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벽과 대화하는 기분
‘제일 깜깜한 지역을 혼자 가야 하다니.’
품 안에 검은 새가 없었다면 정말 가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 작은 새가 뭐라고 나름 의지가 되었다.
다행히 관목 지역은 그리 길지 않은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콘스탄틴이겠지.
“콘스……”
“드디어 만났군.”
“……!”
당연히 콘스탄틴일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그가 아니었다.
사이나는 너무 놀라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나와 이야기 좀 하지.”
황자였다.
‘대체 황자가 왜 여기에….’
사방이 어둡고, 인적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남자를 만난 사이나의 심경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떨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으나 도움을 청할 만한 그 무엇도 보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콘스탄틴이 기다리고 있을 탑이 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 하지만 황자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그리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콘스탄틴이 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황자가 잠복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소리치면 그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콘스탄틴은 기사니까 청력이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좋을지도 모르잖아.
진짜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하자 불안감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리 결혼을 한다 해버릴 줄이야. 대체 왜 그런 겐가?”
…대답을 해야 하는 건가?
왜 자신이 결혼한다고 황자에게 추궁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후. 아직 늦지 않았네. 영애에게도 좋은 이야기야. 공작부인보다야 당연히 황후가 낫지 않은가?”
황자는 마치 사이나가 반드시 황후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그렇다 치고 대체 누가 원하기나 한단 말인가.
“파혼하도록 해. 공작과는 내가 잘 말해서 해결하도록 하지. 영애가 나를 원한다는데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별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떤 생각의 흐름을 거치면 저렇게 결론이 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지?”
성큼 다가서는 황자의 움직임에 사이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든 등불이 흔들리며 둘 사이에 빛 그림자가 마구 휘청거렸다.
“외람되오나, 전 황후 자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뭐라?”
황자가 갑자기 멈춰 섰다.
겨우 발아래나 비출 수 있는 등불이 드러낸 황자의 모습은 상체가 어둠에 먹히고 하반신만 남아 그녀를 노리는 괴물처럼 보였다.
“황후 자리를 원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
마음대로 궁 밖에도 못 나가는 황후 자리, 전혀 되고 싶지 않았다. 뭐가 부러우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황후 자리를 원치 않습니다.”
“하 참, 왜 이리 튕기는 건지…. 아하! 달리 원하는 것이 더 있는가 보군. 뭔데? 말을 해봐. 최대한 들어주지.”
“…….”
이건 무슨, 벽과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황자 전하께는 헤베타가 있습니다.”
황자조차도 황후 자리는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디 그의 입장을 다시 깨닫길 바라며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흥. 그 무능한 반즈가의 것 말인가? 애저녁에 파혼했네.”
파혼? 곧 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 했다고?
아, 혹시 공중정원에서의 사건이 밝혀졌나? 근데 왜 아무런 발표나 소식이 없는 것이지? 황자도 알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사이나는 그의 입에서 무슨 정황이 더 나올까 해서 기다렸으나, 이후에 나온 말은 반즈 영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영애야말로 완벽한 헤베타 감이야. 제국을 위해 헌신할 영광된 기회를 주겠네.”
“…….”
아니, 대체 누가 원한다고…….
왜 황자가 그녀를 헤베타 감이라고 여기는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영광된 기회는 원하지도 않고, 그 기회를 통해 뭔가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영광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도 않고.
“이참에 영애는 나와 함께 가지. 더 갈 필요도 없어. 크레이머 공작은 내 알아서 해결하겠네.”
“시, 싫습니다!”
성큼 다가오는 황자에게 놀라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 싫다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황자가 되물었다.
“저, 전 이미 결혼을 약속한 몸이에요. 황후든 헤베타든 될 수 없어요!”
“아직 결혼 안 했잖아?”
“할 거예요. 하고 싶고요. 공작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대체 뭐가 문제야? 원하는 걸 말하라니까? 영지? 금광? 뭐든 말을 해.”
방금 원하는 걸 대놓고 말했음에도 황자는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다그쳤다.
“크레이머 공작님을 원해요.”
“…….”
황자는 잠시 침묵하며 사이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일렁이는 등불에 그나마 드러난 황자의 하관에서 일그러지는 입매가 보였다.
사이나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하긴. 여자들은 참 이상해. 대체로 입으로 원하는 것과 실제로 원하는 것이 다르더군.”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콘스탄틴이라고! 대체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이 돌벽 같은 놈아!
사이나는 두려운 감정과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다.
“다행히도 나는 꽤 관대한 편이야. 영애가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할 때까지 찬찬히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네.”
몇 번을 말해도 튕겨 나오는 벽 같은 모습에 사이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 이만 공작님께 가 보겠습니다. 황자 전하와의 만남은 없던 것으로 하겠어요.”
들을 의향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를 계속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녀는 가볍게 묵례하고 가던 길을 가려 걸음을 옮겼다.
황자의 곁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 좀 걸렸지만,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일출을 놓칠 것 같아 조급해졌다.
“그렇다고 내 인내심을 너무 시험해서는 곤란하지.”
하지만 황자가 매섭게 다가오더니 사이나의 팔목을 거세게 붙잡았다.
“아앗!”
힘 조절도 없이 붙든 그의 악력에 팔목이 시큰거렸다. 그 탓에 들고 있던 등불이 바닥에 떨어지며 파사삭 깨져버렸다.
유일한 광원이 사라지며 사방에 암흑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사이나의 품속에 있던 검은 새가 빠져나와 파드득 날아갔다.
“…방금 뭐였지?”
“놓아, 주세요. 아픕니다.”
“방금 뭐였냐고!”
“읏, 아파요!”
사이나는 진심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사위가 이리 어두운 데도 황자의 눈이 번뜩이는 것만은 선명하게 보여 소름이 끼쳤다.
“이리 와!”
“싫어요! 대체 왜 이러… 꺄- 읍!”
강제로 끌고 가려다 사이나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황자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의 계약자가 명한다! 나타나라, 디오스.”
“으읍!”
황자의 앞에 푸르스름한 형체의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호령을 불러낸 모양이었다.
수호령? 황자에게 왜 수호령이 있지? 수호령이 있는데 왜 황태자가 되지 못한 거지?
다급한 가운데에서도 머릿속에 이런 의문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황자가 그녀를 꽉 붙든 채 수호령에 올라타자 사이나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절대 안 돼!
“으! 으읍!”
있는 힘껏 몸을 비틀며 저항해 보았지만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자!”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사이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싫어!’
탓, 튀어 오르는 수호령의 발돋움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더 빨리-!”
의지가 강탈당한 속박감에 사이나는 눈물이 났다.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크게 비명이라도 질러볼 것을…….
그가, 그가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황자가 이토록 앞뒤 없이 무도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또다시 절망적인 결혼 생활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암담함에 뒷골이 쭈뼛해졌다.
그리고 극한의 감정 때문인지 갑자기 시야마저 까맣게 물드는 것 같았다.
‘제발…….’
절망처럼 싸한 한기가 주변을 파고들었다. 마치 주변 온도가 몇 도는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심리적인 싸늘함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얼핏 느끼던 찰나, 황자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리고는 이내 몸이 허공에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타고 있던 황자의 수호령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흐으!”
몸이 부웅 뜨는 기분에 눈을 꽉, 감았던 사이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단단하게 감아 안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체취가 훅 끼쳐 들었다.
“…사야.”
“흑.”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사이나에게서 안도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심…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콘스, 콘스탄틴.”
사이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꽉 마주 안았다. 얕은 숨결과 함께 그가 더욱 힘껏 그녀를 안아왔다.
단단한 품 안에서 사이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공작! 감히!”
볼품없이 바닥에 뒹굴다가 일어난 황자가 분노를 내비쳤다.
“대체…….”
콘스탄틴은 진득하게 내려앉은 살기를 내비치며 황자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무슨 생각으로 제 약혼녀를 겁박하셨는지 좀, 들어볼까요.”
무표정하다 못해 한기가 흐르는 표정으로 콘스탄틴이 황자를 응시했다.
그의 옆에서 거대한 형태의 모레프가 갈기를 위협적으로 일렁이며 황자에게 다가섰다. 수호령은 맹약자의 명을 따르니 그 음험한 접근은 당연히 콘스탄틴의 의지이리라.
게다가 모레프의 발밑으로 칼리고가 함께 다가서고 있었으니, 덕분에 모레프가 다가올수록 어둠이 함께 다가오는 기분이 들 것이다.
마치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의 늪이 발밑으로 다가오는 그런 기분.
황자는 침을 꼴깍 삼켰다.
“고, 공작! 이건… 살기가 아닌가! 가, 감히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
콘스탄틴은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한쪽으로 기울였다. 마치 그게 어쨌냐는 듯이.
“나, 나는 이 제국의 황자야! 황제가 될 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