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처음부터 의도된 만남이었나?
다음 날 마차 안.
사이나는 크레이머 타운 하우스에서 델본에 있는 드보프 저까지 이동하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꾸벅꾸벅 조는 그녀를 안아 그가 품에 안고는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해주었다. 너른 품에 기대 단단한 목덜미에 이마를 박고 눈을 감자 아주 편했다.
다소간 흔들리는 마차의 움직임도 그가 중화시켜 주자, 그녀는 정말 푸욱 잠에 들었다.
“사야. 도착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깨우는 소리에 스르르 깨어났다. 깜빡대다 올라간 눈동자에 완전한 초점이 깃들 때까지 얼마간이 더 필요했다.
“많이 피곤해요?”
“…음. 아니에요.”
작게 하암, 하품을 하며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자신의 포즈가 새삼 의식되었다.
“아, 내려갈게요. 무겁지 않았어요?”
그냥 어깨에 조금 기대며 잠들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자세가 된 거지?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그녀도 성인인데 매번 이리 인형처럼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려온 사이나는 옷매무새를 살피고는 그를 따라 마차 밖으로 나섰다.
“…….”
사이나는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얼마 전까지 ‘우리 집’이었던 저택인데…… 올려다보는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현실 같지 않은 일주일을 보내서인가. 아니면…….
“…가족이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찾아오도록 해요.”
그녀의 묘한 표정이 결혼 후 느끼는 그리움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콘스탄틴이 말했다.
전생에 결혼했을 때는 가족과 강제로 단절된 기분이었다. 사이나 스스로도 면구해서 찾지 못했고, 남편이 극도로 싫어해서 더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콘스탄틴이 이리 말해주자, 말만으로도 기뻤다. 물론 콘스탄틴은 말만 하는 남자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라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1년의 반은 황도에서 보내게 해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에도 수락했으니.’
사이나는 콘스탄틴을 향해 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 미소에 그가 걸음을 멈추며 굳었으나, 해맑게 입구를 향해 걷던 사이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입구에 다다라 우즈와 마주쳤을 땐 이미 콘스탄틴이 등 뒤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아가…, 흠. 크레이머 공작부인. 어서 오십시오.”
우즈가 익숙하게 아가씨라고 불렀다가 콘스탄틴을 보고 제 실수를 깨달았는지 얼른 정정했다.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이 낯설기도 하고 뭔가 지나치게 무거워서 사이나는 잠시 몸을 굳혔다.
“크레이머 공작 각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께서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알겠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안쪽을 향하는 콘스탄틴을 올려다보자니, 새삼 깨닫게 된다.
정말 이 남자와 결혼했다고.
“공작부인이라니… 절 부르는 것 같지 않아서 좀 이상해요.”
응접실에 앉으며 사이나가 말했다.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그가 슬쩍 웃으며 사이나의 볼을 쓸었다.
익숙한 접촉인데 드보프 저에서 이러니 뭔가 눈치가 보여 사이나가 눈을 굴렸다.
“그대가 내 부인, 이니까요.”
사이나만 부끄러운 건가. 콘스탄틴은 여전히 걸리는 것 없이 그녀를 만졌다. 심지어 사이나의 관자놀이에 짧게 입술을 찍기까지 했다.
“흠흠.”
그런데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사이나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세이지가 있었다.
“신혼이라지만, 장소를 좀 가려주시죠. 각하.”
면구하면서도 불만 어린 말투로 세이지가 말했다.
가벼운 접촉이지만 누군가(특히 가족이) 보았다는 생각이 들자 매우 민망했다.
“자네의 여동생이 그토록 어여쁜 것을 어쩌겠나.”
“…….”
콘스탄틴까지 왜 이러는 걸까. 이 집의 수맥이 이상한 건가.
“사야가 어여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자제는 하셔야지요.”
“노력하겠네.”
주거니 받거니 하는 팔불출 같은 반응 덕분에 부끄러움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사야!”
그때 드보프 백작이 사이나의 이름을 부르며 응접실로 급하게 들어왔다.
“아, 각하. 오셨소이까.”
백작은 누가 봐도 대충인 인사를 공작에게 남기고는 이산가족과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에게 달려와 손을 붙들었다.
“아, 아버지.”
“또, 또, 아버지라고…. 흐흑. 결혼했다고 그러는 게니? 응?”
“…아빠.”
울상이었던 백작이 금세 헤벌쭉 웃었다.
“잘, 잘 지냈고? 왜 이리 살이 빠졌지? 새 저택의 요리사가 입맛이 안 맞는 건 아니냐? 이 집 요리장을 보내줄까?”
“네? 아, 아니에요. 잘 먹고 있어요.”
살이 빠졌다면 음식보다는 다른 이유겠지.
하지만 아버지께 말할 만한 사정은 절대 아닌지라 사이나는 그저 활짝 웃으며 다 좋다고 말했다.
“내 딸이… 이렇게 일찍 시집을 가다니…….”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또 황자가 어쩌고 하는 말과 욕설이 얼핏 들린 것 같다.
“하, 하하…. 공작님이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몰라요. 여기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자주 놀러 올게요, 아빠.”
사이나는 식겁해서 또 열심히 콘스탄틴을 두둔했다.
대체 이런 가족을 전생에는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밀어두고 살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들은 내 편이 되어 주었을 텐데……. 혼자 지레 겁먹고 외면하고 단절해버렸다.
가족들이 분명 날 창피하게 생각해서 아는 척도 하기 싫어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집안의 수치가 되어 버렸으니 서로 모른 척 사는 것이 되레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그리 생각했었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그때도 남편이었던 조지 홀랜더와 드보프가를 찾았었다.
본래 일주일간의 결혼 피로연이 끝나면 여자 측 집안에 함께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예법이니까.
그때 그녀는 배려 없는 첫날밤에 크게 몸이 상해 사흘이 넘게 앓다가 일어났고, 홀랜더가의 배척이 심한 분위기에 눌려 매우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후, 이 집 따님 때문에 제 사회적 체면이 상당히 손상된 것 아시죠?’
그딴 소리로 포문을 연 조지 홀랜더는 입을 여는 족족 가족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그 옆에서 사이나는 죄인 같은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가족에게 사죄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 때문에 속을 썩은 가족들인데, 조지 홀랜더는 입을 열 때마다 그녀를 깎아내리며 뭔가를 바라는 투의 말을 하고는 했으니, 차라리 보지 않고 사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 유리야.’
그때의 그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죄보다 그녀의 행복을 더 바랐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수치는 조지 홀랜더와의 결혼 생활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웠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사이나?”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아까 세이지의 투덜거림에 노력하겠다고 대답한 것이 무색하게도, 콘스탄틴이 그녀의 한쪽 볼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며 사이나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 눈 안에 불안한 기색이 비쳤다.
“괜찮니?”
“무슨 일이 있느냐?”
이런.
또 다른 의미로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아니에요. 그… 결혼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그래요. 이 집에서 여태 살았는데, 이런 생각도 들고.”
사이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음을 어필했다.
“그런데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잠깐 나갈까, 응?”
세이지가 콘스탄틴을 바라보는 표정이 무슨 파렴치한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또다시 변했다.
‘내 표정이 그리 심각했나.’
어떻게 이것을 수습하지. 잠시 고민하던 사이나는 그전에 미뤄두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실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본래 우즈를 불러 몰래 물어보려고 했던 거지만, 당장 이 분위기를 수습할 다른 화제가 생각이 나질 않아 별수 없었다.
“그… 엘리자베스요.”
“응?”
“발데즈 영애? 갑자기 그 영애는 왜?”
“드보프가에서 그 애의 드레스며 장신구 비용을 왜 여태 대온 거죠?”
“…….”
“…….”
사이나의 물음에 백작과 세이지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역시.’
대략 이유를 추측은 했었는데, 정말 그런 거였을 줄이야.
돈으로 산 관계였다니…….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 애가 친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구요!”
순수한 도움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 전생엔.
“차라리 데뷔를 안 하는 게 나았을 거예요.”
돈으로 산 친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공부벌레라고 수군대기야 했겠지만 공부벌레가 뭐 어떤가. 조지 홀랜더와 결혼하는 것보다야 백배는 나았을 것이다.
새삼 분노가 치솟아 씩씩거리자 백작과 세이지가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게 아니라…….”
“후, 사야. 발데즈 영애가 먼저 제안한 거야.”
“…뭐?”
“네가 데뷔탕트를 할 생각은 있는데 드레스며 유행, 이런 것들을 잘 몰라 걱정한다고 했어.”
엘리자베스 발데즈가 먼저… 제안했다고? 그럼 나 몰래 오라버니를 찾아간 적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데뷔탕트를 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고?
그건 정말 교묘한 표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설득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이 없었으니까.
처음 그녀와의 교접점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것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먼저 접근했고, 적극적으로 다가와 친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동갑이니까 함께 데뷔하는 게 어떠냐고 했었는데…….
“근데 그 애가 그런 부분은 자신이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하기에…….”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러라고 하고 고맙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후에 그 애가 한 번 더 찾아왔어. 자기가 드레스를 맞춘 부티크와 사이나, 네 부티크가 달라서 도와주기가 힘들다고.”
부티크 문제를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상의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