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들키면 큰일 나요
파르르-
하지만 그녀의 손이 에렌혼의 콧잔등을 쓸기 직전, 제 가슴팍에서 생겨난 커다란 떨림으로 인해 사이나는 잠시 굳어버렸다.
“…어?”
푸득, 푸드득. 주머니가 없어 가슴팍에 넣고 나왔던 검은 새가 갑자기 몸을 마구 떨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포로로록-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어엇! 새, 새야!”
여태 무생물처럼 가만히 있던 새가 왜 갑자기 나와서 가버린 걸까.
‘콘스탄틴이 데리고 가라고 했는데…….’
저리 날아가 버리다니. 어쩌면 좋담?
당황한 사이나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얼 하려고 했던 건지도 잊고 말았다.
제 등 뒤쪽으로 날아가 버린 새의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이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몸을 틀었다.
“……?!”
그랬다가 또 놀라고 말았다.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에렌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
설마 조각품이 아니었던 걸까?
‘나… 그럼. 잠깐만…….’
아니, 그것 외에는 답이 없겠네. 조각이 어찌 움직이며, 어찌 사라지겠느냔 말이지.
‘방금 나, 에렌혼이랑 만난 거지? 그런 거지?!’
여태 그리 기대해 왔던 순간인데 어째 기쁘다기보다는 홀린 듯한 느낌만 남아 멍해졌다.
“허어…. 음…….”
그러다 보니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렌혼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에버딘 영지에 있어야지 왜 황녀궁에? 게다가 여긴 금남지역 아니야? 아니, 에렌혼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나? 그렇다고 왜 조각인 척하고…….
‘그냥 헛것을 본 건가?’
뭔지 모르겠다. 사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으앗!”
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눈앞에 생긴 거대한 그늘에 흠칫한 몸이 뒤로 젖혀졌다.
발은 고정된 채 몸만 젖혀지다 보니 냉큼 자빠질 수순만 남은 그때, 사이나의 허리가 단단하게 받쳐졌다.
“어, 아가씨?”
그늘을 드리운 장본인.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본 남자는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우와. 또 만났네요?”
분홍색 머리카락. 눈물점. 퇴폐미를 자랑하는 눈웃음.
벨류아 고서점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와. 세 번째죠? 세 번째. 드디어 만났네. 진짜 고대했던 순간인 거 알아요?”
“…….”
“운명이야…….”
남자의 눈이 몽롱해졌다.
사이나는 어쩐지 더 흠칫해서 그가 잡고 있던 허리를 풀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음? 어디 가요?”
“여긴 황녀궁 조각 공원인데……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
그것도 남자가. 황녀님은 알고 계실까?
“녀석이 여길 좋아해서.”
“녀석이요?”
“네.”
뭔 소리지.
“별로 화제 삼고 싶지 않은 녀석.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
“그딴 건 제쳐 둡시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네?”
“우리 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눠야죠.”
무슨……. 우리라고 칭할 만한 사이도 아니건만.
‘이 남자, 확실히 이상해…….’
남자는 꺼림한 그녀의 얼굴을 읽었는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다시 만나면 데이트 허락해 준다고 했었잖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통성명이나 하자고 했지.”
“앗. 기억력 엄청 좋네요?”
“…….”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이름을 알려줄 차례인 것 같은데.”
남자는 갑자기 한걸음 물러섰다.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을 제가 듣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기사가 레이디에게 인사할 때처럼 예법을 취하며 사르르 웃었다.
이 남자. 분명 제 얼굴이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신사라면 먼저 본인의 이름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여전히 틀린 예법이다. 모양은 완벽했을지 몰라도, 내용이 틀렸다.
“앗, 미안해요. 솔직히 나 신사 아니에요. 그래서 이 모양…….”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자신을 비평하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잠깐, 아가씨. 나 몰라요?”
“소개한 적 없는데 당연히 모르죠?”
“허어……. 세상에. 와, 나 모르는 사람이 있었구나. 진짜 신기하다.”
남자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해댔다. 그 눈은 정말로 신기한 듯 사이나를 보면서 말이다.
“어떻게 모르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뭐지…. 엄청 유명한 사람인가…….’
분홍 머리. 유명함. 잘생김. 이 정보를 조합했을 때 알 만한 유명한 사람이라…….
“…….”
서, 설마.
사이나는 뜨악한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
“혹, 시…… 음…. 애버딘 공작 각하세요?”
남자는 정말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안 거예요? 정말 여태 몰랐나 봐?”
“…….”
허어. 그렇구나.
사실 이리도 명확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는데, 대체 왜 몰랐을까.
스스로가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첫 만남이 다 스러져가는 고서점이다 보니 그랬나보다.
그땐 옷차림도 수수했고, 말투도…….
‘에렌혼에 대한 사실들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그렇겠지. 당연하겠지.
‘아까 본 에렌혼도 그럼 진짜 에렌혼이 맞네!’
하지만 진중함이라고는 없었던 그와의 첫 만남이나 태도를 떠올리자, 그녀가 그를 애버딘 공작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어설픈 작업 멘트도 그렇고, 어딘가 시정잡배 같은 태도 아니었나.
“…….”
그쯤 되자 약간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를 수도 있지. 유명하면 자기소개 안 해도 되는 건가요? 각하께서 먼저 소개를 했다면 당연히 알았을 거 아니에요?”
“…….”
“신분이 높다고 소개도 안 하고 사시나요?”
“…에, 그게 아니라…….”
뾰족하기까지 한 사이나의 반응에 애버딘 공작은 약간 당황했다.
“말 안 해도…… 다 알았단 말이에요.”
“그럼, 제 잘못이네요. 저는 물정 어둡고 뭘 잘 몰라서.”
“…….”
“죄송합니다.”
“아, 아니… 사과를 바란 건 아닌데…….”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계속 무례를 범할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아가씨!”
사이나는 꾸벅 인사했다.
“고결한 맹약의 주인, 애버딘 각하.”
인사말과 몸짓만큼은 몸에 익은 최상의 예법을 표하며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애버딘 공작을 탓할 것도 없이 마찬가지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음을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태로, 사이나는 후다닥 조각 공원을 벗어났다.
“데이트…….”
남은 애버딘이 뒤에 남아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운명인데…… 어디 가요…….”
그는 왜 이런 식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 * *
“아가씨. 한 시간 후에 만찬장까지 모시러 온다고 시종이 다녀갔어요.”
방으로 돌아오자 스밀라가 말했다.
“아, 그래? 알았어.”
“드레스 갈아입으실 거죠?”
“응.”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는 외출용이다 보니 만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가져온 것 중에 푸른색 드레스로 입을게.”
“네. 금방 준비해 올게요.”
너무 밝은 톤의 푸른색이 아닌 약간 톤 다운된 계열의 푸른색으로, 마담 샤를리즈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색으로 잘 만들어 보낸 드레스 중 하나였다.
스밀라가 곁방에 드레스를 가지러 간 동안 사이나는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으려 등 뒤의 리본을 풀었다.
리본까지는 혼자서 할 수 있는데 등에 빼곡하게 달린 단추까지 풀기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음. 그 드레스에 장신구는 이게 더 낫나? 아니면 이거?’
손이 닿는 몇 개의 단추만 풀어 놓은 채 사이나는 곧 입을 드레스에 어울릴만한 장신구를 고르기 위해 보석함을 들여다보았다.
달칵.
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이나가 말했다.
“뒤에 단추 좀 마저 풀어 줄래?”
당연히 스밀라라고 생각하며 사이나는 고개도 틀지 않고 보석함을 들여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네, 아가씨.’라고 대답하며 다가왔을 텐데 말이 없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한 채 목걸이며 귀걸이를 뒤적거리느라 여념이 없던 사이나는 톡, 토독, 풀어 내려가던 손길이 멈추며 생각지도 못했던 음성이 들리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더 풀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꺄-읍!”
놀라 소리를 지르려던 그녀의 입을 가볍게 막으며 침입자가가 속삭였다.
“쉬이, 납니다. 사야.”
“…….”
동그랗게 뜬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자 이내 그가 입에서 손을 떼 주었다.
콘스탄틴. 어찌…….
“어찌, 여기에. 들키면 큰일 나요!”
황자궁도 아닌 황녀궁에 남자가 들어왔으니 들켰다가는 아무리 콘스탄틴 공작이라도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리라.
똑똑.
“아가씨, 드레스 가져왔어요.”
“헉.”
하필 그때 스밀라가 돌아왔다.
사이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벽에 있던 파티션을 발견했다.
콘스탄틴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그를 거기에 밀어 넣자마자 스밀라가 들어왔다.
“…아가씨?”
“아, 응. 스밀라. 드레스는 거기에 둬.”
“네? 지금 안 갈아입으시고요?”
“…잠깐 발이 아파서 30분만 앉아서 쉬다가 갈아입으려고.”
“발 찜질 준비할까요?”
“어? 아니야. 그냥 좀 쉬면 돼. 30분 뒤에 올래?”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응.”
“드레스 갈아입으면 못 눕잖아. 그래서 그래.”
“알았어요.”
휴. 다행이다.
그런데 나가려던 스밀라가 돌연 방향을 바꿔서 사이나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어? 왜?”
“옷 불편하시잖아요. 벗겨드릴게요. 잠시라도 편하게 계시는 게 낫죠.”
“…어, 그렇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콘스탄틴이 매우 의식이 되었지만, 스밀라더러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아 얌전히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사이나는 순식간에 홀라당 벗겨져 언더 드레스 차림이 되고 말았다.
“30분 뒤에 오겠습니다.”
“그래. 너도 쉬다 와.”
“네. 감사합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사이나는 몸을 가릴 만한 것을 찾았으나, 가운도 숄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사이나는 시트로 몸을 감으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