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핑계로는 차고 넘치지
그는 공작이다. 미혼인 데다 외모도 수려했다. 가문은 부유했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엄청나게 꼬여 들었다. 특별히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가오는 여자들을 쳐내는 것만으로도 매우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빴던 경험은 지금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포기할 수는 없고.’
너무 대놓고 미끼들을 투척한 탓인지 오히려 경계심만 더 올라가는 것이 보여서 고민하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겠군.”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그는 차라리 솔직해지기로 했다.
“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녀가 잘 보아줬으면 좋겠다. 이 말은 진심이다.
“부디, 날 잘 보아주게.”
자신이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음을 어필하고, 콘스탄틴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더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으니, 이쯤에서 적당히 공간을 주는 것이 낫겠지.
그리 판단하고, 그는 어느 정도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웬 놈의 날파리 새끼들이 이리 많아.’
사람 눈은 다 똑같은 것인지, 온갖 잡놈들이 그녀의 손 한번을 잡아보겠다고 모여들었다.
‘장갑을 선물하길 잘했군.’
순전히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이었으나, 사이나는 다행히 그가 선물한 장갑을 끼고 벗지 않았다.
-주인아! 내가 볼 때 날파리는 주인 너인 거 같다!
“…….”
-저 여자는 주인을 싫어한다. 매번 떨어지고 싶어서 난리인 거 안 보이냐. 불쌍한 주인아. 저 여자는 보내주고 다른 여자를 찾자, 응?
또다시 머릿속을 파고들며 앵앵대는 망할 놈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콘스탄틴은 멀리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시선으로 뒤쫓는 중이었다.
휴게실에 갔다 온 것인지 잠깐 홀에서 떠났던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어떤 놈이랑 춤을 추었는데, 자신과 출 때와 달리 표정이 아주 밝고 편안했다.
‘…데뷔탕트 때 파트너였던 어린놈 아냐?’
-주인아! 봐라!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것이!
“…….”
진짜 당장 실체화시켜서 죽도록 패주고 싶어지는군….
-내가 틀린 말 했냐!
“저 새끼가…….”
콘스탄틴의 입에서 나직하게 욕설이 새어 나왔다.
-주, 주인아! 내 비록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살벌해진 콘스탄틴의 기세에 칼리고가 꼬리를 내렸지만, 그의 관심사는 이쪽이 아니었다.
황자 길리언이 사이나의 팔목을 잡아끌고는 플로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길리언이 굳이 콘스탄틴 쪽으로 쪼개는 미소를 보내기까지 하는 것이, 심히 수상했다.
그는 황자와 사이나가 춤을 추는 것을 아주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기세에 주변 사람들이 차마 말을 걸지도 못할 정도로.
* * *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다.
콘스탄틴은 황도를 떠나 크레이머령으로 돌아와 평소같이 업무를 보고, 마수를 토벌했다.
크레이머령으로 돌아오자 칼리고는 신이 나서 더 미친 듯이 떠들어댔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꺼멓게 죽은 눈가를 하고 일어난 그는 침실 창가에 서서 잠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분과 달리 바깥은 참 맑기도 했다.
-주인아. 오늘도 토벌 갈 거냐? 오늘은 무슨 종을 잡으러 갈 거냐? 아니면 내일 갈 거냐?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또다시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몰랐다면 모르되, 그 고요함과 따뜻함을 경험해 본 이후라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황도로 갈까.’
황도로 간들, 무얼 어쩐단 말인가. 무작정 드보프가로 쳐들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리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정기적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주인아, 내 말 듣고 있냐? 애버딘령에는 아직도 마수가 많대냐? 거긴 왜 그리 많다냐? 도와주러 가는 건 어떠냐?
뭐가 있을까.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것으로…….
-유적지 뒤쪽에 협곡 마수들은 다 잡았냐? 또 생겨나지 않았을까? 주인아?
“…유적지!”
유적지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콘스탄틴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가는 거냐?! 유적지 근처 토벌 가는 거냐?!
칼리고가 신나서 오두방정을 떨어대는 동안 콘스탄틴은 집무실에 연결된 비밀의 방을 열었다. 벽에 고정된 책장 하나가 움직이며 숨겨진 공간을 드러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흑목으로 된 작은 상자다.
칼리고의 힘을 일으켜 흑목에 스며들게 하자 겉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엷은 빛이 그려지더니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커다란 블랙 다이아몬드가 잘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고 허공에 비춰 보았다. 빛이 투과되며 표면에 새겨진 글자들이 눈앞에 보였다.
‘아를어. 분명, 아를어지.’
사실 이 보석은 크레이머령의 마지막 고대 유산으로 알려진 유적지의 비고 입구를 여는 열쇠였다. 이는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비밀로서, 보석에 새겨진 내용을 해석하면 비고의 입구 위치를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유적이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이유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 강제로 문을 열었다가는 끔찍한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라는 경고가 보석과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석에 새겨진 아를어는 내로라하는 유수의 학자들도 학을 뗄 만큼 난해했고, 설상가상으로 세월이 흘러 <아를-프로메사> 시절과 멀어지며 잊힌 언어가 되어가면서 더더욱 해석의 가능성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도를 안 해볼 수는 없었다.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크레이머 가주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래. 이거다.’
콘스탄틴 그 자신도 아를어에 대해 꽤 연구를 한 편인데, 전에 사이나를 보니 그의 수준을 한참 웃돌았다.
‘핑계로는 차고 넘치지.’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서신을 작성했다.
조바심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필요한 일이 맞기는 했다. 보석에 새겨진 아를어의 해석은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주들이 애써 온 일이었으므로.
크레이머 전 가주가 다음 가주에게 가주직을 승계할 때 일인 전승으로만 알려주는 비밀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유적과 보석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인지 그저 오래된 전설인지는 모르지만, 유적 내에는 훗날 제국에 위험이 처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답이 열릴 것이라고.
“하.”
다행히도 승낙의 답신이 왔다.
근래 이렇게 마음 졸였던 적이 있었던가.
마수 십 수 마리에 둘러싸였을 때도, 이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크레이머가에 오면 아를-프로메사 시절의 골동품들을 보여줄 수 있고, 모레프도 바로 눈앞에서 보여주겠다며 온갖 보상성 조건들을 나열해 답신을 보냈다.
저 여러 가지 조건들 중에 뭐 하나라도 얻어걸리기를 바라며 말이다.
* * *
공작은 약속 전날 워프 게이트를 타고 황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씻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 밑에 거뭇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신경 쓰여 얼굴 여기저기를 눌러 마사지하며 단장에 신경을 썼다.
옷도 여러 번 벗었다가 입었다. 그의 의상들은 사실 다 비슷비슷하여 별 차이도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더 예쁘게 보이는(?) 옷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렸다.
왜 이리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인지.
집사에게 그녀가 도착하거든 집무실로 안내하라고 해놓고서도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해 그가 직접 아래로 내려갈 정도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내부로 들어서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또 저 여자냐! 주인아!
순간, 그는 그녀로부터 커다란 기운이 퍼져 나오며 그에게까지 닿아오는 것을 느꼈다.
‘기운이 강해졌다?’
거의 묻어 있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지던 그 기운이 오늘따라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콘스탄틴은 뭉근하게 퍼져오는 그 기운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뭔가 포근하고 따뜻한…….
-으아! 기분이 이상하다아아-!
반면, 칼리고는 폭주했다.
그리고 칼리고의 폭주에 맞춰 사이나가 데려온 하녀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순간 칼리고의 힘을 뻗어 그것을 잡아채려 했으나, 그녀에게서 풍기던 기운과 흡사하여 다시 힘을 거두어들였다.
“어, 죄송합니다. 제 강아지가 몰래 숨어들….”
사이나는 당황했는지 그에게 사과하려고 콘스탄틴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이상! 이상해애! 크아아아!
칼리고가 몸을 배배 꼬더니 바깥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모레프를 불러내서 그 형상을 덮어쓰고는 사이나 쪽으로 향했다.
그가 어떻게 제어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칼리고!”
콘스탄틴은 다급한 마음에 수호령의 본명을 외치고 말았다. 그녀가 수호령을 만지기 직전 가까스로 의지를 발휘해 칼리고와 모레프를 동시에 거둬들였다.
다행히 물리적인 피해는 없었다.
“하…. 미안하군, 영애. 본래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녀석이 아닌데…….”
그는 당황해서 사과했다.
“놀라진 않았나?”
“네. 전혀요. 신기하고, 좋았어요.”
보통 저리 커다란 짐승의 형태가 눈앞에 나타나면 겁부터 질리는 법이거늘, 사이나는 신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굉장히 정적으로 보이는데 묘하게 강단이 있는 유형이었다.
그나저나 칼리고 녀석이 발작한 이유가……,
“아무래도… 이 녀석 때문인 것 같은데.”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
그녀는 강아지라고 했지만, 그건 절대로 강아지가 아니었다.
생김새는 늑대에 더 가까웠으며, 풍기는 기운을 보면 늑대조차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묘하게 그를 경계하는 모습이, 칼리고가 사이나를 대면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콘스탄틴은 사이나의 허락을 얻어 그 작은 짐승을 받아들었다. 싫다고 온몸으로 몸부림을 쳐댔지만, 그는 동요 없이 직접 닿은 부분으로 느껴지는 기운을 감찰했다.
‘……뭐지, 이 녀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