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 밤에서 비롯된 오해가
더 늦기 전에 황도 쪽으로 이동하려고 준비 중에, 우즈 집사장이 찾아왔다.
“우즈? 무슨 일 있어요?”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요?”
집사는 네모난 은쟁반을 내밀었다. 거기에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서신은 아닌데.’
사이나는 그것을 가져와 펼쳤다.
“청구서네요? 샤를리즈 부티크.”
계절별로 알아서 드레스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고, 우즈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게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 과청구라도?
음, 과청구는 아닌 것 같은데. 액수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여긴 샤를리즈 부티크 아닌가.
“구매자를 확인해 주십시오. 혹시 몰라 확인차 보여드리는 거니, 맞는지만 보시면 됩니다.”
“…어?”
그러고 보니 아래쪽에 따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구매자 - 엘리자베스 발데즈.]
아, 내 드레스값이 아니구나.
‘청구는 내 앞으로 해. 원하는 부티크 가서 맞추고 결제 때 이거 주면 돼.’
문득 전에 엘리자베스의 드레스를 욜리가 물어뜯는 바람에 자신의 인장 카드를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샤를리즈 부티크를 갈 줄이야….’
사이나는 청구 내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 벌도 아니고 연회용 드레스로만 다섯 벌(드레스 중 연회용이 가장 비싸다). 그것도 모자라 각 드레스별 소품까지 세트로 모조리 구매했네?
저번에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새 옷들과 소품들도 궤짝으로 챙겨줬는데, 그 비싼 샤를리즈 부티크에서 다섯 벌이나 맞춰 입다니….
‘좀 어이가 없네.’
그렇다고 어쩌랴. 가서 따질 수도 없고.
어쨌든 인장 카드를 준 건 자신 아닌가. 원하는 데 가서 맞춰 입으라고 한 것도 자신이고.
“하…. 맞아요. 내가 사라고 했어요. 저번에 이쪽 실수로 엘리자베스의 드레스가 망가졌거든요.”
물론 다섯 벌이나 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정말 혹시나 해서 왔던 우즈는, 그녀의 확인을 받자마자 깔끔하게 물러갔다.
기분이 찝찝했다.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나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건가?’
그 이후 거의 절교했고, 방문도 막아버렸으니, 화가 나서?
근데 골탕 먹이려는 목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벌이라는 수량이 애매했다. 오십 벌쯤 되면 정말 골탕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다섯 벌은…….
‘…모르겠다.’
어차피 인장 카드야 일회성이니 청구서와 함께 회수되었을 테고, 그냥 지불하고 잊어버리면 끝날 일이다.
엘리자베스가 아니더라도 사이나는 지금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아가씨, 정말 제가 같이 안 가도 되겠어요?”
마차에 탑승하기 위해 포치로 나서는 사이나를 배웅하며 유모가 재차 물었다.
“응. 키키 언니랑 다들 와서 골라주기로 했는걸.”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친우들이 놀라 연락을 해왔다.
흔하지 않은 상황인지라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 걱정해오는 물음들에 사이나는 제 잘못을 깨달았다.
‘서운했겠다.’
먼저 연락을 해줬어야 하는 건데, 사이나 스스로도 요즘 정신이 없어 생각을 못 했다.
사실 사이나도 콘스탄틴의 행보를 몰랐기는 했지만, 그녀들은 모르는 사실이니 충분히 서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근데 서운함보다 걱정이 먼저였다.
그 마음들이 서신에 느껴져서 사이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함께 웨딩드레스를 골라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다른 준비야 크레이머 쪽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웨딩드레스만큼은 오롯한 신부 쪽 권한이고 결혼식 당일까지 신랑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흔쾌히 수락들을 한 친우들과 부티크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 오늘이다.
“그분들 안목이라면 믿을 수 있죠. 잘 맞추고 오셔요, 아가씨.”
“응.”
“가격 생각하지 마시고, 가장 예쁜 것만 생각하시면 돼요!”
“알았어.”
“저녁에는 타운 하우스에서 묵으실 거죠?”
“시간상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그럼 저도 그쪽으로 이동해 있을게요.”
“유모 마음대로 해. 이쪽에 할 일 있으면 내일 와도 되고.”
“네. 알았어요.”
“올 때 욜리나 좀 챙겨와 줘.”
또 떼어놓고 간다고 난리 법석을 부리겠지만 타운 하우스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데려가기가 좀 그랬다.
“알겠어요.”
* * *
델본을 떠난 마차가 황도를 향해 달렸다.
“경. 속도 좀 높일 수 있어요?”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어쩐지 평소보다 느린 듯하여 물었다.
“그저께 내린 비에 아직 땅이 무릅니다. 속도를 빨리 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이런. 벨류아 고서점엔 못 갈 것 같네. 내일이나 가든지 해야 할 듯하다.
아니면 시종더러 찾아오라고 할까.
서적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대금을 치르려고 한 건데, 사실 확인 작업을 굳이 하지 않아도 할아범의 일 처리는 믿을 만했다.
‘음. 그러는 게 낫겠어.’
그녀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더니 루퍼트가 자신의 말을 마차 옆으로 붙여왔다.
“아가씨.”
“네.”
평소와 달리 진중한 얼굴이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요.”
“…….”
그리고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경? 할 말 있으면 해도 돼요.”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려 그녀와 함께 탄 하녀 쪽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아닙니다.”
“……?”
“공기가 차니, 창을 너무 오래 열어두시면 좋지 않습니다.”
“음. 알았어요.”
마차는 한참을 더 달려 황도 내로 들어섰다. 잘 다져진 도로에 들어서자 승차감이 달라지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다시 얼마간 이동한 마차가 로하튼 거리에 도착했다.
“아가씨. 내리시지요.”
“네.”
문이 열리고 루퍼트가 그녀가 내릴 수 있게 도왔다. 뒤이어 하녀까지 내리자 마부가 마차를 이끌고 보관소 쪽으로 사라졌다.
샤를리즈 부티크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루퍼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 기색에 사이나는 자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그가 자꾸 제 하녀 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밀라.”
“예. 아가씨.”
“마차에…… 음, 내가 뭘 좀 놓고 온 것 같은데.”
“예? 제가 얼른 다녀올까요?”
“응. 그래 줄래? 손수건을 챙겨온 것 같은데 없어서 말이야. 바닥에 떨군 것 같기도 하고…….”
“네. 제가 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그래. 부티크에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그리로 오렴.”
“네.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걸음을 옮기는 스밀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시선을 루퍼트에게 옮겼다.
“자, 이제 말해 봐요. 경.”
“…일부러 보내신 겁니까?”
“그래요. 경이 그런 기색을 보였잖아요.”
“…….”
루퍼트는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무례일 수도 있으나… 꼭 여쭈고 싶습니다.”
“네. 말해요.”
“혹시 그때,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시지요?”
“그때요?”
“폭설 있었던 날 말입니다. 그때 어떻게든 제가 모셨어야 하는 건데. 며칠이나 고립이 되는 바람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
“아가씨. 정말 원해서 하시는 결혼, 맞으십니까?”
음. 그날이 여럿의 오해를 산 모양이네.
그 사건이 콘스탄틴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과는 상관없었다.
사이나는 차라리 피식 웃어버렸다.
“…아가씨?”
“무슨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상한 생각 그만해요.”
“…….”
“급하게 결혼하는 사정은 공작님 때문이 아니에요.”
“…예? 그게 무슨.”
사이나는 말을 어찌할지 고민했다. 황실과 관련된 부분이라 확실히 조심스러웠다.
“자세히는 말을 할 수 없어요. 다만….”
“…….”
“드보프가가 대항하지 못할 만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드보프가는 백작 가문이기는 하나, 중앙 귀족이자 유력 가문이다. 그런데 대항하지 못하는 일이라니.
루퍼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분의 그늘 아래라면, 충분히 훌륭한 선택이거든요.”
황자가 포기한다면 말 그대로 그냥 끝날 일이니 루퍼트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
이미 공작부인이 된 사람을 제아무리 황자인들 어쩌겠는가. 그래서 헤베타 건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결혼하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사이나는 진심임을 표하기 위해 미소 지었다.
“그분은 제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분이고, 정말 잘 대해주세요.”
“정말이시지요?”
“네. 제가 좋아서 하는 결혼 맞으니까 경도 그런 걱정은 말아요.”
루퍼트는 한참이나 사이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헐렁한 모습으로 돌아와 킬킬 웃었다.
‘흠. 전생에도 호위기사를 데려갔다면…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사이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보나 마나 조지 홀랜더가 둘의 사이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발언을 하며 기사를 내보내려고 괴롭혔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물리적인 부분에 있어 그녀에 대한 태도는 분명 조금 더 조심했을 것 같다.
그렇게 어이없이 죽지도 않았을 것 같고.
‘지나간 일이라 어차피 쓸데없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그럼 아가씨.”
이어지는 루퍼트의 말에 사이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결혼 이후에 절 데려가실 예정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어…….”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건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방금 지나간 때에 관한 가정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조지 홀랜더 얘기고, 콘스탄틴은 그런 성품이 아니니까.
“아무리 그분이 신사라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하다못해 부부 싸움을 했을 때라도 자기편은 꼭 필요한 법입니다.”
“지금 부부 싸움을 하면 경이 제 푸념을 들어주겠다는 얘기에요?”
“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경이 바람둥이라는 거요?”
“…아니, 연애 박사…….”
루퍼트가 당황해서 제 별칭을 정정했다.
“연애 박사는 연애에만 능통한 거 아니에요? 결혼한 부부 사이 상담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