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포장된 젠틀함, 그 이면에
“그럼…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될까?”
그리고 그는 이제 순수하게 이 감촉을, 감각을 즐길 수 있었다.
“난 체온이 낮은데 그대의 손이 따뜻해서…….”
그러기엔 그녀의 허락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안 되겠나?”
그는 빌다시피 요청했다. 불쌍하게 보여도 상관없었다.
공작인 그가 귀족 영애에게 보이는 지나친 저자세에 분명 부담스럽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저 피부에 닿아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사이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눈을 감으며 제 상태를 관조했다.
이 극명한 적요감…….
칼리고의 목소리는 완전히 잦아들었고, 그의 전신을 감싸듯 흐르던 한기까지 어떤 온기의 막에 쌓여 스며들 듯 사라진 듯하다.
아,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걸까.
근원적인 물음이 떠올랐으나, 사실 답 따위가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이리 닿아있을 수만 있다면.
콘스탄틴은 닿은 그 작은 손을 당겨 품 안에 가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있는 힘껏 스스로를 제어했다.
“하…….”
손끝에 닿은 요만큼의 온기로, 사이나는 그에게 세상에 없는 평안함을 선사했다.
그렇다면 절대 이 온기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
그의 내면에 한 여자를 향한 욕구가, 욕심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와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
여태 그 누구를 향해서도 느껴보지 못한, 스스로도 내심 놀랄 정도로 진득하면서도 집요한 욕구였다.
‘티 내선 안 돼.’
내면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흉포한 감각들을 잡아 묶으며 그는 인내했다.
포장된 젠틀함.
예의로 덧씌운 요청.
사연을 가진 듯한 남자의 가증한 안쓰러움을 무기 삼아 곁을 허락받았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나.
이 온기를 위해서라면.
* * *
사이나가 선사하는 안식 같은 고요의 시간은 점차 그를 중독시켰다.
한 주에 한 번. 불과 몇 분으로 시작했던 그 접촉은 차츰 길어졌다.
거의 매일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콘스탄틴이다. 그 짧은 평화의 시간 동안에나마 그는 단잠을 잘 수 있었고, 사이나는 그런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손 잡아주는 시간을 점점 늘여준 것이다.
‘아니, 차마 손을 못 놓은 것이겠지.’
그는 매번 매우 피곤한 티를 내며 잠들고는 했으니, 그 손을 차마 놓지 못하는 상냥함이 아니었겠는가.
그 상냥함을 이용해 이따금 그는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부러 티를 내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자는 척한 적도 많았다.
그는 사실 황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크레이머령은 거대했고,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주 황도와 영지를 오갔다. 수요일을 위해 나머지 날들을 매우 열심히 일했다.
마찬가지로 수요일을 위해 주말 내내 크레이머령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중에 전령새가 날아왔다. 황도 타운 하우스 집사장 로이터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각하.
황성에서 치료 포션을 요구하는 문서가 왔으나, 각하께서 황도에 계시지 않으므로 먼저 허가를 얻겠다고 답했습니다.
…중략…
그런 와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적습니다.
드보프 영애가 황성에서 열린 티 파티에 참석했다가 화상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이 서신을 보시고 답을 주시는 동안 알아두도록 하겠습니다.
- 로이터 드림]
…화상이라니!
콘스탄틴은 하던 일만 대충 수습하고 바로 워프 게이트를 탔다.
이리 금세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로이터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찌된 일이라던가?”
“…애크로이드 후작 영애와 드미트리 백작 영애가 주최하는 티 파티가 이번에 황실 명화의 정원에서 열렸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참석하셨고요.”
로이터는 그간 알아낸 정보들을 열심히 보고했다. 그 티 파티에 황자가 나타났고, 그가 사이나에게 차를 쏟은 장본인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포션을 요구한 황족이 황자인가?”
“예. 황자궁에서 온 것입니다.”
“흠.”
녹푸른 색의 치료 포션은 크레이머령의 특산품이다. 이것은 크레이머령에서 주로 출몰하는 마수의 부산물을 이용해서 제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 능력이 뛰어나서 굉장히 처리하기 힘든 류의 마수인데, 그 재생 능력을 어찌 이용할 수 없을까 하는 오랜 연구 끝에 개발된 것이라, 크레이머가에서만 생산되는 것이었다.
황가라 할지라도 일 년에 딱 한 병 상납할 정도로 귀한 물건인데, 그것을 황자가 한 병 더 요구한 것이다.
‘무슨 꿍꿍이지.’
황자가 개입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랄까, 황자의 등장이 절대로 우연일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포션을 한 병 가져오게.”
하지만 그걸 고민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황실에 보내실 것입니까? 맞춰 포장할까요?”
“아니, 직접 들고 갈 것이다.”
황가엔 언제나처럼 일 년에 한 병이다. 예외는 없다.
한 병을 더 원한다면 아무리 황실이라 한들,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알겠습니다.”
로이터는 금세 말을 알아들었다.
“옷도 새로이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준비할까요?”
“…그래.”
물론 눈치도 매우 빨랐다.
* * *
마음 같아서는 모레프를 꺼내어 타고 달려가고 싶었다. 그럼 날아가는 속도로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탔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나름의 타협이다. 준마에 올라타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다.
호위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맹약자에게 호위란 보여주기용일 뿐이니.
이번에도 갑자기 등장한 콘스탄틴 때문에 드보프가는 당황했다. 오늘은 유독 더 당황스러워 보였다.
안내조차 바로 하지 않고 어쩐지 미적대는 느낌이라, 그는 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으므로.
얼마 들어가지 않아 사이나가 보였다. 그는 대번에 가까이 다가가 머리끝부터 살폈다. 겉만 봐서는 어디를 다친 것인지 모르겠다.
“다쳤다 들었는데.”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이상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렸고 이내 비틀거렸다. 콘스탄틴은 얼른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일으켰다.
“…여전히 덜렁대는군.”
묘하게 자꾸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떨어지고 하는 것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뭐, 덕분에 매번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하지만 말이다.
보아하니 상처는 없는 듯했고, 어쩌면 그가 전에 주었던 그 포션이 도움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을 주고 가길 잘했다.
“…여긴 왜 오셨나요.”
하지만 사이나는 또 철벽을 쳤다. 철벽도 자주 당하니 내성이 생긴 것인지, 그는 눈치껏 행동하는 재주가 생겼다.
그리고 더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적당히 눈치껏 주는 신호는 사이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직이 최선일 때가 더 많았다.
콘스탄틴은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바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자신의 방문에 난감한 기색을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지인들이 잔뜩 와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애크로이드가의 영애의 눈치 빠른 합석 제안에 바로 응낙하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이나가 곧이라도 그를 내쫓을 눈치였기에 차라리 다행이었다.
‘애크로이드가의 애송이도 있었군.’
합석한다고 하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사이나가 저 애송이와 친밀한 시간을 나누었을 것 아닌가.
콘스탄틴의 입장에서야 카이언은 아직 풋내 나는 소년에 불과했지만, 사이나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그러다 보니 그가 애송이에 불과할지라도 견제를 하게 되었고, 자꾸만 사이나와 무슨 사이라도 되는 듯 의미심장하게(그리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어가 되지는 않았다.
“크앙!”
그러던 중에 전에 봤던 그 늑대 새끼가 또 난입해서 응접실 안을 어지럽혔고, 좀 있자니 어디 가문인지도 알 수 없는 라임 블론드의 영애가 나타나 또 분위기를 흐렸다.
흥미로운 것은 늑대 새끼가 라임 블론드에게 아주 극명한 적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수호의 기운을 가진 늑대가 저리 적의를 보인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해롭기 때문일 확률이 높겠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
늑대 새끼의 컁컁거림에 기절까지 해버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콘스탄틴은 그 인상착의를 머리에 새겼다.
그는 기절한 라임 블론드를 수습하느라 매우 어수선해진 응접실을 잠시 떴다.
늑대 새끼의 기운 때문인지 칼리고가 또 오두방정 괴성을 지르며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이다.
-으악! 이 짐승 새끼! 주인아, 여긴 악의 소굴이다! 얼른 돌아가자아아아!
지끈거리는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콘스탄틴은 남성 휴게실을 찾았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남성 휴게실에서 연초를 태우며 예민해진 심기를 다스리고 있을 무렵, 그 애송이가 들어왔다.
어딘가 비장한 표정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콘스탄틴은 애송이에게 앞에 앉으라 대충 끄덕여 허락하고는 다시 연초를 피웠다.
대강 예상은 가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각하께서는 사이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아니면 알면서도 그리하시는 겁니까?”
콘스탄틴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눈앞의 애송이를 바라보았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하나 싶다만, 저 결연한 표정을 보니 나름 진심인 듯 보여 입을 열었다.
“자네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구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예? 구애요?”
질문을 듣고는 갑자기 애송이가 얼굴을 붉혔다.
“진심이라면, 자신이 가진 조건을 모두 이용해야지. 바라만 본들, 아무것도 손에 떨어지지 않아.”
“……각하께서는 지금 사이나를 좋아하셔서 그러시는 거라고,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
“진심이시라고요?”
콘스탄틴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리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는 연초를 한 모금 더 빨았다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