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외곽의 낯선 집
저 멀리 기사단이 이미 대기 중인 것이 보였다.
‘여긴… 이런 긴장 상태가 일상이구나.’
사이나도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여기에선 명함도 내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왤까.
아마도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일이 많은 곳이라 그렇겠지.
“마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디아의 평온한 태도를 보니 그래도 좀 위안이 되었다.
위험한 상황이라면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약간이나마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적 소양으로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대다수의 고용인의 표정이 모두 비슷했다.
생각보다 그리 위험한 것은 아니거나, 익숙한 것일 테다. 그간 토벌을 유능하게 해온 영주를 향한 믿음이랄까.
‘나도 사서 걱정하지 말고, 상황을 좀 봐야겠네.’
걱정이 많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사이나는 그저 작은 힘일망정 다른 분야에나마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며 나디아를 따랐다.
* * *
그와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 자고 혼자 깨어났다.
드넓은 침대에서 오전 중에 깨어난 사이나는 약간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깨어나는 것도 근래 들어는 생소한 일이었다.
‘다친 데는 없겠지?’
자신은 성 내에서 너무 편하고 안전하게 자고 일어났는데, 그는 어디선가에서 열심히 마수를 잡고 있을 것이다.
사이나는 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토벌을 직접 본 적이 없다 보니 막연한 상상은 죄다 피가 낭자하고 위험천만한 장면들뿐이었다.
‘음…….’
멍하니 있으니 자꾸 심란해지고 걱정만 느는 것 같아 사이나는 할 일을 찾았다.
‘편지를 써야겠다.’
연락할 틈도 없이 황도를 떠나는 바람에 다들 당황했을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해준 것과 보낸 선물에 대해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으니 오죽할까.
‘감사와 사과를 겸한 편지를 쓰고 답례품도 정해야지.’
오늘 할 일은 정해진 셈이다.
‘아차, 황녀님도.’
황녀님껜 너무 좋은 선물을 받아서 답례품이 더 고민된다.
“이거, 황도 쪽으로 부쳐주세요.”
“네.”
그렇게 열심히 친필 서한을 쓰고 답례품을 정해서 보내는 데 이틀을 보냈다.
또다시 할 일이 없어진 사이나가 오늘은 뭘 할까 고민할 때였다.
“컁컁!”
할 일이 필요한 것은 욜리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오늘따라 어쩐지 더 부산을 떨어대는 녀석이었다.
“야, 야. 왜 이래? 응?”
“크아왕-!”
거의 방방 뛰다시피 방을 뛰어다니다가 이내 문짝을 긁어대는 것을 보니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뜻인 것 같다.
“나가자고?”
“컁!”
“그래. 나가서 좀 보자.”
그러고 보니 크림성의 구조도 아직 잘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머무는 공작부인의 방 근처나 겨우 파악했을 뿐, 전반적인 구조나 위치, 시설물 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얼마 전 나디아가 찾아와 며칠 휴식 뒤에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긴 했었지만, 그 전이라고 해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
“욜리! 천천히! 얌마! 어디 가니!!”
욜리는 아주 날을 잡았다는 듯이 빨빨 뛰며 움직여댔다.
개인지 늑대인지 확실히는 몰라도 개과인 것은 마찬가지여서인가. 간만에 아주 요란했다. 몸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부로 나와 마음껏 뛰어다니는 욜리의 모습을 보니 그간 너무 실내에만 가둬둔 것 같다는 자책이 들기도 했다.
“욜리, 좋아?”
“…….”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욜리가 멈췄다.
그녀가 물으면 컁, 하며 화답을 하던 평소 패턴과 다르게 뭔가 진지한 기색이다.
귀와 코를 쫑긋거리며 어딘가 멀리를 보는 것 같은 얼굴.
‘왜 저러는 걸까?’
저쪽에 뭔가 있는 걸까 싶어서 살펴보았지만, 사이나의 눈에는 잘 정돈된 산책로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 욜리?!”
그런데 갑자기 욜리가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쪼그만 녀석이 왜 이리 재빠른지. 사이나는 깜짝 놀라 녀석의 뒤를 쫓았다.
“얘? 자, 잠깐만!”
쪼로록. 산책로 사이로 사라진 녀석이 숲길에 동화되듯 사라졌다.
당황한 사이나는 멈춰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시야에서 없어졌던 녀석이 살랑거리는 꼬리로 다시 자신의 모습을 알렸고, 사이나는 열심히 욜리의 뒤를 쫓았다.
양옆 수풀 사이로 사라져 버리면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나마 길을 따라서 가는 통에 계속 따라갈 수 있었다.
“욜리! 어디 가는 거야? 이리 와!”
그래도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뭔가 목적성이 있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어디론가 향하는 욜리는 사이나가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위치상 크림성 후원 너머의 작은 숲 안일 텐데, 너른 공터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높은 나무들이 가리던 그늘이 사라지며 햇살이 가득 들어와 따스한 느낌이 드는 너른 장소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장 정리된 텃밭도 있고, 소담한 꽃밭도 있었다.
어떻게 봐도 누군가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 같은 곳이었다.
여긴 대체 뭐지?
“…어. 욜리! 이리 와!”
갑자기 침입자가 된 상황을 깨닫고 사이나가 다급하게 욜리에게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어머나, 처음 보는 아가로구나.”
녀석은 쪼르르 가더니 결국 집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만나고야 말았다.
“얘야, 어디서 왔니?”
“컁!”
사고 치는 데에는 아무튼 일등이다. 욜리는 저가 침입한 주제에 집주인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아휴…….’
사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욜리!”
성큼 다가가 욜리를 들어 품에 안았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이렇게 들어와 죄송합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붉은 벽돌집의 주인은 나이가 지긋하고 단아한 느낌의 여성이었다.
‘…누굴까?’
어딘가 묘한 느낌을 풍기는 여인이 사이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시오? 고운 아가씨가 어쩌다 이리 오셨소?”
“산책을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이런 곳에 집이 있을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니오. 인적 드문 곳에 우연일망정 이리 방문을 해주니 고맙지요.”
여인은 진심인 듯 기쁘게 웃으며 사이나를 향해 손짓했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시오, 응?”
“네? 네. 감사합니다.”
얼결에 낯선 여인과 티 타임을 가지게 된 상황이지만, 어색하기는 해도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고 왠지 그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욜리가 사고뭉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 행동을 할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여인의 안색이 파리한 것이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걸까?’
최소한 저 집 안에 하녀라도 한 명 있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 떠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와, 아늑하네요.”
붉은 벽돌집은 크림성에 비하면 아주 작았지만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꽤 큰 크기였고, 내부 역시 매우 신경 써서 꾸며진 티가 역력했다.
보기와 다르게 내부 물품들이 상당히 고급품이었고, 주거자의 성향을 반영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로 조성되어 있었다.
여인의 안색을 생각하면, 마치 요양차 머무르고 있는 장소처럼 보일 정도다.
‘…콘스탄틴도 아는 분일까?’
그의 영지 내에서 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알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의 영지민이나 고용인 수만 해도 얼마인데 다 아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가도 이 주거지의 위치를 생각하면 반드시 알아야 싶기도 했다.
아무나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위치이면서도 분명 크림성의 외성이 아닌 내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 제가 할게요.”
“아니오. 손님이신데, 내가 하는 게 맞지요.”
“아니에요. 이래 봬도 제가 차를 마실 만하게 끓인답니다. 이리 주세요.”
남의 집에서 차를 얻어 마시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여인의 앙상한 손을 보니 도무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가 힘들었다.
표정만은 매우 밝아서 정말로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얼굴이었지만, 사이나는 기꺼이 포트를 넘겨받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방식의 다구 화로네.’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숯불 화로다.
“이게 쓰기 힘들 터인데….”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사이나에게는 오히려 익숙했다.
홀랜더가는 신형 화로 같은 것을 사는 데에 돈을 절대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식 화로에서 차를 우려야 했었다.
숯불조차도 넉넉지 않아서 필요할 때만 쓰고 빼느라 고생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니 어찌 살았나 싶다.’
어쨌든 당시의 경험 덕분에 사이나는 능숙하게 차를 우려낼 수 있었다.
구형 화로는 물의 온도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오랜 경험이 없으면 차를 맛있게 우려 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사이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젊은 아가씨가 어찌 이리 잘하시오? 맛도 있소.”
여인은 찬찬히 차를 마시며 해맑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한 잔 더 따라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찻잔을 다시 채워준 뒤, 사이나는 자기 몫의 잔을 들어 마셨다.
포트 옆에 놓여 있던 찻잎을 그냥 우렸는데 평소 많이 접해본 차는 아니었다. 추측하기로 약차처럼 마시는 용도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 도련님께서 이리 내린 차를 참 좋아하셨는데…….”
음? 도련님?
“지금은 누가 차를 내려드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차를 마시다 말고 아련한 표정을 짓는 여인은 과거의 기억 중 한 장면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 듯했다.
“아가씨!”
그러다가 여인이 갑자기 반색하며 사이나를 불렀다.
“네?”
“아가씨의 차 내리는 솜씨가 심상치 않소만, 혹시 우리 도련님께 이리 내려 주실 수 있겠소?”
“…도련님이요?”
도련님이라니, 누굴 말하는 걸까.
“컁!”
의문이 들어 물으려던 참에 욜리가 방향을 틀더니 문 쪽을 향해 크게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