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초대받은 자의 특권
“이리 주세요.”
콘스탄틴은 짧은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뒤, 그녀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군말 없이 욜리를 사이나에게 넘겼다.
“크잉, 크이잉.”
뭐가 불만인지 그녀의 품 안에서도 욜리는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흔들어대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콘스탄틴은 한쪽이 내려가 어깨가 드러난 그의 재킷에 손을 뻗더니 다시 올려주고는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그 덕에 욜리는 품이 커다란 재킷 안으로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캿!”
그게 또 불만인지 욜리가 안쪽에서 재킷을 향해 곰발 펀치를 날렸다.
이번에는 손톱을 세운 모양인지 지익, 긁히는 소리가 났다.
“욜리!”
사이나가 얼른 재킷을 벌리며 안감을 살폈다. 천이 긁혀 올이 나간 모양이 선명했다.
“…죄송해요.”
콘스탄틴은 얕게 숨을 쉬더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다시 재킷을 여며주었다. 몸이 조일 정도로 타이트하게 말이다.
“더 있다가는 사고를 칠 것 같군요.”
“…네?”
그는 몸을 일으키며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이쪽도 축야를 황궁에 요청하겠습니다.”
“어, 그… 제가 한 말 때문이면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사이나는 그를 따라 일어나며 응수했다.
“다른 공작들과 가볍게 술이나 한잔할 생각이니, 궁이 차라리 편합니다.”
아, 워프 게이트가 황성 내에 있으니 그게 더 편할 수도 있겠네.
콘스탄틴은 테라스 문을 열다가 멈춰 서서 다시 사이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축야 당일에 검은 새를 보내겠습니다. 갈 때 꼭 데리고 가요.”
“네? 왜요?”
“궁 안쪽까지는 호위기사를 데려갈 수 없지 않습니까. 반면, 황자는 그렇지 않으니.”
“…….”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그 새가 내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수호령은 참, 별게 다 가능하구나.
“노파심일지언정, 나를 위해 그리 해줘요.”
“알았어요.”
황자는 그녀로서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니, 혹시 모를 상황조차도 염려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사이나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남기며 웃었다.
“잘 자요.”
“네. 공작님도요.”
그리고 콘스탄틴은 금세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3층 높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훌쩍.
* * *
시간이 하릴없이 빨리도 지나갔다.
사이나는 묘하게 바빴다. 분명 콘스탄틴 쪽에서 어지간한 것은 다 감당하는 데도 이 정도라니, 그쪽은 얼마나 정신없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느새 축복의 밤 행사가 있는 날.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밤을 지새우러 가는 것인지라 챙길 것이 꽤 많았다.
빠진 것이 없나 체크하고 있는데 창가에서 톡톡 소리가 났다.
‘앗, 새가 온 건가?’
새의 존재를 비밀로 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사이나는 하녀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테라스 문을 열었다.
뾰로록. 날아드는 작은 몸체는 검은 새가 맞았다.
“안녕.”
사이나가 손을 펼치자 새가 가볍게 날아와 앉았다. 그러더니 입을 쫙 펼친다.
꾸엑.
귀여운 외관과 별개로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토악질이다. 그녀는 그것을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토하는 거지? 편지를 보냈나?’
새를 데려가라고 해서 새 자체만 생각했지 전령조로 왔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새가 뱉은 게 의외였다.
앙증맞게 꽃송이들이 달린 은방울꽃 한 줄기.
‘설마 그가 보낸 걸까?’
당연히 그가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보면 이리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해서 사이나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예요’
돌아온 시간 속에서 어쩌면 가장 큰 사이나의 목표.
설마 꽃말을 알고 보낸 걸까?
우연일지언정, 어쩐지 위로가 되는 선물에 사이나는 깊게 웃었다.
이 미소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을 콘스탄틴이 알게 된다면 매우 서운해했을 것이 분명할 만큼, 깊고 진하게 말이다.
사이나는 검은 새를 작은 주머니에 챙겼다. 정말로 살아서 숨을 쉬는 새가 아니다 보니 소지하기에는 편했다.
욜리는 저도 데려가라고 컁컁거리다가 ‘잠옷 파티인데도?’ 하고 묻자 조용해졌다.
“큐웅…….”
터벅터벅 돌아서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의기소침해 보였다.
이리 쉽게 포기하다니. 저번 잠옷 파티 때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하여튼 겪으면 겪을수록 신기한 녀석이다.
* * *
황녀의 초대장으로 성문 문지기를 통과한 사이나는 이내 황녀궁으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드보프가의 영애님.”
황녀궁에 도착하자 시종이 사이나에게 배정된 개인 방을 내주었다.
“짐을 정리하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시라는 황녀 전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저녁 만찬 때 다 함께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이따 모시러 오겠습니다.”
저녁 만찬 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데리고 온 하녀가 짐을 풀고 정리하는 동안 무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나는 산책을 하기로 결정했다.
‘황녀궁에 아마… 조각 공원이 있었지?’
황녀궁의 조각 공원은 꽤 유명했다. 아무나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할 정도로.
귀족들이 예술품에 투자하는 것은 흔한 일이나, 황녀는 유독 그림보다 조각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조각품들의 양이 상당하여 공원을 만들었을 정도라 들었다.
‘황녀궁에 초대받은 자의 특권이지.’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구경할 수 있겠나 싶어 사이나는 얼른 바깥으로 나섰다.
루퍼트 경은 황성 입구까지만 동행했다가 다시 돌아갔다. 아마 내일 귀가 때 다시 올 것이다.
호위기사라도 황궁에서는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는 데다가 여자들만의 행사이다 보니 어차피 들어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황성, 특히 직계 황족의 궁들이 있는 내성 쪽은 초청받은 자가 아니면 입성 자체가 불가한 데다 황성 기사단이 빈틈없이 근무를 서는 곳이니,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황족 자체가 위협이 될 때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탈바꿈 하겠지만…….
‘…황녀궁을 벗어나지 않으면 괜찮겠지.’
같은 황족이라도 각 궁은 그 주인에게 권한이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사이나만 초대받은 것이 아니고, 자신보다 더 권세가의 영애들이 함께 초대받았으니 아무리 황자라도 앞뒤 없이 저를 빼가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에…….”
그리고 그녀는 조각 공원을 구경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너무… 너무 좋잖아, 여기!”
상상 이상이었다.
전에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황녀는 그냥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사이나 못지않은 수호령 마니아가 틀림없었다!
간간히 다른 조각품들을 섞어서 배치해 두기는 했으나, 가장 눈에 띄거나 멋진 감상 위치는 수호령을 테마로 한 조각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 와아….’
다른 감탄사는 나오지도 않는다.
할콘, 모레프, 카니스, 아켈리온. 또 아켈리온, 이건 4대 공작 수호령이 세트로……. 할콘, 모레프, 할콘…….
‘확실히 전하는 할콘의 팬이 맞으시구나.’
아켈리온은 황가의 수호령이니까 아무래도 수가 좀 많은 것 같고, 그 외에는 할콘의 수가 가장 많았다.
저건 카니스, 할콘, 또 할콘, 그리고…….
‘에렌혼!’
에렌혼을 테마로 한 조각품이 보이자 사이나는 후다닥 걸음을 빨리해 가까이 다가갔다.
작품의 제목은 <비상>.
에렌혼이 날기 직전의 모습을 조각해둔 듯 두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고, 앞 다리는 허공으로 들려 있었다.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렌혼 특유의 우아함과 순백의 느낌을 굉장히 잘 묘사한 작품이었다.
‘아, 에렌혼 단독 작품이 아니네.’
바로 뒤에 모레프가 다른 방향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흑과 백의 대비, 비상하는 방향의 대척점이 포인트로 보이는 작품이었다.
‘모레프도… 묘사가 훌륭하네.’
근데 모레프는 실물을 본적이 있어서 그런지 작품과 실물 사이의 괴리가 좀 느껴졌다.
형태의 문제라기보다는 풍기는 분위기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이런 예술작품은 창작자 개인의 해석이 반영되는 것이다 보니,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쁘진 않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그보다는 에렌혼이나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어!”
보였다. 중간중간 놓인 관목 저 너머에 하얗게 빛나는 갈기가!
사이나는 가는 길에 놓인 다른 조각품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목표점을 향해 걸었다.
에렌혼이 눈을 감은 채 관목 잎사귀 사이에 코를 묻고 있는 형태의 조각이었다.
향기를 맡는 모습인가?
일부러 저렇게 형태를 잡아 배치를 한 섬세함이 돋보였다.
저 관목은 항상 에렌혼의 콧잔등 높이를 유지해야 하니 아마도 자주 관리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에렌혼의 특성 중에 풀 냄새를 좋아한다거나, 뭐 그런 게 있는 걸까?’
작품은 엄청나게 섬세했다. 마치 실물 그 자체처럼 보이는 게 조각가가 에렌혼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조각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리되자 이 작품의 제목이 궁금해진다. 사이나는 작품명이 음각되었을 표지석을 찾았다.
‘어디 있지?’
작품의 정면과 측면, 있을 법한 자리를 다 둘러보았으나 잔디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사이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아까만 해도 눈을 감고 있던 조각품이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모자라, 관목에서 코를 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천천히 갸웃하며 기울어졌던 조각품의 머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더니, 이번에는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조각품의 콧잔등 위로 가느다란 터럭의 느낌이 섬세하다. 한번 쓸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밀했다.
대체 이 무슨 일인가. 꿈을 꾸는 걸까?
몽롱하고 묘한 분위기 속에서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손을 올려 조각품의 콧잔등 가까이 가져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