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왜인지 거슬리는 여자
“…….”
-으아아악! 아니 이 음악 왜 이리 길어! 주인아! 얼른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응? 가서 마수나 잡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칼리고가 미쳐 날뛰었다.
‘후. 이따가 두고 보자.’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리 다짐하고 있을 때, 그녀가 어쩐지 자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에,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 여자 지금 나 보는 거 같은데? 뭐지? 야! 이 여자야! 나 보여?
뭐라고?
“거기, 뭐가 보이나?”
이상함을 느낀 그가 물었으나, 그녀는 잠시 움찔하더니 그저 긴장이 되어서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말이 칼리고가 보이냐는 말이라니.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새끼인 양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군.’
스스로 자조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저한테 왜 춤을 청하신 거죠?”
“…….”
약간 당돌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는, 일말의 적대감까지 묻어 있어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보통 데뷔탕트 볼에서 공작으로부터 춤 신청을 받았다면 굉장한 영광으로 알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낄 텐데, 이 영애는…….
하지만 넌 왜 영광으로 여기지 않느냐,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콘스탄틴은 할 말이 없어졌다.
자신도 왜 그녀에게 춤을 청했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이 여자 성격도 이상한 것 같다! 당장 손을 놓고 돌아가자! 주인아!
콘스탄틴은 필사적으로 이유로 댈 만한 것을 떠올렸다.
“몇 가지… 좀 묻고 싶은데.”
“네? 아. 물어보세요.”
…무엇을 물어야 하지.
“…드보프가는 <아를-프로메사>에 연이 닿아 있는 가문인가?”
당연히 연이 닿아 있겠지. 드보프가처럼 유서 깊은 가문이 그렇지 않을 리가 있나.
-주인아! 제정신으로 묻는 거냐! 정령 냄새 풀풀 풍기는 거 몰라? 주인아! 이 여자 옆에 있으니 너도 이상해지는 것 같다!
…닥쳐라 좀. 이 새끼야.
그는 적당히 뭔가 이유가 있는 것처럼 포장을 해서 겨우 대화를 이끌어갔다. 다행히 이 화제에 흥미가 있는 듯, 그녀는 도란도란 대답을 잘 해주었다.
-음악! 음악 오오오! 끝나간다!
대체 왜 이 지랄인지 알 수 없는 칼리고의 음성을 저 멀리 젖혀두고 싶었지만, 문제는 눈앞에 있는 그녀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다.
티가 안 난다고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음악이 끝나가자 여자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모르게 심술이 솟는다.
“드보프가에 방문을 해도 될까?”
내심 알고 있다. ‘폐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덧붙이기는 했으나 그저 요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럴듯하게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따로 서신을 보내실 거예요. 거기에 맞춰 방문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자꾸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보니.
“난, 그대가 안내해 주길 바라.”
어쩐지 더 오기가 생기지 않느냔 말이야.
심술일지라도 말이지.
“기대하지.”
그리고 모르는 일 아닌가.
한 번 더 만나보면, 뭔가 거슬리는 이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지도.
* * *
‘하, 유치하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방금 전의 제 행태를 비웃으며 바깥에서 연초를 피고 있었다.
-주인아! 너 황도 되게 싫어하지 않았냐? 왜 자꾸 여기 엉덩이 붙이고 있냐! 얼른 워프 게이트 타러 가자!
뻑뻑뻑.
이 연초는 예민한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용도로 제작된 특수 연초다.
하루 내내, 자는 시간에도 끊이지 않는 칼리고의 나불거림을 듣고 있자면 스스로가 미쳐버리지 않는 것이 대단하다 싶을 정도니까.
“닥쳐라, 좀. 제발.”
그가 연초를 피고 있는 장소는 한 테라스 아래의 사각지대였다.
그는 보통 테라스를 가는 척하여 시선을 잘라낸 다음, 거기서 뛰어내려 바로 연회장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사람은 이 정도 높이의 테라스에서 뛰어내리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겠지만 그 같은 사람에게야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한참 그리 머뭇머뭇대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커튼을 열어두고 이리 내려왔던가?’
테라스 커튼을 열어두면 일종의 초대라고 생각해서 온갖 여자들이 따라 들어오고는 하기에 항상 잘 닫는 편인데 이번에는 잊은 듯했다.
아니면 알고도 그를 따라 들어온 여자인가.
예의를 무시하고서라도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려는 여자들은 항상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왜 그리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한 번만 만나본다면 그가 자신에게 빠져들 것이라고 과신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집에… 가고 싶어.”
그런데 여자인 것은 맞으나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커튼을 닫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게다가 어쩐지 목소리가 좀 익숙했다.
“아를어나 연구하면서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흠. 사이나 드보프. 그녀로군.
아를어라니. 풍기는 기운 만큼이나 특이하기도 했다.
-으악. 또 그 여자다. 그 여자야!
칼리고가 또 치를 떨어댔다.
콘스탄틴은 그 호들갑을 무시하며 숨을 죽였다.
왜 자신은 이 아래에서 그녀의 행동거지를 몰래 살피고 있는 건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는 그녀가 어찌 움직이는지, 어디에 있는지 미약한 인기척만으로 다 알 수 있었다.
약간 터덜터덜 걸어와 테라스에 놓인 의자에 앉는 모습까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앉은 다음 몸을 편하게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율아…. 네가, 보고 싶어…….”
율… 이라? 남자인 듯도 하고 여자인 듯도 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그게 남자의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벌써 연인이 있었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풍기는 그리움을 읽어내자,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하, 내가 왜 이러지. 정상이 아닌 것 같군.’
요 며칠 잠을 거의 못 자서 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콘스탄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지로 돌아가야겠어.’
안 하던 짓을 하니 그런 거라고 자조했다. 드보프가 방문 건도 취소하자.
사실, 얄팍하기 그지없는 핑계였다. 남의 가문의 역사를 알아서 그가 대체 뭣에 쓰겠는가.
그가 스스로를 비웃으며 돌아가야겠다고 발걸음을 떼려던, 바로 그때였다.
위쪽 난간에서 사부작대는 소리가 나더니 드보프 영애가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설마 이 난간을 넘어오려는 건가?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리 봐도 그래 보였다.
-주인아! 저 여자 진짜 이상한 거 같다! 얼른 피하자, 응?!
그녀는 거추장스럽게 너울거리는 치맛자락을 펄럭거리며 난간에 올라오더니 뒤로 돌아섰다.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였다.
약간 조마조마하기까지 한 심정으로 난간 위의 형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으앗!”
그녀가 균형을 잃고 뒤로 떨어졌다.
콘스탄틴은 덩달아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를 받아냈다.
여린 몸과 청아한 향기가 훅, 끼쳐 들었다.
-냄새나! 냄새! 으아악!
풀썩, 하고 자신의 품 안으로 받아낸 몸은,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
본인도 놀랐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어, 사이나? 여기 없는데?”
누군가가 더 들어오더니 그녀를 찾는다.
지금 저들을 피해 아래로 내려오려다가 떨어진 건가?
들어보니 한 사람이 아니고 둘이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누구지 싶어 자연스럽게 시선이 올라가는데….
-냄새가 너무 고약하다! 주인아! 나 속이 울렁거….
작은 손이 갑자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
그 과정에서 그녀는 그가 입에 물고 있던 연초 끝에 데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영애, 손이.”
-크아아악! 주인아! 너 정말….
그가 놀라 물으려 했으나, 다시금 그 손이 입을 막았다.
보들보들한 작은 손이 그의 입술을 누르는 기분은… 뭐랄까. 이상했다.
보드라운 느낌과 함께, 손에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평소라면 그 접촉에 매우 놀라 당장 그녀를 떼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되지 않았다.
타인이 제게 닿았는데, 그냥 두다니…….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워.’
‘어째서인지 오한이….’
보통 그에게 닿은 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러했다. 어떻게 입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것에 성공한 사람도 몸을 부르르 떠는 것까지는 제어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은 맹약자라고 하여 부러워하고 그 힘을 갖기 원하지만, 콘스탄틴은 그리 원하는 자들에게 이 힘을 넘길 수만 있다면 넘기고 싶었다.
맹약의 부작용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인간의 것을 넘어서 과하게 소유한 힘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게다가 다른 수호령과는 다르게 칼리고는 그림자에 숨어 피를 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니, 제어가 약해지면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았고 심한 경우엔 맹약자에게조차 피해를 끼쳤다.
그렇기에 봉인을 통해 이중으로 제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방법이 바로 그의 등에 빼곡하게 새긴 진이었다. 이 진에 칼리고를 가두고 제어하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그의 피부는 항상 한기가 흘렀다. 이 한기는 단순히 체온이 낮은 선을 넘어서, 닿은 자에게 심리적인 한기를 끼친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내놓고 다니는 얼굴 외에는 모든 피부를 꼭꼭 가리고, 타인에게 실수로라도 닿지 않도록 애써왔다.
그런데 이 영애가 돌발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댄 것이다.
‘…괜찮은 건가?’
신경이 쓰였다. 매우 신경이 쓰여서 당장에라도 다그쳐 캐묻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입을 열어 묻는 대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조금의 불쾌함이라도 묻어날까 하여…….
그런데 이 작은 여자는 테라스 위에 나타난 사람들의 동향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뿐, 아무리 살펴도 접촉으로 인한 불쾌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한기를 느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