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세이지의 의심
“크아앙! 컁, 캬앙!”
녀석이 사이나를 보자마자 아주 난리 법석을 떨어댔다.
“으아아-! 요, 욜리?!”
“캬앙! 컁!”
보통 개들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 않나? 이 녀석은 주인을 못 봐서 우울해한 게 아니라 명백히 화가 난 것 같다.
“날 두고 가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이렇게 오래 날 떼어두다니!”
분명 이런 느낌의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물거나 할퀴지는 않는데 뭔가 괴롭다. 귀가 시끄럽고, 시도 때도 없이 시야 앞을 가리며 귀찮게 하는 스킬이 대단하달까.
“크앙! 크앙!”
“알았, 알았어! 미안!”
“크르르르…….”
“미안해! 눈이 와서 어쩔 수 없었어!”
“크르…….”
“오구, 우리 예쁜 욜리! 일루 와, 뽀뽀나 할까?”
“크아아앙!”
“알았어! 안 해. 안 할게!”
어휴, 까다롭기 짝이 없다니까.
상전이 따로 없다. 그런데도 밉지가 않으니 문제지만.
게다가 저번처럼 또 얼굴이며 입술을 꾹꾹 눌러대는 것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뭔가 알고 하는 행동 같았다.
잘 씻었는데, 대체 무슨 냄새를 맡고서는 저러는 거야…….
사이나는 또다시 온몸을 아주 뽀득뽀득 씻고, 한참 동안 욜리를 달래주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자, 현실적인 상황들이 하나둘 다시 떠올랐다.
유모와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를 나누었고(아직 공작님과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말은 못 했지만), 본가 식구들에게 전령도 보냈다.
루퍼트를 불러다 스밀라와 마부는 어찌 되었는지, 그때 도왔던 사냥꾼 가족은 적절한 도움을 받았는지 등도 듣고 몇 가지 더 지시했다.
가장 중요한 황자에 관한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골치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다시 델본으로 가도 되겠는지, 내일 루퍼트를 불러다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걱정을 못 이기고 아버지와 세이지가 새벽부터 황도로 올라왔다.
괜찮으니 걱정 마시라고 서신을 보냈음에도, 직접 눈으로 확인이 필요했나 보다.
사이나가 델본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었기에, 약간만 그들이 늦게 왔으면 오히려 엇갈릴 뻔했다.
“하, 딸아.”
드보프 백작은 사이나를 보자마자 품에 포옥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콘스탄틴으로부터 서신을 받아 보셨을 텐데도 걱정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아버지.”
“허어, 아빠라고 하라니까?”
드보프 백작이 강권했다. 원하는 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넘치는 눈빛에 사이나는 입을 열었다.
“…아빠.”
“오오냐, 내 딸.”
백작의 눈 안에 사랑스러움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멋쩍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기라도 걸려 골골댈까 봐 걱정했더니, 다행이네.”
세이지 역시 꼼꼼하게 사이나를 뜯어보았다. 그녀는 하루였지만 열이 올라서 앓았던 일을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다쳤던 사정은 더더욱 말이다.
“그나저나, 어쩌다 공작가에 머무르게 된 거야?”
세이지가 주변을 물리더니 넌지시 물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을 보니 꽤나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음, 델본에 가려고 나섰는데….”
사이나는 비가 우박이 되어 마차가 부서진 사건, 우박이 눈으로 변한 일, 폭설 때문에 돌아가다가 접한 오두막 사건 등을 차례차례 늘어놓았다.
공작이 보낸 서신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는지 부자(父子)가 놀란 눈을 하고 사이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굳이 공작가로 갈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야?”
사이나가 추측하기로는 물약 때문이었을 것 같기는 한데, 이 이유를 말하려면 손이 다친 것에 대해 또 말을 해야 하고, 그러면 혼이 날 테고…….
“그때 내가 거의 얼어붙다시피 해서 마음이 급하셨던 것 같아. 기절 직전이었거든.”
그러니 적당히 숨기자.
“뭐?! 그 정도였어?”
“딸아! 지금은 정말 괜찮은 게냐?!”
사이나의 감기에 커다란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이라 역시나 반응이 그다지 온건하지는 않았다.
“드보프가에는 주치의가 있을지 없을지 공작님도 모르셨을 테니까 그러셨던 것 같아. 거리상 공작저가 약간 더 가깝기도 했고….”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근데 그러고 나니 너무 눈이 많이 와서 갇히게 된 거지.”
왜 그녀가 공작을 변호하게 된 형국이 된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지금은 완전 괜찮아요. 공작님께서 처치를 잘 해주셨거든요. 보시면 알잖아요.”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사이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흠. 그래도 뭔가 걸리는데…. 약간은 꿍꿍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이지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했다. 게다가 꿍꿍이라니?
“…대체 무슨 꿍꿍이?”
“우리 사야가 이리 예쁜 데다, 각하도 남자니 별수 있었겠느냔 말이지.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서…….”
“…….”
“혹시 그… 분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했다가는 ‘그분’에서 바로 ‘그 작자’, 아니 ‘그 XX’가 될 것 같은 표정으로 세이지가 물었다.
거참 묘하게 뜨끔한 질문에 사이나는 애써 웃었다.
“…아니. 없었는데? 알잖아. 공작님, 엄청 젠틀하신 거. 시종일관 ‘신사’ 그 자체셨어.”
사이나는 ‘신사’를 매우 강조하며 해명했다.
신사답다가도 묘하게 집요한 면이 있었지만…. 결국 연애를 하기로 하기도 했지만…….
“방금 대답할 때 좀 망설이지 않았냐?”
흠칫. 사이나는 찔린 자가 으레 그러하듯 더 큰소리를 쳤다.
“아, 아니라니까.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오라버니는 너무 심하잖아!”
“대체 뭐가 심해?”
당연한 걸 묻는데 왜 그러냐는 듯 세이지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뭐가 모자라서 꿍꿍이를 부리겠어!”
“왜 못 부려! 부리고도 남지! 남자는 다 똑같은 짐승이야!”
“그럼 오라버니도 짐승이겠네!”
“당연하… 아니, 야! 너한텐 아니지! 난 오라비잖아!”
나한텐 아니라고? 아니, 대답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아무튼 공작님 아니었으면 난 그날 동상에 걸렸을지도 몰라! 모레프가 있어서 금방 눈보라를 벗어난 거였으니까.”
“그러면 그 모레프로 집에 데려다줄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아, 아니지, 물약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의사가…….”
“그만들 하거라.”
다시 되돌이표를 그리기 시작한 대화를 백작이 막아섰다.
“결과적으로 끝난 일을 따져서 뭐 할 것이며, 각하께서 해를 끼치신 것도 아니지 않느냐.”
“…….”
“위기의 순간에 사이나를 구해 주셨으니 감사할 일이지.”
“예. 알겠습니다.”
“이따 저녁이나 함께하자꾸나.”
“예.”
“네.”
그렇게 남매간의 이상한 대화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식사 시간.
“헤베타의 기준을 알아냈다.”
적당히 식사를 마무리해 갈 때 즈음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요?”
“뭐라고 합니까?”
사이나와 세이지가 백작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헤베타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정령력이 있어야 한다더구나. 수호령의 계승자를 잉태하기 위한 조건이 그러한 듯 보였다.”
정령력? 맹약자 외에도 정령력을 가진 사람이 있단 말이야?
이해가 되질 않아 사이나는 그 부분에 대해 물었다.
“과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수호령을 부리던 시절이 있었으니, 미약한 힘 정도는 남아 있을 수도 있지. 굳이 맹약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 혈통인가요?”
“그런 것 같다. 가문 내력을 조사한다는 것 보면 말이야. 조상 중에 언약자가 있었는지 등을 알아보는 거겠지.”
조상 중에 언약자라…….
많은 가문이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단정하기는 힘들 텐데?
‘혹시……?’
불안하게 사이나가 물었다.
“혹시, 황가에 정령력의 유무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요?”
“어찌 알았느냐? 그렇다는구나. 황가에 아를-프로메사 시절에 만들어진 감별 도구가 있다고 한다.”
“…….”
“피를 이용하는 방법이라던데, 정확한 방법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사이나는 굳었다.
‘…피라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갑자기 황성에서 일어난 사건이 눈앞으로 주욱 지나갔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자마자 갑자기 등장한 황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반을 날라 온 시종, 핏물이 퍼지자마자 발생했던 빛, 그리고 마법처럼 색이 변했던 수색까지.
‘특히나 이상했던 건, 황자의 반응….’
당시에는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기만 했지만, 그것도 원하던 결과를 확인해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보면 이해가 간다.
“왜 그러느냐?”
순식간에 나빠진 사이나의 안색을 보며 드보프 백작과 세이지가 물었다.
‘말하는 게… 맞겠지?’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사이나의 예상이 맞는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사이나는 크게 숨을 들이켠 다음, 천천히 황성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뭐라?!”
“허, 핏물이 퍼지더니 색이 변했다고?”
사이나의 이야기를 들은 백작과 세이지의 반응은 아주 격렬했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세이지가 또 황족모독죄를 남발하기 시작했고, 드보프 백작은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정령력의 세기도 아마 감별이 가능할 거라던데 아마도 그건가 보구나. 잘은 모르지만 그 수색으로 구분하는 것 같다.”
황자가 화통하게 웃어젖히던 이유가 그럼…….
“황자가 보였다는 반응으로 보아 사이나의 정령력이 상당하게 나온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구나.”
“아무래도 비상 상황 같습니다.”
“허, 나 참…….”
“여태 중앙 귀족이 헤베타가 된 적은 없으나, 전례가 없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지요. 특히, 현 황자는 몇 년째 고전 중이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되지 못해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일 겁니다. 극단적인 방법을 쓸지도 몰라요.”
“…후. 네 말이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으련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큰일이구나.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