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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85화 (85/233)

85화. 공작의 사정

“시작하지요.”

4대 공작이 한자리에 모였다.

본래대로라면 황제까지 다섯 명이 모여야 하는 자리지만, 그는 병상에 누운 지 오래. 참석이 여의치 않았다.

황후가 대신 정무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자리는 맹약자만이 참석 가능한 회의이다. 황후라고 해도 맹약자가 아닌 이상 배제되었다.

황자가 황태자의 자격을 획득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아직 그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사령의 대여자에 불과하므로 역시 참석이 불가했다.

“그 새끼 좀 집어넣으시오. 정신 사나워 죽겠군.”

그렇다고 회의장 분위기가 매우 엄숙하거나 장엄한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도 내보내 달라고 지랄을 해대서. 쩝.”

애버딘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수호령인 에렌혼을 회수했다. 에렌혼은 들어가기 싫은지 한껏 푸르륵거리다가 사라졌다.

범인들은 수호령과 함께한 공작들의 모습이 매우 위엄 있고 경이로울 것이라 상상하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 내 아들은 대체 언제 다 클는지.”

“나도 얼른 승계시키고 좀 물러나고 싶은 마음뿐이오.”

기혼인 로즈데일 공작과 프랜시스 공작이 서로 한탄했다.

작위를 승계받으면 죽음 이후나 죽음 임박 직전에야 후계에게 물려주는 일반 귀족들과 달리, 공작들은 아들이 성인이 되고 조건이 차면 바로바로 은퇴를 해버리고는 했다.

보통은 이해를 못 한다. 작위는 곧 권력. 그 드높은 자리에서 왜 그리 일찍 물러나는지.

하지만 모인 공작들은 정말 하나같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작년과 올해는 특히 더, 지독하더군요.”

“맞습니다. 대체 이 무슨 조화인지….”

“정말 작년에는 침실보다 막사에서 잔 날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아……. X같은 XX, 진짜 죄다 XX해 버렸으면…….”

투정과 한숨과 탄식이 끊임없었다.

누가 이들을 엄숙한 의무를 짊어진 고귀한 공작들이라 볼 것인가. 바깥에서는 몰라도 저들끼리 모인 이곳에서 그들은 단지 의무에 눌려 성격이 비틀려버린 네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대충 끝내고 가시죠. 어차피 회의를 한다고 크게 달라질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크레이머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수호의 주간 내내 귀족원 회의, 황실 재무부 회의, 예산 집행 회의, 결산 회의 등을 죄다 거친 참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회의실을 좀 벗어나고 싶었다.

“허어. 이보시게, 친구. 숨 좀 돌리자고, 엉?”

크레이머 공작과 나이가 비슷한 편인 애버딘 공작이 말을 편하게 하며 툴툴거렸다.

“누가 네 친구냐.”

네 명의 공작들 중 둘은 기혼에 자식이 있었고, 둘은 미혼이었다.

나름 같은 고충을 공유하는 사이인 데다 연령대가 비슷하다 보니 애버딘 공작은 크레이머 공작에게 친구처럼 편히 굴고는 했다.

물론 크레이머 공작의 반응은 한결같이 까칠했지만 말이다.

“거, 친구 좀 하면 어때? 나 말고 어차피 친구 하나 없으면서?”

“없어도 네놈 따윈 필요 없다.”

“아, 거참 냉정하네.”

느물거리며 말을 붙여오는 애버딘 공작이었지만, 콘스탄틴의 철벽은 오늘도 여전했다.

“이후에 일정이 있는 건 아닌가?”

“크레이머 공작이?”

“아, 그러고 보니 크레이머야. 자네, 요즘 연애 중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군. 그래서 그래? 애인 만나러 가려고?”

차례로 로즈데일, 프랜시스, 애버딘의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중간에 드보프가에 직접 찾아가는 바람에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평소에는 혹여 말이 새어 나갈까 조심, 또 조심을 했었기에 콘스탄틴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스스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이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노력한 의미가 없지 않나.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불쾌하기도 하고.

“어이쿠. 눈빛 보게. 사람 잡겠네.”

“그리 소문이 났던가? 상대는 누구라 하던가?”

“워어, 진정하게나. 소문까지는 아니고, 자네가 게이트를 매주 써댔다는 소식을 들은 것뿐이야.”

“…….”

“여자 때문이 아니면 굳이 왜 매주 황도를 들락거리겠어? 특히 국가 행사가 없으면 영지에서 아예 꼼짝도 안 하던 자네가 말이지.”

“…….”

“그래서… 누군데? 예뻐?”

말 많은 인간은 질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카스 애버딘은 콘스탄틴이 가장 상종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내 수호령만큼이나 더럽게 수다스럽군, 자네는.”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 애버딘 공작의 얼굴을 콘스탄틴이 장갑 낀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표정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 희한한 무표정을 그리면서 말이다.

“뭐? 지금 날 그거랑 비교한 거야? 허어, 크레이머야! 어찌 그리 심한 말을…….”

애버딘 공작이 과하게 충격받았다는 듯 심장 쪽을 부여잡았다.

콘스탄틴은 애버딘 공작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모두에게 강조했다.

“빨리 끝내고 가시지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는 콘스탄틴에게 동의하며 프랜시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우선 그럼, 헤베타 문제부터 끝낼까?”

같은 공작이기는 하지만 프랜시스 공작과 로즈데일 공작은 나머지 두 공작에 비해 나이가 꽤 많은 편이라 평어를 쓰고, 콘스탄틴과 애버딘 공작은 서로에게가 아닌 이상 공대를 쓰는 편이었다.

“헤베타요?”

“파혼 가결안이 넘어왔더군.”

황자의 헤베타 후보 선정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 4대 공작가가 딱히 크게 관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맹약에 관련한 부분인지라 관련 정보를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황가의 맹약은 제국 전체의 안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 벌써 2년이 지났습니까?”

“그렇더군. 정확히는 약혼한 지 2년 2개월일세.”

“벌써, 몇 번째 헤베타지요?”

“음. 다섯 번째던가? 여섯 번째?”

“…심각하군요. 얼른 승계가 되어야 할 텐데.”

황제가 병상에 누운 지 벌써 오래다. 황태자로 승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황제가 서거하기라도 한다면 대체 황가의 수호령이 어찌 될는지.

어떤 의미로 맥페이든 제국은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황가의 맹약은 단순히 황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황가의 피에는 ‘제국 수호’의 힘이 맹약을 따라 흐르고 있다. 황가의 혈통 보존은 곧 제국의 안정과 직결된다.

“뭐가 문제랍니까? 이쯤 되면 헤베타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요?”

“…….”

애버딘 공작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많은 헤베타들이 문제일 리는 없으니. 황자가 문제인 거겠지.’

어딘가 뺀질거리는 황자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콘스탄틴은 그리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공작들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다음 헤베타 후보는 있다던가?”

로즈데일 공작이 물었다.

“흠. 이름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는데, 곧 정해지지 않을까 싶군. 얼마 전에 황자 전하께서 수반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니, 벌써 검증식을 했나 본데.”

“수반을요?”

콘스탄틴이 번뜩 물었다.

“그렇다네.”

그의 눈이 가름해졌다.

그건, 일종의 직감 같은 거였다.

‘수반. 수반이라…?’

뭔가 걸리는데…….

거의 평생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날이 선 상태로 전투를 치르며 살아온 탓인지, 콘스탄틴은 자신의 안위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촉이 예민한 편이었다.

‘…이거 혹시 수반인가요?’

수반이라는 단어 때문인가. 문득 얼마 전 창고에서 들었던 사이나의 물음이 떠올랐다.

그저 그녀가 좋아할 것 같아 크레이머가 지하에서 썩어가던 유물들 몇 개를 보여주려고 한 건데, 막바지에 뭔가 좀 이상한 반응을 보였었지.

당시에는 명확하게 뭔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체 그게 수반인지 어찌 알았을까.’

물이 담긴 것도 아니고, 바닥에 대충 뒹굴고 있던 그 모습에서.

수반이라고는 하지만 그 물건은 오목한 부분이 그리 깊지 않아서 얼핏 보면 방패라든가 다른 용도로 추측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게다가….

‘……이것도 그럼… 뭔가를 알아내는 그런 용도인가요?’

그리 묻기도 했고.

맹약자가 계약한 수호령의 속성을 알아내는 용도로 사용되는 수반인데, 그걸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했더니….

‘피를 이용하고요?’

이미 알고 있었지.

그것도 모자라서,

‘헤베타가 중앙 귀족에서 뽑히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그런 이상한 질문까지.

‘…황명이 떨어진다면… 그럼 따라야 하는 거겠지요? 이런 쪽에서 황명이 떨어진 적이 이전에 아예 없었나요?’

그냥 호기심에서 묻는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던 그 얼굴.

그건, 결국 한 가지 결론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 주인아. 네가 점찍은 여자가 다음 헤베타인가 보다. 너 완전 닭 쫓던 개 되게 생겼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칼리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혀든 것은 그때였다.

“…….”

-뺏기기 싫으면 얼른 가서 덮쳐버려. 킬킬.

킬킬대던 칼리고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말을 바꿨다.

-헛, 아니다! 나 그 여자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그냥 황자 가지라고 하자. 잘됐네!

황자가 사이나를 점찍은 게 과연 우연일까.

건국제 종막 연회에서 사이나에게 춤을 청해 추던 황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길리언 황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콘스탄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황도에 올 때마다 쓸데없는 말로 시비를 걸거나,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황제라고 해도 4대 공작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기에 딱히 염두에 두지는 않았으나 길리언 황자는 콘스탄틴의 무감한 반응에 더 화를 내고는 했다.

-하긴 그 늑대 새끼도 짜증 나고 그 여자도 짜증 나고. 아주 별로더라고. 이참에 멀리 보내버리자. 정령 냄새가 풀풀 나는 게 아주 타고난 헤베타감이잖어?!

하, 이게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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