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아니, 황자는 줘도 안 가진다니까!
공중정원은 계단식으로 된 형태의 구조물인데 아무래도 상층이다 보니 눈에 쉬이 뜨일 것 같아 아직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에이, 별일 있겠어.”
유니콘 인형을 얻기 위한 사이나의 열망은 결국 그쪽으로 걸음을 하게 했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지라 초조해진 이유도 있었다.
사이나는 계단참 근처에서 인기척을 살피다 걸음을 떼었다. 계단에는 다른 곳보다 횃불이 많았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밝은 것은 좋지만 쓸데없는 이목은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네.’
공중정원 위로 직접 올라와 본 것은 처음인데 위쪽의 구조가 상당히 복잡했다. 복층 구조도 복잡한데 미로 숲까지 구현되어 있어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듯해 약간 걱정이 되었다.
‘우선 외곽만 좀 돌아보자.’
수상한 틈새나 사각지대 등을 꼼꼼히 살피며 사이나는 인형을 찾기 위해 애썼다.
포르륵.
그때 갑자기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혹시 곤충 같은 거면 질색인지라 몸을 굳히며 사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시야를 집중하자 어두운 밤, 빛을 삼키는 암흑색의 깃털을 가진 새 한 마리가 파드득 날갯짓을 하며 그녀의 눈앞에 떠 있었다.
“…어?”
검은 새잖아? 이 새는 콘스탄틴의 전령조가 아닌가? 집이 아니어도 찾아올 수 있는 거였어?
사이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들고 있던 인형들은 잠시 바닥에 두었다.
검은 새가 사이나의 검지 위에 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횃대라도 되는 양 발가락으로 동그랗게 감싸자 압력이 느껴지면서도 간지러웠다.
슬며시 웃으며 사이나는 새 앞에 다른 손을 올려 손바닥을 펼쳤다.
하악.
또 소리 없는 구역질과 함께 돌돌 말린 종이가 튀어나왔다.
종이를 읽어야 하는데 새를 따로 잠깐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깐의 고민 후 사이나는 그것을 정수리 위에 올렸다.
가짜 새니까 뭘 싸거나 하지는 않겠지….
통통 튀어 머리 꼭대기에 잘 자리 잡은 새는 저번처럼 막 돌아다니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았다.
사이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말린 종이를 펼쳤다.
[혹시 지금 어디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회의가 끝난 걸까? 찾아오려고 어디인지 묻는 거겠지?
사이나는 정수리에 있던 새를 다시 손에 올라오게 한 뒤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새야. 너 말도 전할 수 있니? 여기 공중정원이라고 전해줄래?”
그러나 작은 머리통을 갸웃댈 뿐, 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음. 종이도 없고 필기도구도 없는데 어쩌지. 답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든 장소를 알릴 만한 장치가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사이나는 눈을 반짝였다.
“아.”
겨울이 되면 보통의 식물들은 꽃과 잎이 지지만, 공중정원에 심은 식물들은 사시사철 푸른 종류의 식물이 많았다.
사이나는 그중 잎사귀가 유독 파랗고 예쁜 놈을 하나 골라 꺾었다.
“이걸 전해주렴. 그럼 알아들으실 거야.”
녹색 잎을 돌돌 말아 부리 앞에 대주었다.
종이가 아니라 잎이지만 별 상관은 없는 듯 새가 크게 입을 벌렸다. 몇 번을 봐도 괴이한 과정이 끝나고 새가 날아올랐다.
포르르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쪽도 좀 뒤져봐!”
걸쭉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걸 누가 모르나? 보여야 찾지!”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놀라 사이나는 얼른 몸을 움직였다.
급하게 숨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미로 숲 안으로 발을 옮기게 되고 말았지만, 별수 없었다.
남자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어 나가는 것보다는 안쪽이 더 나을 듯했다.
신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외진 곳에서 다수의 남자들과 단독으로 마주치는 것은 꺼려지니 말이다.
미로 숲이라고 해도 보통 길이 한 개만 있는 것은 아니니 적당히 가까운 출구로 빠져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기왕 들어왔으니 인형이 있을 만한 구석을 열심히 뒤지며 나아갔다.
“어?!”
모퉁이 부분을 도는데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손을 밀어 넣어보니 분명 인형의 촉감이었다. 신나서 꺼내어 보았다.
“뭐야…. 에렌혼이 아니네.”
이미 있는 것이라 가져갈까 말까 살짝 고민이 된다. 하지만 손에 든 인형만으로도 꽉 찬 상태라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대신 남이라도 보이면 가져가라고 눈에 뜨이게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이러다 에렌혼만 못 찾는 거 아니야?”
이상하게도 유니콘만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이제 피곤하기도 하고, 너무 오래 헤맨 느낌이라 돌아가고 싶어졌다.
가볍게 숨을 내쉬고 사이나는 출구를 뒤지며 방향을 잡았다.
결국 미로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니 복층의 모서리 부분이었다. 횃불등(燈)이 있는 것을 보아 멀지 않은 곳에 계단이 있는 것 같았다.
그 거리를 눈으로 가늠하던 중 무언가가 사이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횃불등 옆 석조 난간 위에 인형처럼 보이는 작은 물체의 실루엣. 그 형태를 보았을 때 저것은 분명…….
‘에렌혼!’
석조 난간 위에 너무 떡하니 놓여 있는 모습이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아낸 그녀의 눈에 다른 것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드디어 찾았다!’
사이나는 신나서 에렌혼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그때.
“사이나 영애.”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
순간 유니콘 인형의 존재도 잊을 만큼 쭈뼛했다.
“…누구?”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드레스의 실루엣으로 보아 여자이긴 한데 익숙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더 가까이 걸어오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헤베타… 님?”
자신을 부른 사람은 헤베타, 일레인 반즈였다.
“그래, 날세.”
음영 속에서 몸을 드러내며 등장한 일레인 반즈의 얼굴은 일렁이는 횃불 그림자 때문인지 표정을 잘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어쩐 일로 여기 계세요? 보물을 찾는 중이셨나요?”
“……보물을 찾는다기보다는 지키는 쪽에 더 가깝겠군.”
“…….”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음산하게 울리는 일레인의 목소리가 불길함을 암시했다.
사이나는 저도 모르게 자꾸 뒤로 발걸음을 물리고 있었다.
“자네는…….”
“…….”
“참으로 양심이 없어! 그렇지 않은가?”
“…네? 무슨 소리이신지…….”
“권력을 위해 가장 친한 친구도 버렸다지?”
“네?”
일레인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어스름에 가리어져 있던 그녀의 표정 역시 점점 드러났다.
부리부리한 눈이 사이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정상이 아니야.’
당장에라도 뭔 짓을 저지를 것 같은 얼굴이다. 눈빛에 일종의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번쩍 들었다.
‘…단검?!’
미, 미친 거 아니야? 대체 왜 저래!
사이나는 마음이 급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미로 숲에 들어가기 전에 마주칠 뻔했던 그 남자들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도움을 청해볼 텐데.
“권력을 위해, 이젠 황자 전하까지 노리고!”
아니, 줘도 안 가질 황자를….
대체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요목조목 변명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감히! 감히! 내가 이리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데!”
사이나는 험악한 기세에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었다.
퍼엉-!
그때, 저 멀리 황성 쪽에서 커다란 불기둥 두 개가 솟아올랐다.
자정이 되어 보물찾기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급박한 와중임에도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그 빛에 시선이 뺏긴 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황후 자리는 내 거야! 내 거라고!”
그 잠깐 시선을 놓친 사이, 일레인 반즈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헉!”
어느새 계단 근처까지 뒷걸음쳐 밀려왔던 사이나는 일레인이 돌발적으로 달려드는 방향을 피해 급히 몸을 틀었다.
팔뚝 위로 칼날이 스치는 느낌이 났으나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죽어어!”
하지만 일레인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단검을 쥔 손을 번쩍 들고 덤벼들었다.
“악!”
사이나는 엉겁결에 일레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이나보다 키가 더 작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장사였다. 미친 사람은 힘이 세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일레인을 막느라 사이나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주춤주춤 사이나가 점차 뒤로 밀렸다. 뒤꿈치가 돌난간 같은 것에 부딪혔다. 더는 뒤로 갈 곳이 없었다.
어떡하지.
필사적으로 일레인의 손을 잡고는 있으나 눈앞에서 칼날이 휘적거리는 모습을 보자 곧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그을 것만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일레인의 희번득한 눈도 무섭고 칼날은 더 무섭다. 그러나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두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죽어! 죽으라고!”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제멋대로 오해하고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어떻게 다시 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두 번 슬퍼할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거든?!
사이나는 악에 받쳐 온몸에 힘을 주었다.
“으윽!”
“정신 차려! 이 여자야!”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뽑아 일레인을 힘껏 밀어버렸다.
“악!”
문제는 그 반동에 사이나 역시 뒤로 밀려났고, 하필 그 뒤에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은 석조 난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무릎 뒤가 걸리며 몸이 훅 뒤로 넘어갔다.
어쩐지 비명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허공에 뜬 몸의 시간이 백 배 이상 느려진 것처럼 시야가 느리게 흘렀다.
이 각도로 떨어졌다가는 분명 목이 부러질 텐데….
‘…죽는 건가?’
떨어지는 사이나의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의외로 악귀 같은 일레인 반즈의 얼굴이 아니라, 계단 꼭대기 석조 난간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유니콘 인형이었다.
유니콘이 거기에 서서 멀어지는 사이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는, 자주 떨어지는군.’
어째서일까. 점점… 멀어지는 그것을 보는데 갑자기 콘스탄틴의 그 말이 떠올랐다.
사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CHAPTER 1.5 : 그녀, 유일한 계절,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