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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122화 (122/233)

122화. 그녀의 침대 위 수컷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오늘부터 마님을 지근거리에서 담당하게 된 시녀, 다리엘 지그먼트입니다!”

“어, 그래. 안녕?”

인사도 우렁차고 표정도 우렁차다. 사이나는 갑자기 제 주변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시녀라니. 뭘 시켜야 하는 거지? 그저 옆에다 멀뚱멀뚱 세워둘 수는 없잖아?

갑자기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우선 인수인계받을 업무가 있는지 집사님께 확인받고 올게요, 마님.”

“응? 으응.”

사이나 스스로도 아직 공작부인의 업무를 시작하지 않아서 그다지 바쁜 일은 없었다. 북동 사교계에서 당장에 활동을 할 것도 아니니…….

그러다 보니 무슨 인수인계 받을 만한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해서 약간 불안해졌다.

“그리고 업무 환경 체크가 필요해서 이 근처를 좀 돌아다닐 수 있는데 오늘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응.”

“그 와중에도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으응? 알았어.”

뭘 안 시켜도 일을 잘 찾아서 하는 타입인가 보다. 다행이었다.

* * *

크림성에서의 시간은 무난했다.

낯선 곳인 데다 남편도 없었지만(아직 귀환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딱히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집사장이니 분명 업무량이 상당할 텐데도 불구하고 나디아가 자주 찾아와 사이나를 살피는 데다, 다리엘이 생각 이상으로 유능해서 약간 남아있던 불편함마저 모두 해소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생에 홀랜더 가에 들어가 적응할 때는 몇 년이 지나도 남의 집에서 사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역시 사람은 마음이 편해야 하는 건가 보다.

공작도 없는 공작성에서 이리 잘 지내지 않느냐 말이지!

“컁!”

…아, 물론 욜리가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콘스탄틴이 없는 동안 사이나는 욜리를 데려다가 제 침대 위에서 같이 재웠다.

“왜 울어, 욜리? 자러 갈까?”

오늘도 콘스탄틴의 소식 없이 하루가 저물었다.

쓸쓸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리 오래 나가 있는 것 자체가 그의 직위와는 맞지 않는 고생이니, 걱정도 살짝 되고 안쓰럽다는 생각도 좀 든다.

“공작님은 잘 계실까 모르겠네.”

“크앙!”

꼬리를 탁탁 치며 성깔을 부리던 욜리가 갑자기 또 시무룩해졌다.

“큐…….”

…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녀석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저 감정의 기복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음. 네가 말을 할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캬앙!”

또 저렇게 대뜸 화를 낸다.

감정 기복의 원인은 몰라도 지금 짜증을 부린다는 건 알겠거든?

“왜 또, 왜. 내가 뭘 잘못했어?”

욜리는 갑자기 몸을 뱅뱅 돌며 캬앙대더니, 대뜸 멈추고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큐우…….”

그리고는 터덜터덜 침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들어 침대 위로 올리라는 무언의 표현이다.

“그래, 그래. 자자. 얼른.”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겠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사이나는 욜리의 몸을 들어 침대 위에 올려주고는 가운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잘 자. 요 녀석.”

몸을 동그마니 말며 편한 자세를 취한 녀석의 코를 톡톡 작게 두들겨주며 인사했다.

그랬더니 녀석도 짧은 곰발로 사이나의 코를 대충 툭툭 두 번 누르고는 다시 몸을 말았다.

“헷. 귀여워.”

깔아뭉개지지 않을 정도로 녀석의 몸을 잔뜩 안아서 품에 품고 사이나는 잠에 들었다.

* * *

구름이 흘러가며 달빛을 가렸다가 드러냈다 하기를 반복하는 시간.

크림성 외벽 야간 순찰을 담당하고 있던 경비병은 성 바깥쪽을 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은데.’

그는 야간 순찰 조에 배정받은 지 며칠 안 된 신입이라 아직 일에 적응 중이었다.

사실 그는 기사치고는 꽤 심약한 편이라 빛이 약한 밤에는 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만 봐도 자꾸 흠칫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편이었다.

그는 마수는 차라리 무섭지 않은데 이상하게 이런 건 무서웠다.

스스스슥.

그의 심경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저 멀리서 스산한 무언가가 까맣게 일렁이며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서 경비병은 눈을 부릅떴다.

“음?”

등 뒤가 점점 싸해지는 기분에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어졌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각… 호각을 불어야 하나? 종을 쳐? 어쩌지?’

아무리 봐도 마수는 아닌 것 같은데 어두워서 정확하게 구분이 불가능했다. 확실하게 뭔지를 알 수 없으니 큰 소리로 누구를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는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조금이라도 똑바로 보기 위해 애썼다.

그 검은 얼룩 같은 것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져 시야에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그것은… 뭐랄까. 검은 안개덩어리에 감싸인 인형(人形)이었다.

검은 안개 덩어리에 감싸인 사람의 형태라니. 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그것은 점점 더 커지더니 성벽에 거의 다 다다랐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미친 듯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뭐, 뭐지?!”

놀란 경비병이 반사적으로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호각을 빼 입에 물었다.

검은 인형이 성벽에 부딪히기 직전, 그것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더니 성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듯이 솟구쳐 오르는 모습에 경비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떠억 벌렸다. 호각을 부는 것도 잊었다.

“으허어억!”

그 검은 안개 같은 것은 순식간에 성벽 위로 치솟아 허공으로 뜨더니 휘리릭 모양이 바뀌었다.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착지했을 때는 건장한 남자 하나와 검은 사자가 되어 있었다.

“시끄러우니 뿔 나팔은 불지 마라.”

이리되고 보니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가, 각하! 추, 충성!”

그랬다. 그는 콘스탄틴 크레이머 공작이었다.

수호령을 타는 자들에게 사실 성벽은 의미가 없었다. 마수 때문에 필요한 것뿐.

경비병은 신입이라 공작이 어둠을 타고 달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니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한밤중에 크레이머 공작이 급하게 홀로 귀환했다.

* * *

콘스탄틴은 먼지와 마수들의 피 내음을 지우기 위해 꼼꼼히 씻었다. 그리고 나서도 살갗의 체온을 최대한 올리기 위해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차피 금방 식을 테지만…….’

콘스탄틴이 바깥으로 나오자 소식을 전해 들은 나디아가 대기 중이었다. 시종이 급히 그녀를 깨운 모양이다.

“각하. 어찌 미리 언질도 없이…….”

“모레프를 타고 나만 먼저 왔다. 기사단은 내일에나 귀환할 것이니 미리 맞을 준비를 하도록.”

-아,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안 그러냐, 주인아? 또 언제 나갈 거냐? 흐흐. 기분 좋다, 좋아.

너나 즐거웠겠지.

사이나가 곁에 없자 그간 물 만난 듯 미친 듯이 떠들어대던 칼리고 때문에 콘스탄틴의 신경 줄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마님께 알릴까요?”

“아니야. 내가 직접 가지.”

-엑?! 오자마자 어딜 간다고? 주인아! 간만에 즐거워진 내 기분을 오자마자 망칠 셈이냐!

“이미 잠자리에 드셨는데요.”

“…그리로 가겠다.”

사이나의 도움이 절실했다. 도무지 내일까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디아의 눈이 잠깐 커졌으나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알겠다며 대답했다.

-이미 잠든 사람을 깨우는 거 아니다! 주인아, 너는 왜 이리 양심이 없느냐!

인간도 아닌 주제에 양심 운운하는 것이 가증스러워서 콘스탄틴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다들 깨울 것 없어. 나도 자러 갈 것이니.”

“예.”

“다만, 내일… 일찍 깨우러 올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슬쩍 나디아의 입가가 곡선을 그렸다가 돌아가는 사이, 콘스탄틴은 이미 성큼성큼 걸어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싫다! 가지 마라! 내가 조용히 있으마! 응? 귀족이 이리 사사로이 침실을 방문해도 되는 것이냐! 부인이 싫어하면 어쩌려고!

쓸데없이 입바른 소리를 하는 칼리고 때문에 순간 움찔했으나, 콘스탄틴은 애써 무시했다.

-주인아! 으윽. 벌써부터 냄새가 나! 부인이 아주 싫어할 것이다! 예의 없는 주인아!

“닥쳐라, 이 새끼야.”

-주인아! 너는 어찌 몇십 년을 함께 한 나보다 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거냐? 내가 말이 좀 많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낸 세월이… 중얼중얼…….

‘돌아버리겠군.’

딸깍.

역시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큰 소리가 나게끔 벌컥 문을 열어젖히지는 않았으나, 소리를 죽이지는 않은 채 콘스탄틴이 문을 열었다.

내심 잠귀가 밝아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주길 바라면서…….

-으아! 고약한 냄새! 오늘따라 더 진한 것 같다!

“큐?”

하지만 잠귀가 밝은 쪽은 따로 있었으니, 사이나가 아니라 사이나의 품 안에서 자고 있던 짐승 새끼였다.

-저거구나! 저게 범인이야. 냄새나는 짐승 새끼!

귀를 쫑긋대며 고개를 빼든 욜리가 콘스탄틴을 발견하고는 작게 불만을 표했다.

“캭.”

그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게 수컷이었던가?’

전에 사이나에게서 받아 살펴봤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수컷이었다.

사이나의 품 안이 제 자리라도 된다는 듯 당당하게 몸을 말고 있는 꼬락서니가 심히 거슬렸다.

얌전히 그녀 옆으로 스며들어 잠이나 자려고 했던 그의 심기가 방향을 틀었다.

콘스탄틴은 욜리의 등가죽을 홀랑 잡아들었다. 옷걸이에라도 걸린 것처럼 달랑거리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짧은 다리를 바동거리며 캭캭거렸다.

“크앙!”

콘스탄틴은 너른 침대 저쪽, 빈 공간으로 던지듯 욜리를 내려놓았다.

-그래! 얼른 쫓아버리자. 아니 성 바깥으로 갖다 버리자, 응?

그리고는 사이나의 옆자리, 침대 위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러면 내가 한 달, 아니 두 달 동안은 외출하자고 안 조르…….

모로 누워 있던 그녀를 조심스레 바로 눕힌 뒤 천천히 이마에 입술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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