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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92화 (92/233)

92화. 봄날 같은, 음험한 단잠

“내 감정이 어떠하든, 자네에게 말할 것은 아니지.”

“…….”

“자네는 말할 것도 없이 분명 사이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만.”

“……전!”

그때, 남성 휴게실의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어, 카이언? 여기 있었어? 각하도 계시네요.”

사이나가 갑자기 들어왔다. 그녀의 오라비와 애크로이드 영애도 함께였다.

눈앞의 애송이가 당황했는지, 귓가가 붉어졌다. 왜 저리 얼굴을 붉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문제는 순식간에 잊혀졌다.

사이나가 도로 나가려다 들고 있던 커다란 나무함을 떨궈서 내용물이 다 드러났는데, 딱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보낸 선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호화로운 종류의.

“이거 에틸렌느 작품 같은데?”

에틸렌느라니. 여성용 부티크에서 옷을 맞추지 않는 그로서도 그 이름은 알았다.

‘…애송이 따윈 문제도 아니었군.’

황자다. 저번에 보란 듯이 자신 앞에서 춤을 추며 부아를 돋우더니, 드레스 선물까지? 웬 수작이지?

‘그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면 그저 우연인가.

차를 엎었던 것이 정말 실수인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것 같은데, 직접 본 것이 아니다 보니 그 부분은 콘스탄틴이 확인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이나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철벽을 치던 것은 아주 양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놓고 싫어하는 느낌이 풍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더럽군.’

뭘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상당히 불쾌했다.

게다가 사이즈는 어찌 알고 드레스를 보내?

그가 사이나의 사이즈를 알아내어 드레스를 선물한 것처럼, 황자 역시 그럴 수 있음을 알면서도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여성에게 드레스를 선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살갗에 바로 닿을 드레스를 선물하며, 그것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황자가 무슨 추잡한 상상을 했을지 아느냔 말이다.

그 역시 드레스를 선물한 적이 있었던 건 편리하게 머릿속에서 배제시키며, 그녀가 자신의 경고를 알아듣기를 바랐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말해도 좋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얼마든지 돕도록 하지.”

부디, 부디 말이야.

황자의 관심은 절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거든.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사이나가 자신에게 와서 도움을 청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태껏 알게 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그에게 기대거나 무언가를 부탁할 확률은 희박했다.

‘힙스. 스며들라.’

그러니 나름의 방책이 필요했다.

콘스탄틴은 칼리고의 두 번째 사령인 힙스를 사이나의 그림자에 심었다.

-으아악! 싫어! 기분이 나쁘다아!

사이나에게 씌워진 기운이 칼리고의 기운과 상극인지 또다시 요란 법석을 떨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콘스탄틴은 엄중히 명령했다.

힙스는 사이나의 주변에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할 때, 그에게 경고해 줄 것이다.

* * *

영지에서 일이 터졌다.

녹각 마수가 출현한 것이다. 녹각 마수는 특수종이자 거대종의 마수로서, 수호령의 힘이 아니면 죽일 수 없다.

콘스탄틴은 급한 호출을 받고 서둘러 영지로 향했다.

“…두 마리, 라고 했나?!”

녹각 마수는 군집형 마수가 아니다. 보통 단독으로만 활동한다. 한 번에 두 마리가 이렇게 민가에 가까운 곳에 출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기사단을 데리고 서둘러 출전했다. 기사단이 잡마수를 잡는 동안 콘스탄틴은 녹각 마수와 사투를 벌였다.

한 마리 잡기도 어려운 놈인데 두 마리가 같이 공격해오니 처리가 쉽지 않았다. 칼리고의 힘을 최대한 개방했음에도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렸다.

“각하!”

결국 상처를 입었다. 기사단장이 놀라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다! 그쪽 방어선이나 잘 지켜!”

자칫하면 녹각 마수의 뿔에 옆구리가 뚫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그래도 길게 찢긴 상처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몇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녹각 마수를 해치운 콘스탄틴은 완전 녹초가 되었다.

“녹각을 회수하고 사체 처리는 확실히 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이 녹각 마수의 녹각이 치료 포션을 만드는 기반 재료였다. 그래서 드물게 출현하는 녹각 마수를 평소에는 꽤 반기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 두 마리가 한 번에 출몰한 거지.’

이러다 세 마리, 네 마리가 같이 군집하기라도 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안일하게 출전했다가는 같이 죽을 판이다.

혹시 모르니 미리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할 것 같았다.

“각하! 피가…! 이봐라! 얼른 목욕물을 준비하고 치료 준비를 하도록!”

피에 붉게 물든 전투복 차림새로 크레이머 성에 도착하자, 가신들이 난리가 났다.

콘스탄틴은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씻은 뒤, 상처 포션으로 옆구리를 치료했다. 상처가 깊어 붉은 파열 자국이 남았다. 며칠에 걸쳐 약을 발라야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녹각 마수에게 입은 상처를 녹각 마수 포션으로 치료하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군. 이걸 알면 그 마수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기절하듯 희미한 의식에 잠겨 들었다.

-주인아, 괜찮냐? 주인, 죽냐? 정말 죽었냐? 왜 대답이 없는 거냐? 주인아? 주인아?

지친 콘스탄틴은 칼리고가 의식 깊은 곳까지 비집어 밀어 넣는 상념을 막을 힘이 없었다. 상처까지 입은 터라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의식이 열렸다.

그 사이로 칼리고는 끝도 없이 중얼거림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네 조상 중 5대 전 주인이 나한테 말을 했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런데 내가 그때는 입을 다물었지. 중얼중얼…….

…돌겠군.

지독하게 피곤하고 지쳤음에도, 가수면 상태에서 더 깊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반은 의식이 있고, 반은 없는 그런 상태로 그저 어딘가를 끊임없이 부유하는 느낌.

그런 상태가 오히려 더 괴로워서 차라리 깨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또 말을 듣지 않았다. 체력이 다 되어서인지 정신력도 바닥이었고, 그 헐거워진 제어를 벗어나 칼리고는 더욱 날뛰었다.

몸이 시체처럼 차가워져 갔다. 혼자서 겨울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사이나….’

자연스럽게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몸을 온통 감싸고 있는 이 냉랭함을, 얼음 동굴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이 한기를, 그녀라면… 보듬어줄 수 있지 않을까.

제게 다른 계절을, 선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꽤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가수면 상태로 부유하다가 겨우 깨어났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화요일입니다, 각하.”

꽤 오래 누워 있었군.

그렇지만 전혀 개운함은 없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은 치료 포션을 한 번 더 바르고, 몸 상태를 정비했다.

수요일이 되기 전에 깨어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또 황도 가냐! 주인아! 황도 좀 그만 가라아!

질색하는 칼리고의 힘을 일으켜 워프 게이트를 탔다. 그것만으로 또다시 체력이 바닥을 찍었다.

그런 최악의 컨디션으로 콘스탄틴은 다음 날을 기다렸다.

어차피 자도 제대로 잠들 수 없는 상태다. 칼리고를 제어하려면 최상의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도 모자라다. 그런데 하물며 이런 상태라면…….

적당히 서류나 들추며 집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사이나가 올 시간만을 기다리자니,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온다는 것을 칼리고도 아는지라,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더 날뛰어댔다.

-너 같은 주인은 처음이다! 매번 날 이렇게 구박하고 싫어하는 일만 하다니! 우리의 맹약은……. …네 조상들은 대대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콘스탄틴은 집무실 테라스로 나갔다.

겨울바람이 피부를 할퀴며 불어댔다.

지독한 한기. 하지만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차라리 이 고통스러움이 나았다.

그 시린 바깥에서 테라스 의자에 앉아 그렇지 않아도 차디찬 피부가 얼어붙을 것 같을 때까지 몸을 방치했다.

또다시 의식이 반쯤 잠겨 들었다.

-주인아! 중얼중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의식을 치고 들어왔다.

“각하, 감기 걸리세요. 안에서… 앗!”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던 콘스탄틴은, 자신이 잡은 상대가 사이나라는 것을 알고 얼른 손에 준 힘을 풀었다.

“무심코 세게 잡은 것 같은데… 아프지는 않은가?”

그녀를 데리고 다시 따뜻한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로군.”

처음에는 맨살이 아니라 옷 위로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또 이렇게 가까이 앉느냐! 주인아! 남녀가 유별하다 하였다!

욕심이 생긴다. 맨살에 닿고 싶다.

콘스탄틴은 은근슬쩍 손목을 타고 내려와 손바닥을 맞대었다.

-주인…!

갑자기 머릿속에서 소음이 끊겼다.

숨 막히는 소음 속에서 살다가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건져진 기분. 지끈거리던 두통이 일시에 끊어져 나갔다.

‘아아…. 그래, 이 느낌.’

그를 둘러싼 공기조차 달라진 듯하다. 마치 겨울 산에서 갑작스럽게 봄날의 들판으로 훅 떨구어진 그런 느낌이었다.

벅찬 감각에 눈가를 부여잡고 있으려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 요 며칠 잠을 잘 못 잤더니 좀 피곤하군.”

“저 다음에 올까요?”

“아니야. 그대가 가면 더 못 자.”

“…네?”

“미안한데… 잠시만 이리 있어 줄 수 있겠나?”

“……여기, 이렇게요?”

“그대의… 온기가 필요해.”

정말 간절했다.

잠시만, 아니 조금만 시간을 내어 곁에 있어 주길 원했다.

그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사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 상냥함에 더 깊은 미소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눈이 감기는… 군….’

죽은 듯이 자고 싶었다. 그리고 사이나가 손을 잡아주고 있는 한은, 그게 가능했다.

콘스탄틴은 잡은 작은 손을 가슴팍에 꼬옥 품고 몸을 늘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삼십 분. 아니, 십오 분만… 자겠네…….’

의식이, 까무룩 하게 잠겨 들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맹약을 승계한 이후로 경험한 적 없는 단잠이다.

만족스럽기 짝이 없었던 그 단잠은 또한 꽤나 음험한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꿈을 포괄하고 있었다.

‘사이나?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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