. 공작님이라서…….”
“나라서?”
콘스탄틴은 그녀의 말을 다시 반복하며 사이나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려 주었다.
“공작님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엔 손쉬운 선택지 같아서 골랐지만 지금 보니 그 수준이 아니라 행운처럼까지 느껴졌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을 의도치 않게 가로채버린 것 같아 마음의 빚이 사실 적잖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이로써 해소가 된 기분이라 더 좋았다.
발그레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콘스탄틴이 손을 들어 엄지로 그녀의 볼을 느릿하게 쓸었다.
“나야말로.”
천천히 쓸며 내려감과 동시에 기다란 나머지 손가락은 그녀의 귀 아래를 감싸듯이 움직여 붙잡더니, 이내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그대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응…….”
나릿하게 그녀의 입술을 감싸며 틈새를 벌린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며 키스해 왔다. 동시에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는다. 사이나는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키스는 그가 다급하게 입술을 붙여올 때와 달리 부드러웠고 진중했으나, 그렇기에 더 묘한 감정을 선사했다.
뭐랄까. 사랑받는 기분? 소중히 대해지는 기분?
그리고 그 생소한 감정을 파악하느라 사이나는 유모와 이미 안면을 튼 사이라는 것을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둔중한 노크 소리가 그의 주먹을 통해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도련님?!”
“유모.”
“도련님! 세상에! 절 찾아주셨군요!”
콘스탄틴의 방문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말투. 유모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세요! 이 유모가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차를 한잔 타드리겠습니다.”
“유모. 나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콘스탄틴의 커다란 덩치가 옆으로 비켜서자 유모는 그 너머의 사이나를 볼 수 있었다.
“부인과 함께 왔어.”
“어머나, 마님도 함께 오셨군요!”
“황도에서 결혼한 것은, 들었지?”
“예. 나디아가 말해 줬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사이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유모님.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사이나 크레이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은 공작님과 함께 오게 되었네요.”
“이리 또 찾아주셨으니 제가 더 감사하지요. 얼른 들어오셔요.”
콘스탄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둘이 이미 아는 사이인가? 사이나, 여기… 와 본 적이 있습니까?”
“네. 실은, 저번에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 집을 발견했어요. 근데 유모님께서 차를 대접해 주셔서…….”
“…….”
콘스탄틴은 허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랬군요. 들어갑시다.”
“네.”
아늑하고 정감 있지만 좁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감상은 콘스탄틴이 자리를 잡고 앉자 완전히 달라졌다.
전과 달리 내부가 어째 꽉 차는 느낌. 묘하게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유모는 부산스럽게 화로며 다구를 챙기면서 움직였다.
“유모님. 제가 우릴까요?”
“아닙니다, 마님! 오늘은 제가 컨디션이 매우 좋거든요. 제가 우리게 해주셔요.”
“…네.”
딱히 저번보다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하게 본인이 하겠다는 말에 사이나는 더 나설 수 없었다. 그래도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유모를 살폈으나, 표정만은 즐거워 보였다.
반면 그런 유모를 보는 콘스탄틴의 표정에는 이유 모를 씁쓸함이 느껴져 약간 의아했다.
“잘 우려졌네요. 드셔 보셔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유모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콘스탄틴과 사이나 앞에 잔을 놓아주었다.
“잘 마실게요.”
사이나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와아. 맛있어요.”
사이나도 옛날 방식의 다구를 꽤 잘 다루는 편인데, 그럼에도 뭔가 달랐다.
“정말 깔끔하네요. 온도도 완벽하고.”
“제가 워낙 이 다구와 차에 익숙하다 보니 그렇지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정식으로 소개받는 자리여서인지 유모의 말투가 저번과 좀 달랐다. 훨씬 예를 차리는 말투였으나, 이리하지 마시라고 하기도 뭐해서 그냥 받아들였다. 대신 사이나도 경어를 유지했다.
“공작님은 어떠세요?”
평소에도 말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더 과묵해진 것 같은 콘스탄틴에게 사이나는 부러 물었다.
“…좋습니다.”
“그렇죠? 엄청 맛있어요.”
“맛있게 드셔주시니 제가 행복합니다.”
차를 마시는 콘스탄틴을 어쩐지 애잔한 표정으로 보던 유모가 갑자기 물었다.
“잠은… 잠은 잘 주무셔요?”
잠에 대해 이렇게 묻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의 불면 증상에 대해서도 잘 아는 모양이다.
근데 콘스탄틴의 대답이 없다. 흘끔 보니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잠이요? 네. 잘 주무세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사이나가 대신 대답했다.
“정말 잘 주무세요?”
“네. 불면 증세가 있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잘 주무시고 계세요.”
잠은 오히려 그녀가 부족한 판이었다.
“정말입니까? 아이고…!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유모는 글썽거림을 넘어 이제 정말 울었다. 울며 웃었다.
사이나는 당황하여 품을 뒤졌으나 손수건 같은 것을 챙겨오지 않아서 대신 유모의 손을 잡았다.
“불쌍한 우리 도련님……. 마님께서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 정말 그거 하나면 제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울지 마세요. 기력이 떨어지세요. 유모님 말씀대로 할게요.”
남들은 다 부러워할 그더러 왜 불쌍하다며 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콘스탄틴에게는 그녀가 느끼기에도 가끔 짠한 면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아까보다 더 얼어 있었다.
“어릴 때는 달달한 초코봉봉이나 생크림 슈 같은 것들을 그리 좋아하셨어요.”
“정말요? 지금은 단 거 전혀 안 드시던데…….”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초코봉봉과 슈라니……. 뭔가 너무 귀엽고 동글동글한 디저트들 아닌가.
“예, 이젠 안 드시지요…. 쳐다보지도 않으시지요…….”
유모는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대체 이 포인트에서 왜 이리 애통하게 우는지 알 수가 없어 사이나는 또 매우 당황했다.
“유모.”
드디어 콘스탄틴의 말문이 열렸다.
하지만 애잔한 느낌보다는 거기까지만 하라는 듯, 경고성을 띤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 유모가 부족해서…….”
사이나는 뭐가 뭔지 몰라 그저 유모의 손을 더 꽉 잡으며 토닥였다.
“우, 울지 마세요. 건강이 상합니다. 각하께서 걱정하세요.”
이 말은 효과가 좋았다. 유모는 어떻게든 울음을 그치려 사이나의 손을 잡고는 심호흡을 했다.
“예. 좋은 날에 울면 안 되지요. 그럼요.”
그럼에도 역시 체력을 소모했는지 아까보다 기력이 떨어져 보였다.
“누우시는 게 좋겠어요. 힘들어 보이세요.”
사이나는 유모를 부축해서 침실로 이끌었다. 유모도 그렇다 느끼는지 거절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콘스탄틴이 돕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점이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움찔하기는 했으나 결국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이나가 유모를 부축해 침실로 가는 것을 멀거니 보기만 했다.
어쩐지 전혀, 그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