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광명한 시작
“이리… 상황 파악을 못 해서야.”
황자가 무어라 외치든 콘스탄틴의 태도는 여전했다. 미동도 없이 냉랭하다 못해 무기질 같은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덩치의 차이가 있는데 힘의 차이까지 확연하다 보니 콘스탄틴 앞의 황자는 사자 앞에 선 토끼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악물은 잇새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길리언 황자.”
“내, 내 이 무례함은 절대 잊지-! 으아악!!”
사이나는 그의 품 안에 고개를 묻은 채 소리로만 상황을 파악했다.
“……크 …아악!”
심상치 않은 황자의 비명이 들리자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콘스탄틴이 허락지 않았다.
그는 사이나의 몸을 가두듯 꽉 안은 채 수호령의 힘을 써서 무언가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다.
“…….”
“…….”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그가 맹약자이자 공작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걱정스러워진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콘스탄틴이 그녀를 죄고 있던 힘을 살짝 풀어주었다. 완전히 품 안에서 놓아준 것은 아니나 상체를 돌려 주변을 돌아볼 수는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황자.
“…황자 전하는요?”
“궁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살아서 가신 건… 맞죠?”
콘스탄틴이 잠깐 멈칫하더니 그녀를 향해 미묘하게 웃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설마 제가 그분을 어찌하겠습니까. 황자 전하십니다.”
“…….”
그런데 왜 그리 비명을…….
황자가 지르던 그 소리는 가기 싫은데 억지로 들려 보내는 상황에 열이 받아 지르는 외침이라기보다는, 분명…… 뭔가 공포에 차서 지르는 것 같은 비명에 가까웠다.
“이런, 이러다 일출을 놓치겠군요.”
“아…….”
하늘 위로 어슴푸레하게 빛의 장막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 또 일출을 못 보게 생겼다. 지난 생과는 달리 이번엔 꼭 함께 일출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참이라, 그가 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얼른 보러 가요.”
“잠깐 그대를 안아도 되겠습니까?”
“…네?”
갑자기 뜬금없는 요구에 놀란 사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 여기서요? 왜…….”
“걸어 올라갔다가는 늦을 것 같습니다.”
“…아, 네, 네. 물론이죠!”
안는다는 표현을 혼자 오해해버린 사이나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빨개졌을 것이다.
‘깜깜해서 다행이야.’
이 정도 어두움은 사실 콘스탄틴에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이나는 그의 시력이 얼마나 좋은지 전혀 몰랐기에 그리 생각했다.
콘스탄틴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길게 웃었으나 짓궂게 굴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들며 호명했다.
“모레프.”
명령과 동시에 스르륵 생겨난 모레프 위로 콘스탄틴이 훌쩍 올라타며 그녀의 허리를 더 강하게 감았다.
서로의 가슴이 완전히 밀착될 정도로 가까워져서 사이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밀었으나,
“내 목을, 감아요.”
콘스탄틴의 말에 그의 목을 감으며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아까보다 더 빨개졌을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휘익-
갑작스러운 가속도에 순간 누군가가 커다란 돌풍을 그들에게 쏘기라도 한 것처럼 바람이 할퀴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숲길을 벗어난 이내 모레프가 벽을 타고 날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헉.”
평소에 겪어보지 못한 각도로 몸이 쏠린 채 점차 땅과 멀어지는 느낌에 사이나가 더 강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공중을 달리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아랫배가 울렁거렸다.
그나마 모레프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다행이었다.
탁. 소리와 함께 첨탑 위에 올라서자 모레프는 어느새 다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두 발이 다시 단단한 바닥에 닿았다.
“아.”
“여기로군요.”
황녀가 미리 사람들을 시켜 이 위에 세팅을 해둔 모양이다.
그전에는 없었을 것이 분명한 임시 퍼걸러(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나 길.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 푹신한 카펫과 긴 카우치 하나, 그 위로 여러 겹의 털가죽과 쿠션이 있어 안락해 보였다.
쌀쌀한 새벽 날씨를 위해 화로도 양쪽으로 놓여 있었다.
어느새 그가 퍼걸러 안으로 들어가 카우치 위에 앉았다.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였다.
카우치 한쪽에 그녀를 앉힌 콘스탄틴이 털가죽을 들어 그녀의 등 뒤로 둘러주고는 바로 옆에 앉았다.
“곧 뜨겠군요.”
포근하게 감싸는 가죽의 온기를 느끼며 사이나가 동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서서히 차올라 하늘을 물들여가는 동그란 빛무리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사위가 밝아지며 드러나는 경치에, 사이나는 왜 황녀가 이곳을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도 페이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페이즐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테일런 강의 수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아름답게 구획된 황도의 정경 역시 그 빛살을 받아 매우 아름다웠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기 전이라서 밤의 색과 낯의 색이 뒤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다웠다.
사이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예쁘다.”
매일 뜨는 태양이건만, 오늘의 일출은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밤사이 은은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냈던 달도, 한껏 반짝였던 별들도 태양 앞에서는 설 곳을 잃고 사라졌다.
광명한 빛이 사방을 채웠다.
마치 네 앞에 드리운 어두움도 그렇게 사라지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고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 왔다.
앉은 엉덩이 옆 카우치를 짚고 있던 손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에 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콘스탄틴.
곧 내 남편이 될 사람.
함께 일출을 보고, 손을 맞잡는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행위들이 어쩐지 기꺼워 사이나가 미소 지었다.
길게 곡선을 만들며 그려진 미소에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난다. 눈매가 기울어지며 그 속에 사랑스러움이 피어났다.
발그레해진 볼,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하이얀 얼굴 위로 해맑게 지어진 미소가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빛났다.
콘스탄틴은 숨을 멈추고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 미소만이 그의 시야를 파고들어 느릿하게 흘렀다.
“예쁘죠?”
그래. 예뻐.
지나치게 예뻐서,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그녀를 잡은 손에 콘스탄틴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더 깊게 깍지를 끼웠다.
기다란 빛살이 뻗어 나와 그들의 발치에 놓여 있던 그림자를 지워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서늘한 공기, 습윤하던 밤의 서리 등이 안온하고 따뜻하게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콘스탄틴은 어쩐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끌어와 그 손등에 입술을 대며 눈을 감았다.
* * *
남은 일주일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지간한 준비는 크레이머가에서 도맡아 진행했음에도 은근히 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끝 만남이 좋지 않았던 황자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이 이따금 뇌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겉으로 들려오는 별다른 소식이 없기에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써 봐야 신분상의 문제로 황자를 어찌할 수 없다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기도 했다.
‘결혼하면 끝이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아무리 황족이라도 별수 없으니 포기하겠지.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었다.
4대 공작가의 결혼식은 언제나 황성에서 열린다. 하지만 황성에서 열린다는 점을 빼면 다른 귀족들의 결혼식보다 훨씬 소박했다.
신랑, 신부 측의 직계 가족과 4대 공작, 황족 정도의 참석자가 전부인 소규모 결혼식이다.
공작의 결혼식은 다음 맹약자의 계승과 연관이 되어서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이렇게 치러져 왔다고 한다.
주례사 및 부부의 선포를 황족이 담당하는데, 사이나와 콘스탄틴은 황녀에게 요청했다. 황제는 거동이 불편하고 황자는 그들이 불편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황녀와 사이가 나쁘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사이나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레프를 마주 본 채였다.
눈앞까지 다 가리도록 씌워진 베일 덕분에 시야가 선명하지는 않았으나, 모레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왜 그러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 모레프가 스윽 시선을 돌려버릴 줄은 몰랐다.
‘…안내역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공작가의 결혼식에는 하나 더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입장을 하되 수호령의 안내에 따라 식장에 걸어 들어간다.
일종의 화동(花童) 역할을 수호령이 하는 셈이다.
전에 엘리자베스의 결혼이 부러웠던 이유에는 이것도 있었는데……. 뭔가 감회가 남달랐다.
“신부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그녀가 대기하고 있던 방의 문이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거대한 갈기를 휘날리고 있던 모레프를 문 바로 앞에서 맞닥뜨리는 바람에 흠칫하는 것이 보였으나,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딸아.”
“아버, 아니, 아빠.”
사이나가 드보프 백작의 손을 꼬옥 잡았다. 백작의 목소리가 어쩐지 좀 잠겨 있는 것처럼 들렸으나, 베일 때문에 표정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걱정 마세요. 잘 살게요.”
“그래. 그 ……만 아니었어도. 이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설핏 욕설 같은 걸 들은 것 같아 흠칫했지만, 하녀들이 사이나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돕기 시작하자 얌전히 백작의 손에 의지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모레프가 대기 선에 멈춰 서더니 다시 흘끔 사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리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구나.”
백작도 신기한지 한마디 했다.
“잘 부탁해. 모레프.”
사이나는 잘 보이진 않겠지만 상냥하게 웃으며 모레프의 뒤에 섰다. 그녀의 말에 모레프가 어쩐지 흠칫하더니, 갈기를 더 크게 부풀렸다.
“신부님, 입장하십니다!”
결혼식이 열리는 커다란 홀의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