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빈틈 발견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짐승도 아니고 수호령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령에 가까운데 사령과도 좀 달랐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호의 맹약…. 누군가가 수호의 맹약을 걸었다.’
이 짐승을 매개로 사이나에게 덧씌워진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정령의 냄새가 난다고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인 듯했다.
‘흐음. 흥미로운걸.’
자신이 그녀에게서 안온함을 느끼는 게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
어렴풋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종류의 힘이라 뭐라 단정하기가 힘들었다.
수호령이 없는데 수호의 힘이라?
‘드보프가의 역사를 들을 때, 좀 더 주의해서 들을 것을 그랬나.’
사이나는 신비 그 자체다. 단순한 흥미 수준은 진작 넘었고 정말 진심으로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짧은 소동 뒤에 둘은 집무실에 자리했다.
콘스탄틴은 이미 잠금을 풀어 둔 흑목 상자를 그녀에게 넘기며 이것을 해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음, 각하. 아를어 해석에 관한 일이라면 저보다 전문가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역시나 그녀는 의심을 표하며 물어왔다.
그는 그녀가 이리 물어볼지도 모른다고 미리 예상했으므로 뜨끔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었다.
“아를어 전문가들을 여럿 만나보았지만, 만족스러울 만한 실력을 보지는 못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집에서 독학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아를어 실력은 뛰어났다.
“게다가 이것의 해석 작업은 나름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라서 말이야. 외부에 의뢰하는 건 아무래도…… 흠.”
이 역시 사실이다. 유적지의 비고 입구가 적힌 내용이 해석되어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사심이 아주 많이 섞여 있는 의뢰지만, 공적인 이유도 분명 있었다.
“…저랑 소문나실 수도 있는데요.”
“…….”
그는 내심 ‘난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면 더 좋지.’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저 말을 콘스탄틴은 ‘나는 공작님과 소문나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해석했으니까.
여태까지의 철벽으로 미루어보아 그리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그녀가 안심할 만한 방향으로 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취미 수준으로 공부를 한 것뿐이라 사실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완벽하게 번역을 할 수 있을 거란 장담은 못 드려요.”
“그 부분 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어도 충분해.”
사실 해석 작업은 수단일 뿐이다.
수백 년간 어떤 가주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자신의 대에 저게 해석되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도 않았다.
“기간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편한 속도로 진행해 주어도 괜찮네. 다만, 이 물건은 외부로 반출이 불가하니…… 시간 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작업을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원하는 것은 정기적으로 그녀를 만나는 것. 그것뿐이었으므로.
“아, 그럼… 매주 방문을 할까요? 어느 요일이 편하세요?”
매주! 그는 내심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간 쌓아왔던 인내심을 발휘해서 교양인처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이 상자는 나만이 열 수 있어서… 내가 있는 날 방문해야 하네. 혹시… 불편한가?”
그렇지. 나만 열 수 있지. 뭐, 미리 열어두는 방법도 있지만 보안을 필요로 하는 물건이니까, 꼭 함께해야 하는 거라네.
“아니에요. 음… 바쁘실 텐데 제가 최대한 조용히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그대가 찾아와 주는 것은 내게도 기쁨이니.”
진심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반응을 모른 척하며 요일을 선포했다.
“수요일이 좋겠군.”
수요일.
그리하여 수요일은, 한 주 중 그가 가장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 * *
그렇게 몇 번의 수요일이 반복되는 동안, 예민한 길고양이 같던 사이나의 경계심은 꽤 많이 누그러들었다.
다행인 일이다.
그저 만날 핑계가 필요해서 만들어내다시피 한 일거리에 굉장히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니 좀 찔리기는 했지만.
보석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고 두터운 서적을 뒤져가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 정말 아를-프로메사 애호가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저 핑곗거리로 번역 작업을 넘겨준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진지했다.
‘…도무지 말을 걸 타이밍이 보이질 않는군.’
초반 몇 주간은 그렇게 집무실에서 같이 앉아서 일만 하고 헤어졌다.
대체 이게 뭘 하는 거냐며 스스로의 애송이 같음을 자학하게 될 무렵, 빈틈을 발견했다.
그녀에게서 시선이 느껴졌다.
관찰에 가까운, 심지어 얼굴 어딘가를 뜯어보는 것 같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제 몸에 감겨든 그 시선에 왠지 모르게 입 안이 말라갔다.
그는 계속 일을 하는 척 행동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읽고 있던 서류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이미 휘발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콘스탄틴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차 한잔할까?”
드디어 말이라도 섞어볼 수 있겠군.
“…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약간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어찌 그런 것을 제의할 수가 있느냐, 뭐 그런 뜻인가?
그는 속으로 당황했으나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배인 침착함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 있었다.
초반 반응은 좀 이상했지만 다행히도 이내 승낙했다.
콘스탄틴은 수호령의 힘을 이용해 얼른 집사에게 전령을 보냈고, 다과를 준비해 올리라 일렀다.
그녀를 소파 쪽으로 이끌어 앉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터가 티 세트를 가지고 왔다.
매주 있는 사이나의 방문을 그가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로이터가 다과를 신경 써서 미리미리 준비해둔 게 확실했다.
-주인아… 너무 가까이 앉지 마라. 남녀가 유별하다. 그리고 먹을 것은 나도 필요하다…. 내 양식은 언제 채워 줄 것이냐….
오늘따라 칼리고는 어쩐지 힘없는 말투였다. 꿍얼꿍얼대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그는 찻잔을 들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요.”
로이터 덕분에 사이나가 오물오물 맛있게 디저트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것이 들어가서인지 사이나의 태도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아서 로이터의 준비성에 대해 속으로 칭찬을 하고 있을 무렵.
“공작님도 좀 드셔보세요.”
그녀가 제게도 그것들을 권해왔다.
그는 순간 굳었다.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입 안에 달달한 것들이 들어와 녹아내릴 때의 느낌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치미는 듯했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이 달착지근한 냄새조차도 역했으리라.
그만큼 그는 단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 등에 문양을 새기느라 아파서 울다가 깨어나면 보상처럼 주어지던 사탕과 케이크. 달달한 것들.
단내는 그에게 무력하고 고통스럽던 어린 날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그녀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불호 정도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저 단내가 그녀의 철벽을 조금이나마 녹였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음, 공작님은 왜 항상 장갑을 끼고 계세요?”
……너무 많이 녹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리 훅, 치고 들어올 줄이야.
전부터 느낀 건데 이 영애는 보기보다 꽤 당돌한 면이 있었다. 정적인 듯 보이지만 절대 소심하거나 내성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 부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말이다.
‘어쩔까.’
보통 그는 그런 질문을 받아도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빤히 그 질문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알아서 질문을 회수하며 죄송하다고 물러섰으니.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 적당히 꾸며댈 것인가.
‘우선, 던져보자.’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의 얼굴에서 후회의 기색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난.”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에게 섣불리 내밀 수도, 만지게 할 수도 없었던 손이다.
그 손이 제게 속삭이는 것 같다.
‘넌 누구와도 닿을 수 없는 그런 놈이야.’라고.
‘과연 그녀는 괜찮을…… 음?’
사이나가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기대에 찬 그런 표정으로.
저 표정은 뭐지. 설마…….
-주인아! 뭐 하냐! 저 여자 이상하다! 떨어져! 떨어지라구! 훠어이!
“보고 싶나?”
왜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느냐 물었지. 이 가죽 아래 무슨 커다란 비밀이 있을까 봐, 그게 보고 싶은 건가?
“보고 싶다면 보여줄 수 있는데.”
저 반짝거리다 못해 열의마저 띤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여태 한 고민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잡아 보게.”
이건 도박이다. 자신 역시 가장 알고 싶었던 질문이 이거 아닌가.
-아니, 이 여자야! 훠어이! 외간 남자의 손을 함부로 잡다니! 예법도 모르냐! 저리 가라!
“그대가 한 질문의 답을 알 수 있을 테니.”
내 손을 잡아 보고, 알려다오.
괜찮다고 말해다오.
-주인아! 아무래도 이 여자 신분 상승을 위해 주인을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끼를 부리다니! 요주의 인물…….
그리고 그녀의 손이 닿았다.
겨우내 얼어붙은 고드름에 들이닥친 봄날의 훈풍처럼, 그녀의 온기가 닿았다.
그 느낌이 환장하게 좋았지만 생각 없이 음미할 상태는 아니다. 콘스탄틴은 내심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
역시나 추워하는 것 같지는 않고… 불쾌한 것 같지도 않다.
사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가만히 잡고 있던 손을 마구 만져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던 그의 몸이 보드라운 손길에 흠칫, 흠칫 굳었다.
“…괜찮나?”
그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약간 서늘하기는 한데… 공작님은 북방 쪽 분이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글쎄. 남들은 내 피부가 지나치게 차갑다 못해 닿았을 때 오싹하다고 하더군.”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저 표정.
“정말 괜찮은 거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와 닿아도 괜찮아.
그는 순수하게 기뻤다. 참지 못한 미소가 얼굴에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