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욜리는 슬프다
당시 사이나는 그런 부분에 상당히 무심하고 또 무지했다.
“같은 데서 맞추면서 일일이 살펴주고 싶은데 샤를리즈 부티크는 가격이 부담되니까 네 부티크를 옮기면 안 되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사이나를 옮기지 말고, 그 애의 것을 샤를리즈 부티크에서 맞추라고 했지. 네게 좋은 걸 주고 싶었으니까.”
“…….”
그럼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여전히 걸렸다. 아니, 잠깐.
“……난, 데뷔 이전에는 마담 샤를리즈가 얼마나 유명한지도 몰랐어. 근데 그 애가 거길 내가 다니는 부티크라고 했다고?”
맞아. 그랬다.
그녀는 사교 활동을 잘 안 하다 보니 불편하기만 한 화려한 드레스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상단을 통해 계절마다 알아서 채워주는 드레스를 적당히 입었다.
디자인보다는 입었을 때 편안함을 더 중시하던 것이 과거의 그녀였다.
“…그건, 나도 말한 적 없는데?”
세이지가 미심쩍다는 듯 덧붙였다.
“…….”
설마, 첫 만남이나 관계의 모든 게 다 의도된 거였나?
그렇게까지는 생각한 적 없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암튼… 앞으로는 내게 이런 거, 비밀로 하지 마.”
“…알았다.”
뭔가 상황은 넘겼는데 너무 창피했다.
콘스탄틴이 친구 하나 없이 사회성이 바닥을 기던 시절의 과거를 알게 되어버렸다.
민망해서 슬쩍 그를 살피자, 콘스탄틴이 아주 작게 웃었다.
“사야. 그대가 데뷔하지 않았다면, 내게는 그대를 만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 이게 그렇게 되나?
“이리되니 그 발데즈 영애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그건…….”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 이상, 친구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대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딱히 미안한 마음은 없었지만, 그가 이리 말해주니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대에게는 진짜 친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데뷔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는 전생의 엘리자베스에 대해 말한 거였지만, 그의 말을 듣자 확실히 위로가 되었다.
“네. 그러네요.”
앞으로 무슨 접점이 또 있겠어. 어차피 절교 상태나 마찬가진데.
그렇게 생각하자 엘리자베스에게 기분 나빠 하는 시간조차도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래.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 이미 안 보기로 한 인연.’
나중에 돌아보니 엘리자베스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드보프가에 온 김에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모를 만나는 일이다.
“아가씨!”
“유모!”
콘스탄틴을 응접실에 두고 혼자만 나왔다. 장인어른과 처남의 공격을 받으며 나름 불편한 대화를 나눠야겠지만, 그 정도야 알아서 하겠지.
“아니, 이제 아가씨가 아니시죠. 뭐라고 부른담. 공작부인인가요?”
“으… 유모까지 그러지 마.”
“그래도 이제 엄연히 결혼까지 하신 몸이신데… 아, 첫날밤은 어떠셨어요? 아프지는 않으셨어요?”
“…….”
유모는 유모다.
다른 가족들은 전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화제를 거침없이 꺼내 들었다. 근데 얼굴이 빨개진 건 사이나였다.
“아이참, 얼른 말씀해 보셔요.”
“…괜찮았어.”
“어떻게 괜찮았어요? 참을 만해서 괜찮았어요, 아니면 각하께서 훌륭하셔서 괜찮았어요?”
“…….”
“제가 그 얘긴 들었는데. 각하께서 아가씨를 일주일 내내 안 내보내셨다고. 정말이어요? 혹시 아파서 내내 누워계셨던 건 아니죠? 그분이 덩치도 크셔서 제가 걱정이…….”
“유, 유모!”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사이나는 유모의 거침없는 말을 막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
“네?”
“유모, 나 따라올 건지.”
전에는 못 데리고 갔지만 이번에는 가능하니까.
물론 유모가 원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드보프가에 있고 싶으면 그냥 여기 있어도 되고. 내가 자주 놀러 오면 되니까.”
“무슨 소리세요! 당연히 아가씨는 제가 살펴 드려야죠. 아차, 또 아가씨라고 했네.”
“근데 내가 크레이머 영지에 갈 때는 너무 멀어서 같이 못 가니까, 그럴 바에는 그냥 드보프가에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사이나는 이런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로서도 크레이머 영지에 당장 언제부터 언제까지 머무르는지 잘 모르다 보니 애매했다.
“나도 영지에 얼마나 있게 될지 모르니까 당장 옮기지는 말고. 그럼 차차 결정하도록 해.”
“그럴까요?”
“응.”
“알았어요.”
그리고 한 가지 볼일이 더 있었다.
“욜리는?”
“아, 맞다. 그 녀석 얼른 보러 가셔요.”
“왜?”
“어휴. 요즘 너무 힘이 없어서……. 아가씨를 못 봐서 그런 거 같아요.”
그동안 내내 혼자 있었을 거다.
사이나는 새삼 걱정이 들어 얼른 욜리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욜리는 방 안에 있었다.
다만… 창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보며 우수에 찬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 욜리?”
“큥?!”
욜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큐웅…….”
그러더니 어딘가 눈물 어린 눈망울을 하고는 사이나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욜리에게 다가가 녀석을 안아 올렸다. 그랬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는 ‘크흑.’ 마치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욜리, 너 울어?”
“큐…….”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이럴까.
결혼 때문에 방치해 두고 못 봐서 그런 걸까?
“이제 바쁜 일정은 끝났어. 욜리랑 같이 놀 수 있다구?”
“…큐…….”
…이게 아닌가.
“왜 슬퍼? 이 누나가 결혼한 게 슬퍼?”
“캬앙!”
욜리가 갑자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맞는다는 건지 틀리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음.”
크르륵인지 크흐흑인지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잘은 모르지만 위로를 해야 하는 타이밍인 것 같아 욜리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키우웅……. 큐웅…….”
어느 정도 기분이 좀 가라앉은 것 같기에 사이나는 일부러 발랄한 말투로 분위기를 쇄신시켜 보려 했다.
“자, 이제 누나랑 새집으로 이사 가자?”
“크아앙! 크앙!”
근데 욜리는 갑자기 또 광분을 하더니, 또 ‘큐웅….’ 하며 울먹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줄 모르겠다.
어쨌든 거부를 하지는 않으니 사이나는 욜리를 잘 챙긴 뒤 다시 콘스탄틴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가족과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크레이머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크레이머가에서의 생활은 초야 즈음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밤이면 지나치리만큼 그녀를 탐해오는 탓에 사이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요원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반복이 되자 나름 습관이 되는지 조금씩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일찍이라고 해도 정오 즈음이지만 말이다.
“마님.”
로이터가 찾아왔다.
그래도 정오에 일어나니 로이터가 찾아오기도 하지 않는가.
‘마님이라니……. 당연한 호칭인데도 뭔가 어색하네.’
전에도 이리 불렸던 적은 있는데 느낌이 다르다.
홀랜더가에서 불렸던 ‘마님’이라는 호칭은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혹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의무를 행할 자.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로이터가 불러주는 ‘마님’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 마음가짐의 차이겠지만…….’
사이나는 대답했다.
“네.”
“마님. 말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지금도 편해요.”
“허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크레이머 공작가의 총집사장이시잖아요.”
크레이머 정도 되는 가문의 총집사장이라는 직위는 어지간한 하위 귀족에 비할 게 아니었다.
공작가 정도 되면 가문 내에 귀속된 작위가 여러 개 있기 마련이라 남작, 자작 정도의 작위를 자체적으로 하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공작가의 총집사장이라면 최소 남작쯤은 될 테지만 남작이라고 불리기보다 총집사장이라고 불린다. 그 말은 어지간한 남작위보다 크레이머가의 총집사장을 더 높게 쳐준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존중의 의미라고 생각해 주세요.”
원래대로라면 총집사장이 본령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데 공작가의 특수성 때문에 타운 하우스에서 근무한다고 들었다.
영주인 콘스탄틴이 필수적인 일정이 아니면 거의 황도에 오지 않다 보니 오히려 총집사장이 이곳에 머무르며 황가와 공작가 사이를 조율하며 필요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로이터는 잠시 목을 흠흠 다듬더니, 사이나 앞에 뭔가 길게 쓰인 목록을 내려놓았다.
“결혼 축하 선물로 들어온 물품들을 정리했습니다. 중요도에 따라 정리하였고, 첫 장은 마님 지인들의 선물로 보이는 것들이라 따로 분리하여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옆방에 옮겨 두었으니 직접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
“두 번째 장부터는 관례에 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입니다. 품목과 보낸 사람, 간략한 관계 등을 요약해 두었으니 살펴보시고 필요한 것이 있거나 직접 보고 싶은 품목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와…. 세심하고 깔끔한 목록.
딱 봐도 수백 개가 훌쩍 넘는 목록이 분류별로 눈에 딱 들어오게 정리되어 있었다.
“네, 확인해 볼게요.”
“예.”
사이나는 간략하게 할 말을 끝내고 나가려는 로이터를 다시 불러 세웠다.
“로이터.”
“예?”
“바쁠 텐데 신경 써 주어 고마워요. 정리 상태도 너무 훌륭하네요. 한눈에 딱 보기 쉽고.”
“…별말씀을.”
크레이머가 입장에서 사이나는 아직 낯선 존재였다. 습성이나 인간관계 등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을 텐데, 이 정도로 목록이 깔끔하다는 것이 바로 로이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말이 나온 김에 사이나는 바로 가 보기로 했다. 첫 장에 있는 목록들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하고 친필로 감사 편지와 답례품을 보내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첫 번째 장 이외의 분들에게는 행정부에서 관례대로 감사 편지와 답례품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살펴보시고 혹시 직접 처리하고 싶으신 분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네. 음…. 없는 것 같네요. 아.”
“……?”
반대의 항목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