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도 남자는 남자로군
‘-사이나?’
그녀에게 심어둔 그림자에게서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모레프! 칼리고!”
그는 즉시 힘을 개방했다.
-으악! 싫다! 싫어어어!
상황상 사이나에게 갈 것이 분명해 또다시 뻗대기 시작한 칼리고의 힘을 강제로 일으키며, 콘스탄틴은 모레프의 위로 올라탔다.
날아가다시피 허공을 내달렸다. 수호령의 힘을 쓸 때의 그는 기실, 마차나 말을 탈 때보다 몇 배 빠를 수 있었다.
그저 함부로 남에게 내보일 만한 힘이 아니기에 쓰지 않을 뿐.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신호가 오는 방향으로 전속력을 냈다.
어차피 날씨가 지나치게 궂어 밖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문제 될 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얼마간 달렸을 때, 콘스탄틴은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은 것 같군.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데.’
그래도 온 김에 콘스탄틴은 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숨어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얇은 옷차림을 보니 말을 타고 나갔던 것은 아닌 듯한데 마차가 없었다.
‘왜 저리 딱 붙어서는…….’
그 와중에도 기사와 몸을 딱 붙이고 같은 말에 올라타 있는 것이 거슬렸다.
‘힙스가 왜 신호를 보낸 거지?’
그가 그녀의 그림자에 심어둔 힙스는 몇 가지에 외부 자극에 반응하도록 명령을 해둔 상태였다. 그녀의 비명이나 일정 강도 이상의 충격, 그리고 그 외의 맹약자가 접근했을 때 등이다.
하나 콘스탄틴의 눈으로 살펴본 그녀는 추운지 안색이 파르랗기는 했으나 특별히 크게 다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박 때문인가.’
잠시 더 관찰하자 그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의 일행은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으로 인해 마차를 잃고 황도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있는 중인 것 같다고.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 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그늘에 머물렀다. 기왕 온 김에 안전하게 타운 하우스까지 돌아가는지 까지는 확인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일행 앞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우연에 기대어 마주칠 수 있다고 여길 만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사이나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계속 그리했으리라.
-으엑. 피 냄새가 이렇게 맛없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야. 가까이 가지 말아라! 주인아아!
사이나는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숲속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내렸다. 그러고는 건물 잔해를 치우다가 손을 베인 것 같았다.
-으에에에엑! 역하다! 역해! 냄새나!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정말… 어찌 매번 이리 무모한가.’
그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잔해들이 제멋대로 깔린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을 보자, 콘스탄틴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떨어지려던 참입니까.”
“……고, 공작님?”
넘어지기 직전의 그녀를 안아 세우고 건물 더미에 끼인 그녀의 발을 꺼냈다. 품에 안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는데, 추위에 질려 냉기가 도는 여린 몸의 느낌이 확연했다.
‘이리 뻣뻣하게 굳어 달달 떨면서, 누굴 구하겠다고…….’
기특하면서도 짜증이 난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을 물러서게 한 뒤, 칼리고의 힘을 이용해 쌓여있던 눈발을 날리고, 건물의 잔해들도 들어서 치워버렸다.
그러자 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기운을 살피니 다행히 죽지는 않은 듯싶었다.
급한 불은 껐으니,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
그에게 더 급한 것은 사이나다. 그녀의 파르란 안색은 시시각각 더 심해지고 있었다.
“경은 이들을 안전한 곳까지 이끌어 수습을 하게. 영애는 내가 모시지.”
사이나의 호위기사 역시 그녀의 안색을 보더니 이해했는지, 알겠다고 대답했다.
콘스탄틴은 얼른 그녀를 들어 모레프에 앉혔다.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 쏙 안기게끔 자세를 잡으며 방한 기능이 있는 망토를 앞으로 돌려 싸맸다.
“너, 너무…….”
“얌전히 있어요. 바람이 차니.”
체온이 낮은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깊이 안고 달린들 그녀에게 따뜻함을 전달해 줄 수는 없겠지만, 망토가 바람을 막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 * *
갑작스러운 긴장감이 완화된 탓인지, 사이나는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상태였다.
콘스탄틴은 그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왔다.
그의 집이 약간이나마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대외적인 핑계고, 실상은 사심이 더해진 결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드보프 저택으로 데려갔다면 그저 그녀를 데려다주고 끝이다.
그럼 혹시 사이나가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손의 상처는 잘 치료했는지, 자세하게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끙끙대기만 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핑계를 삼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해.”
“각하?”
갑자기 모레프를 타고 나타난 것도 모자라, 품 안에 누군가를 안고 있는 그를 보고 사용인들이 깜짝 놀랐다. 로이터가 나타나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는 지시를 내렸다.
“위층 욕실 욕조의 물을 채우고, 식으면 계속 더 보충할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충분히 준비해 올리도록 해라!”
“예!”
사이나의 피부가 심하게 차가웠다. 손에 난 상처는 긴소매가 피와 엉겨 얼어붙어서 대충 보기에도 아주 심해 보였다.
그는 단숨에 그녀를 안아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그녀를 깨워야 할까, 고민했으나 차가워진 몸을 녹이는 게 더 급하다는 자각이 들자 고민을 할 것도 없었다.
그는 겉옷만 벗고 그대로 옷을 입은 채 그녀를 안고 들어갔다. 두 명분의 부피가 욕조를 채우자, 그만큼의 물이 넘쳐흘렀다.
공작은 상처 난 그녀의 손 부분이 물에 담기지 않도록 잡아 자세를 잡아주며, 몸이 충분히 물에 잠기게끔 가두어 안았다.
의식을 잃고 완전히 무방비하게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작은 몸에 꾸준히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골고루 몸이 녹을 수 있도록 했다.
물에 잠기지 않은 볼과 목덜미에는 그가 손으로 물을 퍼서 부어주었다. 슬쩍슬쩍 닿는 피부가 보드라워서,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잠꼬대를 하듯 웅얼대던 사이나의 목이 한쪽으로 툭 떨어졌다.
젖혀진 목덜미가 하얗게 눈앞에 드러나자 콘스탄틴은 어쩐지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태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묻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유혹은 매우 강해서 계속 그를 끌어당겼다.
“후.”
확실히, 나도 남자는 남자로군.
그 가느다란 목선에서 향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어, 그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언 몸을 녹이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깼습니까?”
다행히 얼마 후에 사이나가 깨어났다.
그는 그녀의 팔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유의하며 그녀를 욕조 바깥으로 꺼내주었다. 시리도록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은 다행히 잘 처치가 된 듯 보였다.
경과를 좀 보기는 해야겠지만, 당장 감기나 폐렴 등으로 번질 위험은 없어 보였다.
하녀를 불러 그녀가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후, 콘스탄틴은 왜 그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왔는지 설명했고, 그녀의 손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매끈한 상처가 아니라 이리저리 찢긴 열상이라 치료 포션의 성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단번에는 고쳐지지 않았다.
불긋하게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을 보고 그는 그녀의 손을 붕대로 둘둘 감아버렸다. 손을 섣불리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필요한 수발은 내가 돕지요. 그대는 손이 잘 낫도록 푹 쉬기나 해요.”
이 여자는 너무 자주 다치는 것 같다. 특별히 사고 치는 것을 좋아하는 유형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상한 노릇이다.
어찌 되었건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기에는 좋은 핑계가 생겼다. 그는 말 그대로 영·유아를 돌보듯이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다시, 아- 하세요.”
그리고 그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멀쩡한 다른 손이 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유아 퇴행도 아니고! 주인아! 네 지능은 아직 멀쩡한 거 맞지, 응?
……시끄럽다. 이 새끼야.
그의 영역 안에서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그만을 오롯하게 바라보는 사이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굳이 접촉을 바라지 않고 칼리고의 수다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큼 편안함을 주었으므로.
그리고 그 밤.
-아니 방이 이렇게 넘치는데 왜 옆방이냐! 냄새가 지독하다! 설마 정말 저 여자를 부인으로 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여자가 저리 싫어하는데 왜 이리 질척거리는 게냐! 주인아! 자고로 남자는 오는 여자 막지 말고 가는 여자…….
닥쳐라, 좀. 이 새끼야.
미친 듯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칼리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꽉 채웠으나, 그보다 그의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옆방에서 사이나가 자고 있다는 사실이랄까.
손님방을 두고서 굳이 제 옆방, 더 정확히는 공작부인의 방에 그녀를 눕혀둔 그는 그렇게 행동한 자신의 심리에 대해 들여다보게 되었다.
저 방의 주인. 곧 자신의 부인.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한다.
‘나쁘지 않아. 아니 되레….’
그것을 바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련님께서 결혼하시고, 예쁜 가정을 꾸미시는 것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저는 정말 여한이 없어요.’
유모의 소원만 아니었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유모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면…….
사실 콘스탄틴도 결혼 따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이나처럼 극렬하게 비혼으로 살겠다는 느낌의 결심이 아니다.
다만, 그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크레이머가의 후손이 가져야 할 의무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맹약에 대한 거부감 사이에서 그가 가야 할 길을 말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은 부가적인 것, 의식적으로 미뤄둔 주제였다고나 할까.
‘결혼이라…….’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의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사이나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부가적인 것 선택이 될 것 같다는…….
“흐으…….”
이런저런 상념으로 눈은 감고 있으나 잠들기는 요원하던 중에, 콘스탄틴은 미세한 울음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