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유니콘을 찾아서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라, 사이나는 눈알을 굴렸다.
“자, 이리 오게. 왔으면 춤을 춰야지.”
“아니, 전 괜찮습니다만….”
“자자,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네.”
황녀는 막무가내였다. 달맞이 춤을 추는 게 목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돌적이었다.
‘…헤비아탄 경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소리 없는 외침을 흘렸으나, 헤비아탄 경이 짠, 하고 나타나 황녀님을 말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달빛 무도회의 춤은 단체 춤이 많았다.
커다란 홀에서 다 함께 추는 이 춤을 달맞이 춤이라 하는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처럼 원형의 형태를 이루며 뱅뱅 도는 빠른 템포의 춤이었다.
원은 두 겹으로 되어 있는데 음악에 맞춰 빙빙 돌기도 하고, 서로 역방향으로 돌기도 하고, 안쪽 원의 사람과 바깥 원의 사람이 손을 잡고 휘돌기도 한다.
다만 안쪽 원과 바깥쪽 원의 참가자는 성별이 다른데, 빙빙 돌다 보면 파트너가 계속해서 바뀌다 보니 달빛 무도회는 다른 연회와 달리 특별히 파트너가 필요치 않았다.
황녀는 템포에 맞춰 원이 크게 퍼지며 간격이 넓어진 틈새에 맞춰 사이나의 손을 잡고 쏙 파고들었다. 어차피 계속해서 사람이 들고 나는 춤이라 별 상관없었다.
경쾌한 음악은 끊임없었고, 달맞이 춤을 추는 두 개의 원도 계속되었다.
탁탁. 타닥, 타다닥.
음악에 맞춰 동일한 구둣발 소리가 플로어를 울리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 함께 움직였다. 얼굴 가득 즐거운 미소를 가득 띤 사람들의 표정은, 진정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빨라!’
귀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춤이라 배워는 놨지만, 진짜 춰본 것은 처음이다.
초반 몇 바퀴 동안은 템포에 몸의 속도를 맞추느라 허둥지둥 따라 움직이기만 했다. 그런데 한번 몸에 익고 나니, 발걸음에 리듬이 차올랐다.
타닥. 타닥. 타다다닥, 탁탁!
어느새 보니 키얼스틴, 에비앙, 플로리아도 근처로 파고들어 같이 추고 있었다.
뱅글뱅글 돌며 구둣발 소리를 맞추다 보니, 사이나도 점점 신이 났다. 화사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잘 모르는 남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춤을 추는 건 평소에는 고역이었지만, 이 춤은 괜찮았다.
역방향으로 원이 휘돌며 계속 앞에 있는 남자가 바뀌는 데도 별로 꺼리지 않고 춤을 출 수 있었다.
춤이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가득 피어난 예쁜 미소가 주변의 시선을 마구 끌어들이고 있었으나,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사이나는 달맞이 춤에 몰두했다.
아무리 즐거운 춤이라도, 하루 종일 출 수는 없는 법.
한창 추다 보니 목이 마르고, 다리도 아팠다.
이런 격렬한 춤을 출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하고 높은 구두를 신고 와서, 불편하기도 했다.
사이나는 이쯤 해서 원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그만 나가야겠다.’
사실 결정적 이유는 저쪽에서부터 가까워지는 남성 참석자 얼굴 중… 조지 홀랜더가 보였기 때문이다.
‘파티라면 그저…….’
그냥 시선을 잠시 그쪽에 주었을 뿐인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치는 게 더 기분이 나빴다.
사이나는 이때다, 하고 원형에서 빠져나왔다.
음료를 한잔하며,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러다 이따가 보물찾기를 할 체력도 안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렁슬렁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으나, 역시 콘스탄틴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췄으면 재밌었을 텐데…….’
그가 달맞이 춤을 추는 것은 별로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그 상상이 더 재미있었다.
그가 끼어들면 주변 사람들이 얼어서 다 도망갈지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회의가 굉장히 긴가 보네.’
다른 귀족들은 거의 다 참석한 걸 보니 국무회의는 끝난 것 같은데… 일부러 참석 안 한 건가?
‘근데 흑야 때 황성 오느냐고 물어봤잖아?’
다른 공작들은 몰라도 콘스탄틴은 시간이 있다면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왔을 것 같았다.
‘4대 공작가 회의가 따로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네. 그것 때문인가?’
4대 공작과 중앙 귀족들이 다 함께 모이는 국무회의 말고, 수호령과 연관한 안보 관련 회의가 따로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매일 한가해 보이는 모습만 보다가 잠깐 얼굴 볼 틈도 없이 바쁜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한가한 게 아니었겠지.
음료를 홀짝이는데, 여태 한 번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던 달맞이 춤곡이 멈췄다.
그리고 음악이 바뀌었다.
‘어, 끝났나?’
아무래도, 행사가 바뀔 시간인가 보다.
자연스럽게 단상으로 시야가 모여들었다.
황자와 헤베타가 올라왔다.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달빛 무도회에 참석한 좌중을 둘러보는 황자의 시선이 주욱 움직이다가 사이나에게 멈췄다.
씨익 그려 올라가는 그 미소에 사이나는 흠칫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야, 대체.’
황자가 연설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보물찾기를 하기 전 개회사를 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말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를 어쩌나 눈치를 살폈지만, 황자 옆에서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일레인 반즈를 발견하자 바로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사야?”
“언니, 나 먼저 나가 있을게.”
사이나는 몸을 물리는 자신을 보고 의문을 표하는 키얼스틴에게 속닥이듯 말했다.
“정원 쪽은 지금 출입 제한 중일걸? 10시 돼야 열릴 거야, 아마.”
미리 나가서 보물을 찾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사가 열리는 정원 쪽은 출입 제한이 들어간 모양이다.
“아, 휴게실 먼저 들렀다가 가려고.”
“아하, 알았어.”
사실 황자를 미리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거다. 저 개회사가 끝나면 왠지 자신을 찾아올 것 같았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녀의 등에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자의 말이 빨라지는 게 개회사를 얼른 마무리하려는 것 같았다.
“……정원에 보물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수와 내용에 따라 상품이 부여될 것이오. 특히 황가의 수호령 인형을 찾아오는 자의 선물은 기대해도 좋소. 자, 그럼 암월이 뜬 이 밤, 새해를 기다리며 어둠을 걷어내러 갑시다.”
와아아!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사이나는 밀려 나가는 사람들의 틈새에 얼른 몸을 숨겼다.
황성 기사들이 막고 있다가 열어준 입구를 따라 연회 홀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황자라 한들 사람의 물결을 뚫고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못할 것이다.
밤의 어두움이 그녀의 위치를 가려주기를 바라며 사이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최대한 자신을 숨기며 사이나는 깊이 숨어들었다.
“찾았어요?”
“아니요. 어째 제 눈에는 보이질 않네요.”
황성의 메인 정원이다 보니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여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보물찾기를 하고 있음에도 인적이 드물게 느껴졌다.
게다가 유독 달빛이 흐린 밤. 길목마다 횃불과 조명 장치가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밝다는 느낌보다는 어둑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혼자 떨어지면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그래서인지 여러 명이서 뭉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좀 으스스하네.’
사이나는 혼자였다. 등불은 물론 없었다.
친우들과 같이 나올 걸 그랬나. 짧게 후회를 했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황자에게 잡혀 또 이상한 대화를 나눠야 했을 것이다. 헤베타의 눈총은 당연히 따라오는 사은품이었을 테지.
‘에라, 모르겠다.’
상품이 목적이 아니니 얼른 인형이나 찾아서 정원을 빠져나가야겠다 싶었다. 사이나는 꼼꼼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어둠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었다. 혼자인 것도 평소 익숙하다 보니 특별히 혼자라고 해서 못 할 것은 없다.
다만 어둑한 곳에서 잘 모르는 남성과 마주치는 것은 그녀로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황성 기사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야음을 틈타 추행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고 키얼스틴으로부터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이나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보물찾기는 딱 자정까지라서,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다 찾았는데… 에렌혼만 없네.”
사실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이 애버딘 가의 수호령, 에렌혼이었기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만 더 찾으면 되는데…….’
사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인형을 숨길 만한 곳을 찾으며 사이나는 끊임없이 눈을 굴렸다.
이것도 나름 집착이라서인지 점점 조심성은 낮아지고 시야는 좁아졌다.
그러다 보니 여태 사람을 잘 피해 다녔는던 그녀도,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꺄악!”
모퉁이에서 툭 튀어나온 사이나를 보고 한 여자가 괴성을 질렀다. 그 비명에 사이나는 덩달아 놀랐지만 같이 괴성을 지르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다.
“아, 놀라라. 거기 누구세요?”
저쪽은 세 명이었다. 인사 없이 어떻게 잘 스쳐 지나갈 수 없을까 고심했으나 보는 눈이 많아 그건 힘들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머, 드보프가 영애님이시죠?”
“맞네, 맞네. 보물은 많이 찾으셨나요?”
금세 그녀를 알아보고 이것저것 말을 물어오는 영애들의 면을 살피니 이런, 하필 하퍼 영애와 헤베타의 무리였다.
“종류별로 하나씩 찾으셨나 봐요?”
“아, 네.”
따로 담을 것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사이나는 인형 3개를 모두 손에 들고 있었다. 당연히 알아보기도 쉬웠다.
“모레프 어디서 찾았는지 혹시 알려줄 수 있어요?”
하퍼 영애 일행이 물었다. 딱히 시비를 걸려는 투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이나는 대답했다.
“모레프는 저기 연못 쪽, 나무 말고 바위 같은데 많은 것 같아요.”
“어머, 바위는 뒤져볼 생각도 못 했네. 고마워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가려는데 일행 중 하나가 그녀를 불렀다.
“영애는 유니콘이 없네요?”
“어, 유니콘은 저쪽에 많은 것 같던데. 우리 다 저쪽에서 찾았잖아.”
“맞아. 저쪽에 많아요.”
유니콘 인형의 행방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사이나의 귀가 쫑긋했다.
‘저쪽?’
한 영애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공중정원 쪽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셋 다 유니콘은 저기서 찾았어요.”
“맞아요.”
“그럼 우린 모레프 찾으러 가볼게요.”
다행히 별다른 신경전 없이 영애들이 떠나갔다. 사이나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를 훌쩍 던져놓고서 말이다.
‘저쪽은……. 음.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