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불륜의 기억
‘내조를 그따위로 하니 남편의 사회생활이 안 풀리는 것이 아니냐!’
남편의 타박에 몸 상태가 별로 좋지도 않은데 겨우 참석을 했었다.
전날부터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타이트하고 얇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으려니 몸은 으슬으슬하고 정신은 몽롱했다.
그래도 애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말도 적당히 섞었다.
두어 시간 가량을 겨우 버텨낸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에게 그리 사교 활동을 강조했던 남편이, 본인의 사교 활동은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당최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그날은 오래 있을 컨디션이 아니었다. 이만 가보아야겠다고 알리기 위해 그녀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시종을 통해 남성 휴게실을 둘러봐달라고 했으나 남편은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열이 점차 올라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지고 있어서 임시방편이 필요했다.
신선한 바깥바람이라도 쐬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 그녀는 연회장 바깥으로 나섰다.
몇 년간의 사교계 변두리 경험을 통해 사이나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쉬기 좋은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그건 바로 테라스 아래.
보통 무도회장으로 쓰는 홀은 구조상 정원 쪽을 향해 테라스가 나 있었고, 그 아래에 그늘이 있었다. 제국의 건축 양식상 무도회용 홀은 보통 1.5층 정도의 높이에 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날도 사이나는 적당히 한적해 보이는 테라스 아래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앉으면 풀물이 들 테니 한 10여 분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있다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앙.’
‘여기? 큭큭.’
위에서 몸을 쭈뼛하게 하는 음향만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 이번엔 또 누구람…….
테라스 아래에서 쉬다 보면 사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이나는 남녀 사이의 관계를 알아채는 눈치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교계의 불륜 관계에 빠삭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것을 캐기 위해 이런 곳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쉬고 있으면 꼭 저런 커플들이 근처에서 판(?)을 벌이고는 했던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목소리를 듣고 장본인을 유추하며 속으로만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 같다는 것이 문제였다.
‘흐응. 입 다물고 움직이기나 해.’
‘넌, 역시 화끈해서 좋아. 후우.’
‘왜, 읏, 부인과 잠자리가 별로야?’
‘그년은, 나무토막이 따로 없어. 애도 못 낳는 석녀 주제에 뻣뻣하기까지 하다니까.’
‘후훗, 걔가 좀, 융통성이 없긴 하지.’
‘그 정도가 아니야. 진짜 지참금만 아니었으면, 벌써 내쫓았을 거야.’
사이나는 얼어붙었다.
아는 목소리가 한 사람 만이었다면 그나마 덜 충격이었을까.
남자 목소리는 물론, 여자도 아는 목소리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사이나는 비명처럼 새어 나오려는 흐느낌을 참으려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손으로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벽을 짚었다.
‘그러는 넌, 왜 공작 나리께서 만족을 못 시켜주시나? 응?’
‘아!’
‘그 건장한 덩치에 비해 실은 엄청 볼품없는 물건을 가지고 계시다거나? 응? 말해봐?’
‘하읏, 조용히 하고, 하던 거나 해.’
여자의 요구에 따라 하던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는지 남자는 입을 다물었고, 이후로는 신음과 질척한 소리만 사방을 채웠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사이나는 위에서 들려오는 온갖 추잡한 소리를 여과 없이 들어야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일을 치른 남자와 여자가 옷을 추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가.’
‘예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달라고, 공작부인. 킬킬. 이쪽 궁합은 또 죽이잖아, 우리가.’
‘알았어.’
남자가 먼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에 여자가 중얼거렸다.
‘천박한 새끼.’
남자가 있을 때 내던 교태 어린 목소리와는 생판 다르게 차갑다 못해 치가 떨려 하는 말투였다.
그리고는 곧 여자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사이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하고 그 아래에 한참을 서 있었더랬다.
그런 치태를 보인 남과 여.
그들은 다름 아닌…… 사이나의 남편과 사이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조지 홀랜더와 엘리자베스 발데즈.
‘아니, 당시에는 엘리자베스 크레이머였지.’
충격과 배신감에 어쩔 줄 몰랐지만 또 그와 별개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크레이머 공작 같은 남자를 두고 왜 조지 홀랜더 같은 작자와 붙어먹었는지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마지막에 ‘천박한 새끼’ 운운한 것을 보면 좋아서 그런 것 같지도 않으니 더 이상했다.
‘엘리자베스는 대체 왜 그랬던 걸까?’
궁합이 좋아서…?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던 전남편과의 동침을 떠올리면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조지 홀랜더가 허구한 날 계집질을 하고 다니기는 했으나 이기적인 성향상 여자를 만족시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아파하든 고통스러워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놈은 제 욕심 차리는 데만 바빴다. 아니, 그럴수록 더 좋아하기까지 하는 변태였다.
그러니 엘리자베스에게 이상 성벽이 있지 않는 이상, 좋아서 만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이 황도에 없어서?’
당시 엘리자베스는 황도 사교계를 매일 같이 누비고 다녔고 공작은 영지를 떠나질 않았으니 외로워서 그랬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워프 게이트의 존재를 알고 나니 그것도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백번을 생각해도 조지 홀랜더 따위보다…….’
사이나는 물끄러미 콘스탄틴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상황에 떠밀려 콘스탄틴과 결혼하게 되었을 때도 사이나는 그가 나쁜 남편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절히 예의를 지키며 서로 존중하는 정도의 부부 사이를 예상했던 터라, 놀랍기는 했다. 그가 생각 이상으로 좋은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를 배신할 수 있었던 거지?
사이나는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딴생각에 빠진 채 그를 바라보는 사이나를 보며 콘스탄틴이 점점 묘한 얼굴을 하며 다가왔으나, 사이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역시… 내가 부족하다 보니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
“더 노력해야 할 것 같군요.”
“읏?! 뭐- 앗!”
갑작스레 목덜미를 핥아 올리며 콘스탄틴이 그녀의 무게 중심을 뒤로 옮겼다.
어느새 다시 침대에 눕는 자세가 된 사이나의 위를 그가 타고 오르며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아니- 공작님!”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을 정도로 부족하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콘스탄? 으읍.”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도중 숨결을 도둑맞은 사이나의 호흡이 금세 가빠졌다. 빈틈을 틈타고 침범한 그의 혀가 여린 입 안의 살을 샅샅이 훑으며 내부를 잠식했다.
그의 장대한 장딴지가 슬그머니 사이를 파고들며 각도를 틀자, 그녀는 다리를 붙일 수가 없었다. 붙이기는커녕 점차 더 방만하게 벌어지기만 했다.
단단한 허벅지가 사이나의 허벅지 안쪽의 여린 부분을 압박하는 감촉만으로 그녀는 이미 지나치게 야한 기분이 들어 어쩔 줄을 몰랐다.
“자, 잠깐! 갑자기, 음, 으응…….”
점점 더 차림새가 흐트러지고 있었지만 사이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치맛자락은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가고 드레스 상의는 어깨를 훤히 드러낼 정도로 끌어 내려졌다.
드러난 살결을 따라 콘스탄틴의 입술이 유영했다. 그 숨결과 손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꼬르륵.
한참 그의 입술이 그녀의 쇄골 쪽을 지분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나의 배가 크게 울렸다.
콘스탄틴은 그 소리에 멈칫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민망함으로 발개진 사이나의 얼굴을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흠…. 부인을 굶길 수는 없지요.”
“…….”
“이후는 밤에, 이어 할까요?”
아직도 숨결이 가빠서 얕게 숨을 몰아쉬던 사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콘스탄틴은 멀쩡했다. 숨결도 외양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져 이마로 드리워진 것이 그나마 좀 달라진 점이랄까.
사이나만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닌 모양으로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났다.
부끄러우면서도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싫어요!”
“싫어요?”
끌어 내려진 곳은 올리고 치맛자락은 내리며 사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단정한 그와는 달리 혼자만 잔뜩 방탕해 보이는 모양새라 너무 대조적이었다.
“사이나?”
사이나는 약간 토라져서 대답도 안 하고 매무새만 추슬렀다.
“화가 난 겁니까?”
“…….”
“내가 도중에 그만둬서?”
“아,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닌데 콘스탄틴이 그렇게 물으니 꼭 그런 것 같잖아!
민망해져서 더 억울해진 사이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내 노력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사이나, 화내지 말아요.”
“으잇!”
놀리는 거지? 놀리는 게 분명해.
‘그러고 보니 대체 왜 온 거람?’
나름 매섭게 노려보는 사이나의 눈매에 이 정도만 해야겠다 싶었는지, 콘스탄틴이 얼굴의 미소를 재빨리 수습하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식사를 하고, 나와 함께 잠깐 어디 좀 가지 않겠습니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가 방문 목적을 말했다.
“네? 어디요?”
“그대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긴, 보통 영지에 도착하면 가문의 원로들과 어른들을 뵙고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는 안 계신다고 듣긴 했지만 그 외의 어른들은 계신가 보다.
“아, 네. 알겠어요.”
마사지는 다음에 받아야겠네. 사이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식사, 같이 듭시다.”
“네.”
* * *
식사를 끝내고 사이나는 잠시 시간을 요청했다.
조금 더 격식 있는 차림새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편한 신발로 신도록 해요.”
“네?”
“좀 걸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어른이나 원로라도 콘스탄틴이 가주이고 공작인데 보통은 그쪽에서 성으로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굳이 토 달지 않고 사이나는 알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