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보답은 이곳에 해주시죠
짓궂게 받아칠 거라 예상했는데, 무슨 약점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창백한 표정으로 굳었다.
“…콘스탄틴?”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 같이 벗고 들어가 주길 원했던 겁니까? 미처 그대의 바람을 눈치채지 못…….”
곧이라도 옷을 벗을 것처럼 닫힌 목 부분의 옷자락에 손을 가져가는 콘스탄틴의 모습을 보며 사이나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아니, 아니에요!”
느른하게 입술을 휘며 정말이냐고 묻는 그에게 사이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오랜만에 둘이 차나 한잔하겠습니까?”
“차요?”
“목욕 이후에요.”
“아, 네. 좋아요.”
“알겠습니다. 준비해 둘 테니 씻고 나와요.”
콘스탄틴은 사이나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술을 찍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주인님께서 너무 다정하셔요.”
“근데 이건 좀…… 너무하셨네요.”
목욕 수발을 들던 하녀들이 사이나의 얼룩덜룩한 몸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봐도 좀 상태가 심각하지만… 어쩌랴. 그나마 옷으로 가리면 안 보이는 부위들이니 다행이다.
사이나는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물에 앉아 가만히 있으려니 잡생각이 찾아들었다.
“…….”
아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았나?
한때는 결벽증이라고 생각했던 각잡힐 정도로 단정한 그의 차림새.
하지만 그가 타인과의 접촉을 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옷을 그리 입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근데 나한테는 굉장히 거리낌 없이 만져오잖아?’
그가 날 만지는 건 괜찮고, 내가 만지는 건 싫은 건가?
아니, 먼저 손잡아 달라고 한 게 누군데?
그때의 그는 절박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녀의 접촉을 원했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 문양은 뭐였을까?’
초야 다음 날 낮에 욕실에서 일을 치렀을 때의 기억이 솟아올랐다.
그때 그녀는 홀딱 다 벗었지만, 그는 몸의 한 부위만 빼면 평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약을 발라주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달려든 그를 받아내며 사이나는 팔을 휘저었었다. 잡을 것이 필요해 그녀의 얼굴 옆을 짚고 있던 그의 건장한 팔뚝을 붙잡았다.
욕조 안에 있던 그녀를 꺼내면서 소맷자락이 물에 젖어 잡은 옷자락에서 물기가 새어나왔다.
밀려드는 감각에 정신이 없어 그 젖은 소매의 물기를 죄다 짜내기라도 할 듯이 붙잡았다.
그러다 젖은 옷자락이 밀려 팔뚝 위로 엉겨 붙었다. 평소에 꽁꽁 싸매고 있던 맨살이 팔목 위로 조금 드러났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그의 팔뚝에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있었다.
기사임에도 도통 해를 본적이 없는 것처럼 하얀 피부라 그런지 그것은 더 눈에 뜨였다.
뭐가, 묻었나?
서류 작업을 하다보면 딱 책상에 닿는 자리. 어쩌면 잉크가 묻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혀 그답지는 않지만.
하지만 흐려진 눈에 힘을 주며 조금 더 자세히 살피자 얼룩이라고 하기에는 형태가 일정했다. 어떤 규칙성. 선 같기도 하고 도형 같기도 한, 무언가.
사이나가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으음…? 헉, 앗, 아…!’
그리고, 시야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가 그녀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버겁고 부끄러운 자세 때문에 잠시 들었던 의문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 자세가 너무 힘들어 어떻게든 몸을 틀어보려 했으나, 콘스탄틴은 그럴 때마다 그녀의 약한 부위를 자극하며 도무지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건 뭐였을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싫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본 적이…… 없네.’
그가 제대로 다 벗은 모습.
기억을 이러저리 더듬어보았지만, 없었다. 매번 홀딱 벗는 것은 그녀고, 그는 항상 무언가를 입고 있었다.
밤에는 가운만 입고 오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앞에만 풀고 항상 일을 치렀고, 그걸 벗을 때는 불을 끈 이후였다.
첫날 그녀가 부끄럽다고 한 뒤로는 매번 본격적인 시작 전에 불을 죄다 꺼버렸기 때문에.
“…….”
순수한 궁금증과 의문이 들었으나 걱정도 동시에 들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않다면, 굳이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녀의 경험 선에서는 도무지 그 사정이 무엇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필요하다면 말을 해주겠지.’
한참 고민을 했지만, 적절한 답은 없었다.
사이나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것은 아니니, 무얼 추궁할 권리가 없기도 하고.
그에게 이 부분이 민감한 영역이라면, 굳이 건드리지 않고 놓아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사이나는 목욕을 마쳤다.
시중 하녀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말리고,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
불편하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실내용 드레스였으나 일주일 만에 입는 옷다운 옷이기도 했다.
공작부인의 방에 딸린 개인 응접실로 가자, 콘스탄틴이 미리 자리 잡고 있다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그녀 몫으로 금세 따끈한 차가 차려졌고, 고용인들이 물러갔다.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키고 있는데, 공작이 그녀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인지 테이블 한쪽에 있다가 그녀 앞으로 놓인 그것은 작지만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뭐예요?”
“열어 보십시오.”
딱 봐도 선물인데? 상자만 봐도 선물인데? 원래 선물을 준비하는 건가? 근데 왜 나에겐 아무도 말을 안 해줬지? 너무 서두른 결혼이라서?
찰나 간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답이 있을 리는 없다.
사이나는 침을 꼴깍 한 번 삼키고는, 상자로 손을 뻗었다.
‘음. 너무 비싼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
그녀는 열자마자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았다.
얼핏 봐도 보석이었다.
“…….”
반짝거리는 두 개의 백금 체인.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나란히 이어지듯 박혀있는 두 개의 얇은 체인 사이에, 커다란 블랙 다이아몬드 하나가 다리를 잇듯이 자리 잡고 있는 형태.
흔하지는 않은 디자인이다. 목걸이라고 하기엔 줄이 좀 짧은 것 같으니, 팔찌인가.
…잠깐, 블랙 다이아몬드라고?
“어? 이거 설마…….”
일반 다이아몬드라면 엄청난 가격일 것이 분명한데, 블랙 다이아몬드라니.
블랙 다이아몬드는 보석의 용도로 안 쓴다면서요?
아니, 크레이머 공작부인에겐 예외라고 했던가. 그럼 가격으로 산정할 만한 선물은 아니니 비싼 건 아닐지도…….
“손을 이리.”
쓸데없는 상념을 한쪽으로 치우며, 사이나는 홀린 듯 손목을 내밀었다. 콘스탄틴은 능숙하게 팔찌를 채워주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블랙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팔찌는 전체적으로 그녀의 피부색이나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예뻐요.”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군요.”
“근데 전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콘스탄틴은 웃으며 팔찌를 차고 있는 쪽의 손을 잡아들더니 그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그대는 충분히 내게 주고 있습니다.”
“…네?”
내가 무얼 주었다는 거지?
매번 그에게 받기만 했지, 준 게 없는데…….
“넘치도록. 대체가 불가능하게, 주고 있습니다.”
“…….”
결혼도 사이나가 필요해서 하게 된 건데, 저렇게 말을 하니 면구하기만 했다.
‘그건가?’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거?
불면증은 끔찍하니까, 잠을 들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반색할 만한 일이기는 해도, 사이나는 그게 그리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더하기 빼기를 해보아도 사이나가 얻는 것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팔찌이기도 하지만, 보호구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할 경우, 이 팔찌가 한 번은 지켜줄 겁니다.”
“네? 그게 가능해요?”
“수호령의 힘이죠.”
…아니, 사이나는 또 틀렸다.
가격 산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엄청나게, 어마하게, 말도 못 하게, 비쌀 것이다.
만약, 이걸 판다고 치면 말이다.
사이나는 갑자기 팔이 매우 무겁게 느껴져서 제 팔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항상 차고 있어요. 그게 안 된다면, 외출 시에는 꼭 착용하도록 하고.”
하지만 콘스탄틴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근래 이런저런 위험한 일을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으니 이런 선물까지 준비한 거겠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차마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선물…….”
그러다 보니 부담스러움이 좀 가라앉고, 선물을 선물로 볼 수 있었다.
“너무… 감사해요.”
사이나의 진심이 그에게 미소를 그려냈다.
스르륵 입술을 밀어 올리며 자리 잡은 곡선이 얼굴 전체에 부드러움을 자아내는 것을 보던 콘스탄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보답해줄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군요.”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콘스탄틴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뽀뽀요?”
“음. 그보단 진한 종류로 부탁드리죠.”
“…….”
잠시 머뭇거리던 사이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갔다.
눈을 내리감고 있는 콘스탄틴의 하얀 속눈썹이 가지런하다. 그녀는 그것을 ‘곱다’ 생각하며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나는 결국 피로연에 잠시도 참석 못 했다.
응접실에서의 키스는 꽤 길어지기는 했어도 키스 선에서 끝났지만, 이후 그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또 침실 행이었다.
‘하, 하객 인사는… 으응!’
‘내가 다 했으니 걱정 말아요.’
‘그, 그래도……. 으흣.’
‘어차피 그대와 정말 친한 지인들은 첫날만 참석하고 다 갔습니다. 드보프가에는 따로 서신을 보내두었고요.’
‘아…….’
‘내일 함께 백작님께 찾아뵙시다.’
사이나는 또 기진할 때까지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결혼 피로연 기간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