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깜짝 선물
“여기. 이 사람은 첫 장이 아니라 뒤로 옮겨 주세요. 행정부에서 처리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네요.”
엘리자베스 발데즈의 이름이 첫 장 목록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어울렸던 기록으로 보아 당연히 그렇게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예. 알겠습니다.”
로이터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하나 더.”
“예. 말씀하십시오.”
뒷장이기는 해도 조지 홀랜더가 목록에 있었다.
‘뭘, 왜 보낸 거야.’
확인하는 것조차 짜증 난다. 이름을 읽는 것도 싫다.
‘아니, 이게 뭐야? 진주 귀걸이?’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내용물도 이상하다.
진주는 눈물을 의미해서 절대로 새 신부에게 선물하지 않는 품목 중 하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선물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크기로 보아 진주 중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로 산 것 같은데……. 홀랜더가의 재정 상태로는 이것도 겨우 샀을 테지만 말이다.
“이 사람. 받지도 말고 돌려보내세요.”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도 싫어 사이나는 그 목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진주라니, 이 부분은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죄송합니다.”
로이터는 부적절한 선물 품목을 미처 걸러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사과했다.
사이나가 선물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일방적으로 돌려보내라고 하면 괜한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다 싶어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에요. 결혼식 준비에 피로연까지 일이 많으셨을 텐데, 선물까지 정리해 주셨네요. 제가 감사드려야죠.”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로이터가 물러가고 사이나는 선물을 직접 살폈다.
개인적인 선물만 정리해서 올린 것이라고 하는데도 양이 상당했다.
사이나의 인간관계라고 해 보아야, 좁기 그지없어서 사실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다.
“큐….”
이것저것 뜯어서 살펴보고 있는데 욜리가 나타났다.
털레털레 걸어오는 폼이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욜리, 왔어?”
또 그녀에게 코를 들이밀고 몇 번 킁킁대더니 냄새가 별로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요즘 어째 그녀를 볼 때마다 코를 찡그리는 탓에 뭔가 안 좋은 냄새가 배었나 싶어 자신도 여기저기 제 몸에 코를 대 볼 정도다.
여전히 무슨 냄새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음, 욜리야. 우리 같이 선물이나 뜯어볼까나?”
꼬리가 엇박자로 탁탁, 흔들리는 것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사이나가 선물 상자를 열 때마다 흘깃거리는 것이 완전히 흥미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유. 까다로운 녀석 같으니…….’
마침 손에 닿은 무더기에 표기된 인장이 익숙했다. 드보프가에서 보낸 선물들이다.
이미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받았는데, 뭘 또 이리 보냈을까.
‘혹시 기죽지 마라, 그런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렇게 널 생각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이쪽에 보여주기 위해서 이리 잔뜩 보낸 것 같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크레이머가에는 사이나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도 대비하고 싶은 것이 혈육의 마음이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하게 된 결혼이라 사실 뭘 더 고민해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리되니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약간 가슴이 울컥했다.
“난, 참…. 그저 어떻게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만 했지, 기댈 줄을 몰랐던 것 같아. 가족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닌데 말이야.”
“키잉….”
혼자 중얼거리듯 한탄한 건데, 네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욜리를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심정을 막 공감해주는 느낌이라서 엄청 귀여웠다.
“욜리잉~”
으헤헷. 웃으며 욜리를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안아 주자, 녀석이 바동거리며 낑낑댔다. 그게 또 귀여워 혼자 키득대다가 압사 직전에야 녀석을 놓아주었다.
“큐앙!”
또 갇힐까 무서운지 후다닥 거리를 벌리는 녀석을 보고 웃다가, 사이나는 다시 선물 상자를 까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무심코.
“헉!”
누가 보낸 선물인지 미리 알고 열었더라면 조심히 열었을 텐데, 방심해버렸다.
사이나는 너무 당황하여 거의 우당탕 소리를 내며 상자 뚜껑을 닫았다.
대체 뭔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다가온 욜리가 곰발로 톡톡 열어 보려는 것을 보고 사이나는 상자를 후다닥 들어 다른 쪽으로 치워버렸다.
“안 돼! 너는 보면 안 되는 거야.”
“…컁?”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화르르 붉어진 것이 분명한 자신의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이나는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캬앙?”
욜리는 곰발을 허공에 헛발질을 해대며 나도 보여다오, 당장 내놔라, 의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무시했다.
사이나는 절대로 욜리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높이에 상자를 올려놓고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꼼꼼히 다시 잘 닫았다.
닫으며 보니 겉 포장된 리본 사이에 편지가 끼워져 있어 얼른 열어 보았다.
‘대체 왜 이런 걸 보낸…….’
[사야, 남편분과 뜨거운 밤을….]
탁! 사이나는 편지 역시 읽다가 말고 얼른 덮어버렸다.
“정말 이 언니는…….”
역시 키얼스틴이다.
윌레프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샀을 것 같은 속옷 세트가 색깔별로 들어 있었다.
도무지 본래 용도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형태, 입으나 마나 한 속옷이랄까.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사이나는 다른 물품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키얼스틴의 것처럼 짓궂은 선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세이지, 키얼스틴, 에비앙, 플로리아……. 잘 기억 해두고.’
답례품과 편지를 보내야 하니 리스트를 잘 정리했다.
‘음, 황녀님께도 선물이 왔네?’
크레이머 공작 쪽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사이나 쪽으로 선물을 보냈다.
아니, 양쪽으로 다 보냈는지도 모르지만 사이나 개인에게 따로 챙겨서 보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였다.
저번부터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보여주시는 것 같아서 약간 황송한 기분이 들 정도다.
“우와.”
게다가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아니, 마음에 들다 못해 끝내주는 선물.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4대 수호령의 미니어처 세트라니!
직접 보고 만든 것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조각이 입을 떡 벌어지게 할 정도였다.
“너무 예쁘잖아?”
누가 봐도 장인이 만들었을 것 같은 고가품이다.
가격을 떠나서 어떻게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보내주셨을까.
사이나는 입을 떡 벌리고 웃으며 한참 동안 그 장식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욜리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장식품을 가리며 앞에서 얼쩡댔다.
“…욜리? 잠깐 비켜 봐.”
“큥~”
“아니, 이러면 깨져. 이리 나와.”
“크앙!”
녀석을 잡아서 안아 올리자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꼬리로 사이나를 탁탁 후려친다. 아프다기보다는 코가 간지러워져서 재채기를 유발하는 공격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컁!”
“선물 그만 보라고? 어차피 거의 다 봤어.”
“크앙! 크아앙!”
…뭔지 모르겠다. 사이나는 그저 욜리를 내려놓고 황녀님의 선물을 조심스럽게 다시 잘 쌌다.
‘내 침실에 장식해 둬야지.’
창을 통해 햇살이 들어오면 크리스털이 반사되어서 반짝반짝 빛나겠지. 그러면 분명 더 예쁠 것이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사이나는 씨익 웃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사이나.”
아직 채 뜨지 않은 눈가에 서늘한 입술이 내려와 앉았다. 짧게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관자놀이로 옮겨갔다.
“콘스탄틴……?”
아직 정신이 채 들지 않은 사이나가 몽롱하게 대답했다.
“깨워서 미안합니다.”
“음…. 무슨 일, 있어요?”
느릿느릿 대답하는 사이나를 콘스탄틴이 인내심 있게 받아 대답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본론은 매우 다급한 내용이었다.
“영지에 일이 터져서,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잠이 확 깨는 기분이다.
“마수 문제가 터져서 오래 지체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도에서 지인들과 함께할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었는데 미안하군요.”
“아…. 마수 때문인데 제게 미안하실 건 아니죠. 얼른 준비할게요.”
“여러모로 서운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급한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황도에 올 수 있을 겁니다.”
“네.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할게요.”
“이해해 주어 고맙습니다.”
콘스탄틴은 사이나의 이마에 가볍게 베이비 키스를 주고는 금세 일어섰다.
“아 저기-”
“……?”
“욜리 데려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고맙다는 표시로 사이나는 그를 향해 웃은 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런데 내리는 순간 콘스탄틴이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읏.”
아직 양치도 하지 않은 아침이라 입을 열지 않으려 했으나 집요하게 입구를 파고드는 혀에 사이나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으응.”
깊게 들어온 혀가 한참 동안 그녀의 입 안을 점유하다가 빠져나갔다. 동그랗게 빨린 아랫입술이 툭, 튕겨졌다.
“다른 놈에게는 그렇게 웃어주지 말아요.”
“…네?”
“진심입니다.”
콘스탄틴은 영문을 모를 소리를 남기고는 다시 걸음을 돌려 나갔다. 성큼 걷는 뒷모습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다른 놈에게는 웃어주지 말라고…?’
사이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유능한 고용인들이 이미 그녀의 짐을 다 추려서 싸놓은 상태였다.
일상용품은 거의 없었다. 의복이나 필요한 용품은 영지에 이미 다 준비가 된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꼭 가져가야 하는 것들만 챙긴 참이다. 그 안에는 시종을 챙겨 찾아온 고서적과 사이나가 전생에 몇 년간 정리해둔 아를어 문법표와 참고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떠나는구나….’
심장이 약간 두근거렸다.
북동령은 어떤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