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둘만의 비밀스러운 전령
“…….”
돌돌 말린 종이였다.
돌돌 말렸다고는 해도 자기 몸의 절반은 될 것 같은 길이의 뭉치를 그 작은 부리 속에서 뽑아내는 모습은… 솔직히 말해 귀엽다기보다 좀 그로테스크했다.
뭔가 묻은 흔적은 안 보이지만 토해낸 종이를 만지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고.
새는 단지 편지를 나르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토해놓은 돌돌이를 부리로 콕콕 찍고는 사이나를 쳐다보았다.
얼른 확인하라는 뜻 같았다.
“…….”
별수 없이 사이나는 종이 말이에 손을 뻗었다.
다행히 축축한 기운이나 미끈거리는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삭한 종이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수호령의 힘을 이용해 만든 일종의 영체 같은 거라더니, 보기에만 토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보다.
“컁! 컁! 컁!”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친 듯이 짖어대는 욜리를 뒤로하고, 사이나는 돌돌 말린 쪽지를 폈다.
확실히 콘스탄틴이 보낸 전령이 맞았다.
[사이나.
콘스탄틴입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언제든 이 새를 통해 연락하도록 해요.
편지를 써서 입가에 물려주면 알아서 이리 가져올 겁니다.
진짜 새가 아니니 물이나 먹이를 챙겨줄 필요는 없습니다.]
제3의 인물을 통하지 않은 이런 비밀스러운 단둘만의 전령이라니……. 콘스탄틴이 맹약자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특별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콘스탄틴인데 그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괜히 손끝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고, 들썩들썩한 감정이 든다.
공연히 사이나는 혼자서 흠흠, 하며 부끄러워하다가 답장이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작님께.]
공작님께라……. 이상한가? 전에 공작님이라는 호칭 말고 이름 불러달라고 했는데, 음……. 친애하는 콘스탄틴?
그렇다고 너무 친밀하게 부르자니 어딘가 어색하고, 적당히 예를 차려서 쓰자니 종이가 너무 작았다. 이 작은 쪽지에 격식을 차렸다간 도입부만 써도 꽉 차버리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본론만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한 사이에서나 쓸법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새가 신기해요. 토할 때는 좀 놀랐지만.
그리고 이번 주에는 수요일에 못 갈 것 같아요. 잠옷 파티에 초대받았거든요. 수락할 예정입니다.
아, 요즘 꿈자리는 좀 어떠세요?]
좀 지나치게 두서없이 써 내려간 것 같아 다시 쓸까 싶었지만, 또 써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그냥 돌돌 말았다.
처음 받은 쪽지와 비슷한 느낌으로 돌돌 만 종이를 고정한 뒤, 입가에 대주자 새가 부리를 쩌억 벌렸다.
“…….”
눈으로 보면서도 대체 저게 어떻게 삼켜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검은 새는 종이를 다 삼키고는 쫑쫑 튕기듯 뛰어 사이나의 손 위로 올라왔다.
‘입 다물고 있으면 귀여운데….’
새를 손에 든 채로 걸어 테라스 문을 열어주자 포르르 날아서 금세 사라졌다.
그 모습에 어쩐지 미소가 지어져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사이나는 문을 닫고 다시 들어왔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사이나는 익숙한 톡톡, 소리를 다시 들었다.
“컁!”
익숙한 욜리의 외침도 같이 말이다.
‘이렇게 답장을 바로 보낼지는 몰랐는데.’
사이나가 보낸 쪽지를 보더라도 다음 날 답장을 보내거나 그냥 읽고 나서 아 그렇군, 하고 말 줄 알았다.
[잠옷 파티라니, 밤을 지새우고 오는 모임 말입니까? 잠옷 차림으로? 어디서 열리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주루룩 이어진 질문의 나열은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반드시 대답을 요구하는 그런 느낌이다.
[사이나, 자고 싶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 구문에서 사이나는 왠지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이 사람. 말을 평소에 너무 오해 사게끔 하는 거 아니야?’
수면을 취하고 싶습니다, 라든가. 다른 표현도 많지 않느냐는 말이지. 자고 싶습니다, 라니.
내가 이상해서 자꾸 그렇게 오해하는 건가?
[다음 주까지 그댈 볼 수 없는 겁니까.
혹시 시간이 된다면 이전에라도 얼마든지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입니다. 원한다면 내가 갈 수도 있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보다가 못 보는 거니, 사이나로서도 약간 허전한 기분이기는 했다.
허전한 건지, 아니면 뭔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음…. 전날에라도 간다고 할까?’
수호령의 부작용으로 잠을 통 못 잔다고 하는 말을 들었더니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이나의 손을 잡으면 잠깐이나마 잠에 들 수 있다고 했으니까.
‘사람이 2주나 잠을 설치고 어찌 살겠어. 그 전에 찾아간다고 해야겠다.’
사이나를 만나지 못한 무수한 시간 동안 공작이 그리 살아왔음은 간과한 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맑은 날이다.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겨울치고는 따뜻했다.
사이나는 평소처럼 콘스탄틴이 보낸 문양 없는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향했다.
둘이 그런 사이가 되고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자신만 특별하게 느낀 것은 아닌지, 평소와 달리 공작이 포치에 나와 있었다. 로이터가 아니라 그가 직접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이다.
“…공작님?”
“그리 부르지 않기로 한 것 같은데요.”
“…….”
콘스탄틴이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이끌며 대답했다.
느른하게 풀린 입가는 웃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 모양입니다?”
“그….”
콘스탄틴은 걷다 말고 멈춰 서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벽처럼 커다란 그와 실제 벽 사이에 껴서 집요한 눈초리를 받고 있자니, 마른침이 삼켜졌다.
“코, 콘스탄틴…….”
“그래요. 사이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만큼이나, 그의 입에서 봄바람처럼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자가 귀를 간지럽히는 듯했다.
“사이나.”
그가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차차 낮아진 그의 상체가 그늘을 드리우며 그녀를 가두는 느낌이었다.
“…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복도가 아니다.
콘스탄틴은 제일 가까운 아무 문이나 열고 그녀를 밀어 넣고는 급히 볼을 감싸왔다.
“으, 읍?”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그가 미는 대로 밀리다보니 등에 벽이 닿았다.
허리는 휘감기고 목은 한껏 젖혀진 몸의 불균형에 사이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흣, 으응.”
깊이 파고든 혀가 연구개를 쓸며 내려가 목구멍까지 채울 기세였다.
그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키스에 찌르르한 촉감과 별개로, 심장이 떨렸다.
사이나는 그의 팔뚝 부분 옷자락을 세게 쥐며 떨리는 몸을 가라앉혀보려 애썼으나, 더 깊고 농밀하게 들이닥치는 숨결에 호흡은 점차 가빠지기만 했다.
혈류가 속도를 높일수록 몸이 점점 더 흐물거리며 액체화되는 기분이다.
그가 허리를 강하게 감아 고정해주지 않았다면, 어느새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하아…….”
벅찬 숨이 터져 나오며 입술이 떨어졌다.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사이나는 그를 붙든 채였다.
혼자만 이렇게 동요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진 사이나가, 그의 팔뚝에 이마를 대며 고개를 숙였다.
쪽. 그러자 콘스탄틴이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남자…….
누구보다 금욕적으로 생겨서는 자꾸 이렇게 훅 치고 들어와 자신을 흔들어댄다.
“사이나.”
그가 귓바퀴 근처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사이나는 또 흠칫했다.
톤 낮은 목소리가 귀를 스치며 파고드는 느낌이 지나치게 농밀했다.
“얼굴을 보여줘요.”
“…….”
“내가, 달려들어서 싫어졌습니까?”
“……그게 아니고, 그냥….”
“그냥?”
이제 두 다리에 다시 힘이 좀 돌아온 것 같다.
“가,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사이나는 몸에 힘을 주며, 고개도 천천히 들었다.
이제나저제나 그녀가 고개를 들기를, 바로 앞에서 응시하며 대기 중이던 그와 지척에서 시선이 닿았다.
발개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의 입가가 작게 말렸다.
“좀, 자제하도록 하지요.”
“…….”
“내 이름이 그대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참기가 힘들더군요.”
자기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해놓고…?
“…그럼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러실… 거예요?”
깜짝 놀란 사이나가 묻자, 콘스탄틴이 피식 웃었다.
“그럴까요?”
“…….”
“그럼 그대는 분명 또 입을 꾹 다물고 불러주지 않겠지요?”
“…….”
콘스탄틴은 사이나의 보드라운 볼을 엄지로 쓸며 천천히 웃었다.
“자제할 테니,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네.”
둘은 천천히 떨어져 섰다.
번진 입술 화장을 수습하고, 구겨진 옷자락 등을 서로 펴준 뒤,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로 함께 향하는 동안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누구라도 만났다면 분명 매우 부끄러웠을 텐데, 다행이었다.
로이터가 눈치 빠르게 미리 다 치워버린 거였지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은 평소와 같은 패턴으로 각자의 책상에 앉아 각자의 업무를 보았다.
공작은 공작의 일을, 사이나는 번역 작업을.
아까의 입맞춤 때문에 초반에는 집중이 잘되지 않았지만, 애써 노력하자 점차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작업 진도는 그냥 그랬지만.
종이에는 싹둑싹둑 잘려진 채 따로 노는 글자들이 잔뜩 휘갈겨져 있었다.
‘유독 생소한 구조랑 뜻글자가 많아.’
그렇지 않아도 아를어 해석이 쉬운 게 아닌데, 이 보석은 특히 더 그랬다.
‘도무지 모르겠어.’
뚝뚝 끊어지는 해석은 어떤 식으로 조합해도 말이 되질 않았다. 여태껏 밝혀지지 않은 문법과 뜻글자가 몰려 있었다.
이러면 진짜 답 없는데…….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사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집이었다면 사이나는 벌써 책상에 엎어져 발을 바동거리며 ‘아으으으-!’ 비명을 질렀으리라.
여기서 그리할 수는 없으니 사이나는 열심히 참아보았다. 그래 보았자 그녀의 손에 잡힌 펜 끝에서 짜증이 묻은 직직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리고 조용한 집무실이다 보니, 그 소리는 금세 공작의 주의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