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녀와의 첫 만남
아니, 절대.
황자는 아직 맹약자가 아니다.
황제의 수호령에게 귀속된 사령의 하나를 인계받은 대여자로서, 다른 맹약자를 감지해내기엔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니…… 콘스탄틴이 보이는 흥미를 보고 사이나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조금 더 이치에 맞았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황자에게 보내야지. 안 그래? 이번에야말로 떡하니 후계를 임신할지도 모르잖아? 킬킬. 분명 헤베타감으로 타고났다니까!
“그 입 좀, 다물지.”
콘스탄틴은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주인아, 네 개인적인 욕심으로 지금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고 그러면 못써요!
“닥치라고.”
-이거, 이거. 아주 나쁜 주인이라니까?
“후. 회의 끝나고 보자.”
짜증이 나서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이를 잡아 구기는 콘스탄틴에게 애버딘 공작이 말했다.
“…그거 나한테 하는 말 아니지?”
“…….”
너도 포함이다, 이 자식아.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주인아! 다 나는 너를 생각해서…….
또다시 쉴 새 없이 나불대기 시작한 칼리고의 음성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사이나…….’
당장, 사이나가 보고 싶었다.
그 따끈한 몸을 안고, 보드라운 입술을 베어 물고 싶어졌다.
사실 티 안 나게 질척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척이 질척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의연한 척 포장했을 뿐, 그는 실상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굉장히 민감했다.
콘스탄틴, 그가 그녀에게 집착하듯이 황자도 그런 거라면?
‘과연 내가 할 말이 있나?’
콘스탄틴은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 * *
올해 건국제 퍼레이드는 본래 그의 순서가 아니었다.
애버딘 공작이 할 차례였는데, 금년에 기이하게 범람한 마수 처리를 다 못 하고는 그에게 징징대며 순서를 바꿔 달라고 청해온 것이다.
-주인아. 황도 가기 싫으면 주인이 대신 잡아주자. 그리고 애버딘 공작 보고 퍼레이드 가라고 해!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냐, 응?
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칼리고의 특성상, 허구한 날 마수만 잡자고 이리 졸라댔다.
“닥쳐라.”
-주인 너는 왜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닥치라는 말밖에 없는 거냐!
좀 적당히 나불대면 그런 말도 안 하겠지.
황도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칼리고가 말한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게 느껴졌으나, 콘스탄틴은 애버딘 공작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주인아! 대체 왜 힘든 일을 사서 하는 거냐! 그 허연 말 새끼의 주인은 황도를 좋아하고! 주인, 너는 싫어하니 바꾸면 딱 좋지 않으냐!
이유는 별거 없었다.
‘이 새끼가 좋아하는 건 해주기 싫어.’
황도는 평소처럼 그저 그랬다.
전과 비슷한 패턴으로 황자가 몇 번 말을 걸다가 화난 얼굴로 떠나갔고, 역시나 도착하자마자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크레이머령에서 마수를 잡는 일상이 그리워서는 아니다.
그저, 그가 느끼기에 황도에서의 일상은 가짜같이 느껴졌다. 전투도 없고, 피 흘림도 없다.
다른 귀족들이 고민이라고 하는 것들이라고 해봐야 그의 입장에서는 생존과 하등 상관없는 장난일 뿐.
그 괴리는 항상 그를 이곳에 안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어디에서든 붕 뜬 느낌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퍼레이드 이후 첫날 연회가 끝나자마자 크레이머령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그는 모레프를 호출해 모습을 바깥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멀리까지 보이도록 최대한 크기를 키웠다.
육중한 검은 사자의 모습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모레프는 대다수가 알고 있는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이다. 하나 실제로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은 모레프가 아니었다.
진정한 크레이머가의 수호령은 칼리고. 그림자를 지배하는 힘이다.
칼리고는 정해진 형태가 없는 데다가, 그림자를 지배하고 피를 탐하는 속성 때문에 제국민들이 상상하는 제국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 실체를 알게 되면 오히려 꺼려 하게 된다고나 할까. 그래서 대대로 크레이머가는 칼리고가 아니라 모레프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왔다.
실상, 모레프는 칼리고의 사령 중 하나다.
수호령은 정령계에서의 계급과 힘에 따라 사령을 최대 넷까지 부릴 수 있다.
수호령의 맹약은 수호령뿐 아니라, 그것의 사령까지 자연스럽게 속박되기에 모레프 역시 콘스탄틴의 제어하에 있었다.
-이 자식 농땡이 부리네. 야, 인마! 갈기 똑바로 안 세워? 엉? 더 멋있게 흩날리란 말이야!
-…….
칼리고의 타박에 모레프가 등을 더 꼿꼿하게 세우며 갈기를 부풀렸다.
그 위엄찬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귀를 파고들던 그때, 콘스탄틴은 저 멀리서 어떤 미약한 거슬림을 느꼈다.
-앗, 주인아. 정령 냄새! 동족의 기운이 느껴진다.
칼리고 역시 무엇인가를 감지한 듯했다.
‘…정령 냄새라?’
이 거슬림이 그건가?
일반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수호령은 수호령끼리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수호령인지는 가까이 가야 알 수 있지만 멀리서도 그 존재 자체는 서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맹약자는 자신이 맹약자임을 숨길 수 없다. 최소한 다른 맹약자가 근처에 존재하는 한 말이다.
하지만 이 기운은 수호령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하다.
뭐랄까…. 수호령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잔재가 약간 남은 것 같은?
‘흠.’
하지만 그 느낌의 방향은 확실했다.
콘스탄틴은 즉시 느낌의 진원지 쪽을 바라보았다.
‘…전망대?’
귀족들이 퍼레이드를 구경하게끔 따로 형성된 전망대가 보였다. 거리에 밀집한 제국민만큼은 아니지만, 전망대에 모인 귀족의 수 역시 적지는 않았다.
그중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한쪽에 앉아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대부분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귀족 영애들만 보았던 콘스탄틴의 눈에 그게 약간 신기하게 다가왔으나,
‘흠.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금세 어떤 남자와 합석하는 것을 보았다.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다가 잠시 목적을 잊었다.
‘…뭐였지?’
그는 아까의 그 미묘한 느낌을 다시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데뷔탕트 볼이 열리는 황성의 한 홀.
콘스탄틴은 사람들이 다가와 쓸데없이 말을 걸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느지막이 입장했다.
데뷔자들의 소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하지만 황족의 개회사는 아직일 시간쯤이었다.
호명관의 외침을 금지한 채 들어섰음에도 그가 들어서자 홀 가득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모여들었다.
그만큼 그는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나아갔다.
때마침 무대 위의 커튼이 열리며 한 영애가 파트너와 함께 연단 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라임 블론드에 연둣빛 드레스를 입은 예쁘장한 영애였다.
스치듯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금세 시선을 흘렸다. 그 영애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콘스탄틴은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 너머에서 또다시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응? 또 난다! 그 냄새!
콘스탄틴 역시 느끼고 있는 바였다.
무대 너머 안쪽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생소한 냄새인데? 근데 별로다! 뭔가 간지럽고… 암튼 별로다! 주인아! 기분이 안 좋다! 당장 나가자!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느 때처럼 칼리고의 말을 가차 없이 씹으며 콘스탄틴은 무대 위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대체 누가 이런 기운을 풍기는 것인지 보자 싶었다.
그리고… 이내 등장했다.
백설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
밤바다처럼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은 하얀 피부를 더욱 하얗게 부각시켰고, 눈이 부신지 잠시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는 일련의 표정이 지나가는 얼굴은 비스크 인형같이 섬세했다.
-주인아? 주인아!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가 느꼈던 묘한 기운과 별개로, 그녀의 첫인상 자체에 잠시 말을 잊은 것이다.
-크악. 내가 싫어하는 냄새가 난다니까!!
칼리고가 날뛰며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제멋대로 뛰쳐나오려는 것을 콘스탄틴이 강제로 억제하여 붙들어 놓기는 했으나 등 뒤로 너울너울 삐져나오는 기운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그 영애가 자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보랏빛 눈동자가 커지며 자신을 바라볼 때, 그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어쩐지 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의 평생을 한기 속에서 살아왔기에 새삼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싸늘함을 느꼈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몰라 모호한 상태로 콘스탄틴은 그녀가 함께 온 파트너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다.
눈 한 번 떼지 않은 상태로.
그 붉은 입술에 작게나마 미소가 올라왔을 때의 표정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콘스탄틴, 그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도 아니건만, 어쩐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보통 황족의 개회사가 끝나면 바로 자리를 떴던 그다. 스스로도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파트너와의 첫 춤을 끝내는 것을 보고, 발이 움직인 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그리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전에 발이 움직였다.
자신의 커다란 몸집에 놀란 건지, 그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비틀거리는 여린 몸을 잡아 일으키며 콘스탄틴은 춤을 청했다.
“한 곡, 추겠는가?”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심정이 약간 들었으나 그래도 더 가까이서 그녀를 관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춤은 그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니.
‘……어리군.’
가까이서 본 그녀는… 그녀가 갓 데뷔한 나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다른 데뷔자들에 비하면 눈빛과 태도에서 좀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저 갓 소녀를 벗어난 나이.
그 뽀얀 뺨과 순진무구해 보이는 사슴 같은 눈을 보고 있자니,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여자랑 짝짓기하고 싶으냐, 주인아? 난 반대다! 궁합이 안 맞는 거 같다! 응? 주인아. 그냥 춤만 추는 거지? 얼른 대답을 좀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