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은밀한 수업
본 행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뭔가 진이 빠진 기분이다.
약간 넋이 나간 기분으로 만찬장에 들어선 사이나는 이내 족족 도착하는 친우들을 반기며 인사를 나누었다.
“사야~”
“언니.”
“반가워.”
“다들 잘 지냈어?”
그간의 근황을 서로 묻고 있자 시종이 황녀의 도착을 알렸다.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황녀 전하. 이리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어서 오시게들.”
인사를 나눈 뒤, 각각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만찬장에 자리 잡았다.
가볍게 근황을 서로 나누며 식사를 한 뒤, 그들은 다음 코스를 위해 이동했다.
바로 기혼 여성을 초청해 결혼 생활의 팁을 얻는 짧은 나눔의 시간이었다.
“언니, 오늘 초청한 분이 ‘그’ 윌레프 부인이라면서요?”
메신저 섭외는 키얼스틴이 맡았다. 플로리아가 키얼스틴에게 눈을 반짝이며 넌지시 물었다.
뭔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훗. 플로리아. 기대돼?”
“……헤.”
플로리아가 볼을 슬쩍 붉혔다. 대체 왜?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증이 치솟았다.
‘윌레프 부인? 유명한 사람인가?’
사이나는 예전부터 사교계 흐름에 그다지 밝지 않아서 드러난 것 이면의 화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교계에는 겉으로 흐름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드러나지 않는 영역에서 유명인사들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사교계에 능한 사람들일수록 전자와 후자에 모두 빠삭했다.
윌레프 부인은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인물인 듯했다.
“사야는? 사야도 기대돼?”
“…어?”
“기대해도 좋아. 아주 어렵게 모셨다고~”
“…….”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키얼스틴이 눈을 찡끗했다.
아무래도 엄청 유명한 사람인가보다.
사이나는 전생의 기억까지 더듬어 좀 더 곰곰이 윌레프 부인에 대한 정보를 뒤져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 분야인지는 몰라도 꽤 유명한 부인인 것 같은데. 음, 내가 진짜 전생에 언저리에서 살기는 했구나.’
원래도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툴렀는데, 조지 홀랜더와 결혼한 이후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얼굴에 묻어나던 그녀는 당연하게도 사교계 어떤 무리에도 스며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괴롭힘을 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한 경시의 대상이었으리라. 어떤 의미로는 괴롭힐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는 뜻도 되겠다.
그런 그녀가 알음알음 전해지는 정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
사이나가 물었다.
“훗. 그걸 내 입으로 먼저 말하면 재미없지.”
하지만 키얼스틴은 한쪽 눈을 찡긋할 뿐이었다.
황녀와 4인방. 다섯의 영애는 한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동그랗게 서로가 마주 볼 수 있도록 1인용 소파들이 여러 개 배치된 응접실이었다. 소파 사이사이마다 작은 티 테이블이 있어 마실 것과 핑거 푸드들이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귀한 분들.”
응접실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반갑네. 그대에게도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윤기가 흐르는 청록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단정한 인상의 여성이 황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반갑습니다. 오늘 귀한 축복의 밤에 메신저를 하게 된 카리나 윌레프라고 합니다.”
그리고 4인방에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윌레프 부인.”
“부디 앉으세요.”
다들 착석하자 윌레프 부인이 웃더니 주변을 돌아다니며 갑자기 커튼을 치고 등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무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유가 있겠지 싶어 다들 그녀가 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윌레프 부인은 실내의 조도를 낮추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초와 조명, 색유리로 된 갓등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순식간에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안락하면서도 은밀한 느낌으로.
“어떠셔요?”
“갑자기 다른 곳이 된 것 같군. 이리 한 이유가 있나?”
황녀가 제일 먼저 궁금한 듯 물었다.
“뭔가… 은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느낌을 풍기지 않나요?”
“음.”
“남편이 침실로 찾아오는 날에 이리 꾸미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아!”
다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다시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을 풍기고 유혹적이죠. 이런 조도에서는 아무래도 무드를 잡기가 더 쉽답니다.”
“오호라.”
해가 진 실내를 밝히기 위한 보조 광원으로만 생각했던 조명들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방안 배치와 꾸밈에 대해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윌레프 부인의 앞에는 다른 사람과 달리 큰 탁자가 있어 용도를 알 수 없는 물품들이 이것저것 많이 놓여 있었다.
부인은 갑자기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풀더니, 굵게 컬이 말리는 느낌으로 모아 한쪽 어깨로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탁자 앞에서 붓 같은 것을 들어 화장을 시작했다. 눈가에 뭔가를 칠하고 볼 언저리에도 뭔가를 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윌레프 부인은 아까와 너무나 다른 인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했다.
눈매를 도발적으로 칠하고 입술이 촉촉하게 반짝이게 보이도록 하는 무언가를 칠한 모습이…… 낮아진 조도 아래에서 굉장히 도발적으로 보였다.
“가끔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세요. 새로운 모습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죠.”
“그런 화장법은 그대가 개발한 것인가?”
“이것저것 참조했습니다.”
그리고 윌레프 부인은 눈을 접어 사르르 웃었다가, 눈을 반쯤 내리뜨며 나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여보. 오늘 일찍 오실 거죠, 응?”
혼자서 상황극을 연기하는 모습은 자칫하면 우스워 보일 수 있었으나, 윌레프 부인의 연기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은 함께 있고 싶어요, 여보.”
때때로 다른 말투와 표정.
분명 단정했던 얼굴이 화장과 표정에 따라 요염한 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다들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런 말투, 이런 표정을 좋아하시는 남자분들이 많답니다. 특히 유혹이 필요할 때 한 번 시도해 보시면 좋아요.”
사이나도 깜짝 놀랐다. 필요에 따라 저렇게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연출할 수도 있는 거구나.
‘왜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생각나지.’
전에 꿨던 꿈 때문인가.
윌레프 부인의 강연은 정말 다양하고 신기했다.
그 이후로도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사례와 해결법, 남성의 성향들이 어떤지를 늘어놓으며 원만한 부부 사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강의했다.
‘이런 걸 다들 듣고 결혼하는 거야?’
어쩐지 충격이었다.
조지 홀랜더가 개차반인 것과 별개로 과거의 그녀가 얼마나 준비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괜스레 확인하게 된 것 같다.
준비 없이 갑자기 결혼하게 된 것은 이번 생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달랐다.
“…헉!”
잠깐 딴생각을 하는 동안 윌레프 부인이 어느새 드레스를 벗고 있었다.
드레스를 벗는 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벗은 드레스 아래 드러난 속옷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남편이 미쳐서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면 가끔 이런 것도 좋답니다. 후후.”
윌레프 부인의 몸매는 같은 여자가 봐도 매우 육감적이었는데 그 도발적인 몸매를 더욱 부각시키는 속옷 차림 덕분에 같은 여자임에도 어쩐지 눈 둘 곳이 없게 했다.
“일체형도 좋아요. 가터벨트와 실크 스타킹은 언제나 좋은 선택이죠. 아직 아가씨들이라 소프트한 디자인들만 준비했습니다만, 나중에 결혼하시고 더 과감한 디자인을 원하시면 이리 연락 주시어요.”
사르르 웃으며 윌레프 부인이 탁자 위에 있던 책자를 다섯에게 각각 나누어주었다.
카탈로그로 보이는 그것은 겉표지는 매우 깔끔했으나, 안쪽은……. 사이나는 차마 안을 더 살펴보지 못하고 한쪽에 챙겨두었다.
“어머!”
“세상에! 이건 입으나 마나 아니야?”
“그렇군, 거의 끈이 아닌가?”
“후후. 원래 완전 벗는 것보다 아슬아슬 보이는 것이 더 자극적인 법이랍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이나 외의 사람들은 죄다 카탈로그를 받자마자 펼쳐서 들여다보며 호들갑을 떨어댔으니 말이다.
사이나를 위해 메신저를 불렀다는 것은 그저 핑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들 눈이 반짝반짝해서 그녀보다 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윌레프 부인은 그런 그들을 나른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사이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어쩐지 움찔해서 있는데 윌레프 부인이 사이나에게 한쪽에 놓여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후후.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영애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네?”
윌레프 부인은 그녀가 그 선물을 받아들기도 전에 상자를 열더니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향초와 화장품, 속옷 세트가 한 벌 들어 있었다.
“첫날밤에 사용하시어요.”
“…….”
첫날밤이라니. 그 단어만으로도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사르르 웃으며 윌레프 부인이 한쪽에서 작은 상자를 더 꺼냈다.
“이건… 저희 숍에만 있는 특제 시럽이랍니다.”
부인은 검지와 엄지 사이에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어 보여주며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첫날밤 치르시기 전에…….”
작은 유리병 안에서 핑크색의 점도 있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와인 한잔하시면서 남편분과 나눠 드셔요. 첫날밤에 있을 수 있는 아픔을 줄여 준답니다.”
“……정말요?”
전생에 치렀던 고통의 밤이 떠오르자 사이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조지 홀랜더와의 밤은 이후로도 고통 그 자체였으나, 첫날밤에는 유독 심했다.
술에 잔뜩 취한 채 들어와서 마구잡이로 그녀를 찍어 눌렀던 탓에 사이나는 이후 사흘이나 앓아누웠었다.
“물론이죠. 고통을 줄여 줄 뿐만 아니라, 후후. 부과 효과도 있답니다?”
“부과 효과요?”
그게 뭐지?
“그날 되면 아시게 될 거예요. 물론 후회하지도 않으실 거고요. 잊지 말고 드시어요. 많은 분들에게 효능이 입증된, 부작용 없는 시럽이니 걱정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