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드보프가 비상 대책 회의
셋은 바로 식사를 끝내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사용인을 다 물린 후,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우선 황명이 내려오면 끝입니다. 그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황명이 내려오려면 황제 폐하의 인장이 있어야 하는데…….”
“황후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겠죠, 지금? 황후 폐하께서도 아들이 얼른 황태자로 확정되기를 바라실 테니… 황명이 내려온다고 가정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하, 어찌 이런 일이…….”
“사야가 워낙 곱지 않습니까. 황자도 사람이니 이해는 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군요.”
“…….”
세이지 오라버니의 여전한 과대 칭찬에 사이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지만, 드보프 백작은 황자를 향한 세이지의 무례한 발언을 질책하지 않음으로써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아빠, 전… 헤베타가 되고 싶지 않아요. 설레발이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면….”
“불행히도 그런 것 같지는 않구나.”
백작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뭐든 첫 선례는 중요한 법이니, 중앙 귀족가에서 헤베타를 선별하는 것을 다른 귀족들도 좋아하지는 않을 게다.”
“맞습니다. 다른 가문의 가주님들에게 도움을 미리 청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도움이 아니더라도 미리 알리기는 해야 할 것 같고요.”
“그래, 우리 말고도 딸 가진 집안들이 있으니, 여론을 모아봐야지.”
백작과 세이지, 사이나는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리 약혼이라도 시켜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상황이 아주 웃기게 되었군요.”
“마음에 없는 남자와 엮여 부담을 느낄까 봐 미뤄두었던 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정략결혼이 만연한 귀족 사회다. 그럼에도 사이나는 약혼자가 없었고, 일찍이 둘이 엮어주면 어떠하냐며 말이 나온 상대도 없었다.
사이나는 여태 그냥 없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알아서 차단해 주신 것이었나.
새삼 새롭고, 또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
“딸아, 요즘 어디 마음에 둔 남자는 없느냐?”
“…예?”
갑자기 아버지가 훅 치고 들어왔다.
“혹시 네가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면 내 그쪽 가문에 재빨리 서신을 보내서….”
“아버지!”
세이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리쳤다.
“나도 내 딸, 평생 끼고 살고 싶다. 헌데 상황이 상황이지 않느냐. 강제로 황가로 가는 것보다 좋아하는 남자랑 사는 게 낫지.”
“…허. 그건 그렇지만…….”
“황태자비가 되면 황후가 되고, 지고한 신분이 되는 것이야 말할 나위 없이 영광된 일이지만 문제는 헤베타라고 해서 황태자비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전 황태자비도 별롭니다. 우선 궁에 들어가면 출입부터가 자유롭지 않잖아요.”
…오라버니, 저도 싫어요.
“딸아, 어찌 생각하니? 좋아하는 남자가 혹 없느냐?”
“…….”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남자라도?”
뇌리에 바로 크레이머 공작, 콘스탄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바로 떠올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계면쩍어졌다.
“흠……. 어, 없는데요.”
묘하게 느릿한 반응에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없어? 정말?”
“없어요, 없어.”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무언가 수상하다는 듯 백작이 사이나를 살피자, 세이지도 덩달아 갸름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약혼이나, 남자랑 엮이는 거 말고… 다른 해결 방법은 없을까요?”
사이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남자를 남자로 막는 방법 말고 다른 수를 쓰고 싶은 게 사실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약혼보다는 결혼이 확실하지.”
아니, 저 비혼주의자라니까요….
“아니면, 유학?”
“지금도 공부는 지나치게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세이지가 반대했다. 가족과 생으로 떨어져 타국으로 도망가야 하다니. 사이나도 싫었다.
셋은 몇 시간 동안 계속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아, 우선 이 아비가 몇 가지 더 알아보마.”
생각해보니 몇 가지 방법이 더 떠오르기는 했다. 얼굴에 커다란 화상 같은 큰 상처를 입는다거나, 혹은 이미 누구와 밤을 보냈다더라 하는 청명을 해치는 소문이 나는 것이다.
모두 다 사이나 스스로를 해쳐야만 얻어낼 수 있는 결과라 이 역시 제외였다.
황자 피하겠다고 자신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진짜 결혼밖에 없나.’
사이나도 알고는 있다. 결혼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이번 생엔 정말 비혼으로 살려고 했는데….’
남편은 필요 없고, 가족만 있으면 된다고… 그리 다짐했건만.
한숨만 나온다. 인생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 * *
우선 눈이 그치자, 황도 페이즐은 금세 정상화가 되었다.
말과 마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이 정비되고, 상점들도 다시 영업을 재개한 모양이다.
전령들의 움직임이 가능해지면서 서신과 초대장들도 다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폭설 때문에 이런저런 사고가 많았다 보니, 다들 펜을 들어 평소 친한 지인들에게 소식을 묻고 전하는 편지를 썼다. 인맥 관리 차원에서도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서신들이 엄청나게 오갔다.
사이나도 서신을 받고 또 답장을 보내느라 꽤 시간을 할애했다.
구구절절한 걱정을 내비치는 편지를 보내온 엘리자베스도 있었으나, 사이나는 그저 의례적인 답장만을 써서 발송했다.
“키키 언니네.”
키얼스틴은 답장에 답장을 또 써서 보낸 모양이다. 은근히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인장을 떼고 봉투를 열었다.
보니 생각과는 좀 다른 내용의 서신이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음? 잠옷 파티?”
대충 읽으니 애크로이드가에 모여서 잠옷 파티를 할 예정인데 올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잠옷 파티라니……. 원래 친한 벗들과는 이런 것도 하는 거였나. 처음 받아 보는 초대에 가슴이 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캬앙?”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 얌전히 드러누워 있던 욜리 녀석이 쪼르르 오더니 짜증을 부려댔다.
짧은 앞발로 초대장을 틱틱 건드려 대는 게 뭔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왜 또 그래, 이 녀석아.”
“컁!”
“뭐? 보여 달라고? 이거?”
“크앙, 크아앙!”
혼자 꼬리잡기 하듯 뱅뱅 돌며 고개를 저어댔다.
“잠옷 파티에 초대받았어. 키키 언니 알지? 으힛. 재미있겠다, 그치?”
“캬앙!”
“뭐야, 왜 이리 소릴 지르고 그래? 가지 말라고?”
“컁.”
욜리가 갑자기 얌전히 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가지 말라는 거야?”
이 녀석 정말 의사 표현 확실하네.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보통 동물이 아니란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매번 놀라게 된다.
“근데 왜? 난 가고 싶은데?”
“…큐으잉.”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꼬리를 또 탁탁 쳐댄다. 그렇다고 절대 안 된다는 매서운 태도는 아니고 뭔가 애매했다.
한참 그러더니 욜리가 갑자기 저 너머에 있던 바구니를 이로 물고 낑낑대며 사이나 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사이나를 한 번 보고 안으로 쏙 들어가 앉았다.
그 모양새를 보니….
“…너도 데려가라고?”
“컁!”
맞게 추측했나 보다. 아니, 거긴 대체 왜 따라가려고 그래?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물어는 볼게. 언니가 안 된다고 하면 못 데려가.”
“캬아앗!”
“으악!”
갑자기 가슴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녀석이었다. 깜짝 놀랐다.
이거, 분명 숨어서라도 따라올 기세다. 얼마 전 폭설 때문에 집 비운 것으로도 어찌나 신경질을 부렸던가.
아무래도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 보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키융?”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던 녀석의 요구가 끝난 게 아니었던지, 갑자기 귀를 쫑긋대며 짖어댔다.
“캿! 캬앙!”
또르륵 달려 테라스 쪽으로 가더니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너, 또 왜 그래?”
이제 사이나는 짖는 톤만 들어도 욜리의 기분이 어떤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약간 웃기고 신기하지만 정말 그랬다.
지금 저 소리는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한 의견 표출이다.
뭣 때문에 창가에서 저러나 싶어 일어나는데, 톡톡,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어?”
톡톡. 다시 한번 유리가 울리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살피자, 바깥에 작은 새가 있었다.
빛을 죄다 잡아먹는 것 같은 암흑 같은 검은색을 가진 새였다. 눈알만 노랗게 박혀서 더 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이나는 이 새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연락이 필요할 때,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대의 방으로 바로 가더라도 놀라지 말아요.’
‘방으로 바로요?’
‘수호령의 힘으로 구현하는 거라, 사람이 아닙니다.’
‘아….’
그럼 이 새가 수호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사이나는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후다닥 문을 열었다.
“캬앙-!”
욜리가 폴짝폴짝 뛰며 새를 잡으려 난리 법석을 피워댔다.
이럴 때마다 녀석이 고양이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힘껏 뛰어봐야 사람 무릎 근처도 못 오니 말이다.
사이나는 테라스 문을 닫고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찌 알고 작은 새가 사이나의 손가락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는 새를 데리고 서신 작업을 할 때 쓰는 콘솔로 가서 앉았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손을 콘솔 위에 내려놓자 새가 쪼르르 손가락을 타고 내려와 콩콩 걸어 다녔다.
‘근데 전령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새가 아닌가?’
전령이라면 보통 뭔가를 들려 보내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지. 그런데 이 새는 아무리 봐도 뭘 들고 오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닌 듯 보였다.
그런데…
-하악.
실제로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이 새가 크게 입을 벌리더니… 꿀렁, 무언가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