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혼약
이럴 땐 베일 덕분에 시야가 흐릿한 것이 다행이었다.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일제히 꽂혀 드는 시선은 그래도 좀 부담스러웠다.
터벅. 터벅.
모레프의 뒤에서 드보프 백작의 손에 의지하며 사이나는 흰색 비단이 깔린 길을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앞쪽에 키가 큰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콘스탄틴일 테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가 걸어 나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이나.”
콘스탄틴은 그녀 외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사이나만 바라보았다. 그게 못마땅한지 백작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작님…….”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소중히… 아끼겠습니다.”
천천히 아버지에게서 놓인 그녀의 손이 콘스탄틴의 것 위로 포개졌다.
사이나는 나란히, 그의 곁에 섰다.
“이 시간, 신랑 크레이머가의 콘스탄틴 공작과 신부 드보프가의 사이나 영애. 부부가 되기 위한 서약을 시작하겠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황녀 전하시구나. 뿌연 베일 너머로 황녀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황녀의 뒤로 거대한 네 개의 형체.
4대 가문의 수호령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서 있었다. 마치 결혼식의 배경을 담당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모레프도 안내가 끝나자마자 저쪽에 가서 선 모양이다.
어쩐지 현실 같지 않다.
“맹약은 신성하고, 결혼은 또 다른 존엄한 약속입니다. 부부가 된 둘은 이 약속을 기억하고 새겨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게 사이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상황을 따라갔다.
“신랑은 신부의 베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시오.”
천천히 콘스탄틴의 팔이 다가왔다.
베일이 들리고 그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반투명한 베일도 아닌데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마치 사방에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새하얀 턱시도. 백색 머리카락이 가지런하게 묶여 찰랑거린다.
빽빽하게 자리한 하얀 속눈썹이 파르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파란 눈동자가 짙은 감정을 내보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신부인 그녀보다도 더 순백의 느낌을 풍기는 것 같은 느낌.
올려다보는 눈빛이 짙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서로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그래서인지 순간 실수하고 말았다.
그가 베일 안에서 천천히 반 무릎을 꿇으며 사이나의 손등에 키스를 하고 나면, 사이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것이 맞는 형식인데…….
그의 눈만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 위로 키스하고 말았다.
닿은 입술 아래로 그의 입술이 움찔했다.
“후후, 신부가 애정이 넘치는 모양입니다.”
베일을 썼다 한들 윤곽만으로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다.
웃음 섞인 황녀의 말에 사이나는 제 실수를 깨달았다.
하객석에서도 와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이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기다랗게 입술을 둥글리며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다른 생각은 날아갔다.
뚜렷하게 올려다보는 시선이 짙었다. 화사한 미소와 달리 그 시선은 어딘가 날것의 느낌을 풍겼으나, 그가 몸을 일으키며 베일에서 빠져나가는 통에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이로써, 존엄한 혼약이 완성되었고, 둘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맹약만큼이나 신성한 약속.
둘의 혼약을 축하라도 하듯 4대 수호령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엄한 비상. 하객들의 함성과 함께 둘은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 * *
결혼식이 거의 비공개에 가깝게 열리는 만큼, 피로연은 성대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가 열렸다.
결혼 발표가 나자마자 사람들은 이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한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으나, 기명으로만 초대장이 뿌려진 터라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일행으로 입장하면 출입이 불가하지는 않았기에 사람들은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다 동원하여 피로연에 참석하려고 애썼다.
고위 귀족들이 대거 모이는 연회장에서 안면을 틀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왁자하고 화려한 연회장과는 별개로 사이나가 머무르고 있는 공간은 적막이 흘렀다. 긴장감도 함께 흘렀다.
사이나는 일찍이 연회장을 한 바퀴 돌며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먼저 올라왔다.
지친 사이나의 기색을 읽었는지 콘스탄틴이 응대 마무리를 한다고 하며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뭐가 더 필요할까?’
사이나는 이젠 자신의 것이 된 공작부인의 방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윌레프 부인의 조언대로 듬성듬성 켜진 보조 조명들로만 밝힌 실내는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부인이 추천한 속옷은 차마 못 입었다. 그건 아직 사이나가 시도하기에는 너무 높은 단계였다. 그래도 평소에 안 입던 얇은 실크 소재의 슬립형 잠옷과 가운을 입었다.
한 듯, 안 한 듯한 침실용 화장과 머리 손질법은 참고했고, 부인이 선물로 준 시럽도 잘 챙겼다.
“후…….”
사이나는 긴장감에 크게 숨을 내쉬며 침실 한쪽에 세팅된 와인과 작은 핑거 푸드들이 있는 소파 쪽으로 걸음 했다.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른 뒤, 시럽을 반반 나누어 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첫날밤의 고통을 줄여준다고 하니, 안 먹을 이유가 없었다.
‘이 몸은 처음이기도 하고…….’
사실 전생에 사이나는 관계 때마다 지독하게 아팠기 때문에, 이런 게 있다는 것을 알려준 윌레프 부인에게 매우 감사할 정도였다.
‘이런 시럽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때도 꼭꼭 챙겨 먹었을 텐데.’
실은 안 하는 게 최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나는 콘스탄틴과도 부부 관계를 안 하고 살았으면 싶었다.
‘키스까지는 괜찮은데…….’
이후는 사실 좀 무서웠다.
사실 그녀는 대체 남자들이 왜 그 짓에 그리 집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지 홀랜더 같은 놈이야 여자가 제 아래 깔려서 울고 비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였으니 그렇다 치지만 콘스탄틴도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첫날밤부터 차마 그에게 싫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밤을 잘 견디고 나서 너무 아프다는 핑계로 그를 설득해 횟수를 줄이든지, 아니면 후계자가 필요할 때만 하든지 하자고 말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프다는 대도 제 욕심만 차릴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똑.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결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의 방과 공작부인의 방 사이에 있는 예의 그 연결문이다.
폭설 때문에 여기 머물렀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이 방의 주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이나는 걸음을 옮겨 연결문의 잠금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사야.”
열린 문으로 건장한 그의 모습이 꽉 들어찼다. 동시에 비누 냄새가 섞인 습윤한 온기가 훅, 끼쳐 들었다.
그가 씻고 바로 이리로 직행했음을 향기로 알려왔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서도 좋은 냄새가 풍겼다.
“문을 미리 열어둘 줄 알았는데… 순간 당황했습니다.”
“아,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내가 온 게 싫은 건 아니죠?”
“네? 음, 이제 부부니까…….”
그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눈매가 만족감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부부. 그렇지요.”
빽빽하게 눈매를 감싼 하얀 속눈썹이 어쩐지 콘스탄틴다웠다.
사이나는 그 눈매를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속눈썹을 톡, 건드려 보았다.
파르르 감겼다가 다시 뜨인 눈동자. 음영 진 아래 파르란 동공이 반짝였다가 짙어졌다.
“으, 음!”
어느 순간 그가 입술을 머금어왔다.
욕실에 꽤 오래 머무른 모양인지 맞닿은 피부와 입 안의 온도가 묘하게 습했다.
키 차이로 그녀의 고개가 젖혀지며 약간 비틀거리자, 콘스탄틴이 너무도 쉽게 그녀를 감아올리더니 문 옆에 있는 벽에 밀어붙였다.
발이 약간 떴으나 그는 무겁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살짝 들어 벽에 기대게 한 채로 입술을 맞붙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작은 입술을 빨았다가 핥으며, 연한 점막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까슬한 미뢰가 매끈한 입 안을 긁으며 자극할 때마다 사이나는 움찔하며 더 그의 목에 매달렸다.
“흣.”
왜 순식간에 이런 분위기가 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이나는 그와 벽 사이에서 할딱였다.
그가 도통 입을 다물게 해주질 않은 탓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리자, 콘스탄틴이 그 길을 따라 입술을 내렸다.
오른쪽 볼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목덜미를 핥으며 더 내려갔다. 예민한 부위를 잘근잘근 씹으며 내려가더니, 자세가 잘 나오지 않자 그가 제 허벅지를 그녀의 다리 사이로 끼워 넣으며 그녀를 추켜 올렸다.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된 민망한 자세에 사이나의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으읏, 자, 잠깐.”
하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하던 일에 골몰했다.
이러다 벽에서 첫날밤을 치르게 생겼다.
“코, 콘스탄틴!”
그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아래를 맞붙여 오는 행동에 사이나가 놀라 그를 크게 불렀다.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이, 콘스탄틴이 입술을 떼며 시선을 맞춰 왔다.
“여, 여기 벽이에요.”
“…침대로 갈까요?”
어쩐지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 자, 잠시 저기 앉아요. 네?”
준비해 둔 와인도 안 마셨는데 보자마자 이런 분위기로 진입할 줄은 몰랐다.
콘스탄틴과의 키스는 항상 좋았으나, 그럼에도 그 이상의 행위는 사이나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와인, 와인 한 잔씩 하고…….”
“전, 안 마셔도 됩니다만.”
“제가… 필요해요!”
긴장이 서린 사이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콘스탄틴이 짧게 웃고는 알겠다고 수긍했다.
“긴장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