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키스해도 되는 사이
반쯤 감겨 있던 그의 하얀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오더니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더니 그의 고개가 점차 내려왔다.
“……!”
빤히 보면서도 왜인지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으응.”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살결을 지분대던 것과 달리, 키스는 거칠었다.
그녀의 입술을 가르며 들어온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안에 숨겨놨던 무얼 찾기라도 할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탐험했다.
“흐, 읍.”
목의 각도를 틀며 그가 더 깊게 혀를 넣었다. 덩치만큼 혀도 큰지 그녀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숨이 가빠오는 기분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매달리며 숨 쉴 틈새를 찾아 바동거렸다.
한껏 벌어져 다물어질 새가 없는 입 안에 타액이 잔뜩 고였다.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핥으며 빨았다.
야한 소리가 잇새로 잔뜩 흘렀다.
그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 동안 그녀의 입술에 매달렸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과한 감각이 버거워 버둥대던 그녀도 어느새 익숙해져 그의 입술에 반응했다.
그가 키스해올 때마다, 이상하게 밀어내기가 안 된다. 이쯤 되자 사이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아마도 이걸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조지 홀랜더와의 접촉은 손만 잡아도 그리 소름이 끼쳤는데, 이상한 일이다. 공작과는 더한(?) 것도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한참 동안이나 농밀한 숨결을 주고받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그녀를 얽어왔다.
마치 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감옥을 만드는 것 같았다.
침대와 공작의 사이에 끼인 채였지만 특별히 불안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여태껏, 공작이 어떤 상황에서도 선은 넘지 않았기 때문일까.
“가지 말아요…. 여기, 있어…….”
아니, 제정신이라면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이런 말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작은 반복적으로 사이나의 이름을 부르며, 또 가지 말라고 웅얼거렸다.
애원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 안에 숨겨진 애절함, 이면의 따뜻함, 또 미묘한 상냥함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들어 그를 받아들이게끔 했다.
보이는 것만큼 마냥 강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능만 남아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은 그저 계속해서 그녀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고 볼을 감싸는 데에 그쳤다.
어쩐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그녀를 보호하고 생각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웃긴 생각일까.
진짜 보호하려면 애당초 손을 안 대는 게 맞겠지만….
“가지 말아요…….”
맨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도무지 품 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이나는 끝도 없이 파고드는 그의 입술을 받아내며 헐떡였다.
그러다 언젠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사이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동시에 느끼며 깨어났다.
타인의 품 안에서 잠이 든 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릴 때 외에 없는데, 공작과 얽히고 벌써 몇 번째 기록을 경신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따라 더 민망했는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가 이미 깨어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잔뜩 보여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왜, 왜 보시는 건데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파묻었는데, 공작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에 짧게 키스했다.
“으읏.”
어딘가 상냥함을 품은 그 행동에 더 부끄러워져서 사이나는 더 고개를 수그렸다.
“왜 그럽니까. 얼굴을 좀 보여줘요.”
“……싫어요.”
“…왜요.”
“아직 세수도 안 했고…….”
공작이 웃는지 가슴이 짧게 들썩거렸다.
“예쁘기만 하던데요.”
“…자는 얼굴을 그렇게 보시는 게 어디 있어요.”
“정말입니다. 예뻐서 본 겁니다.”
사이나는 손바닥을 약간만 내려 눈만 빼꼼하게 뜨고 그를 보았다.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진심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약간 민망해하면서도 애잔한 얼굴로 공작이 말했다.
“뭐… 가요?”
“또 내가, 그대를…….”
말하다가 더 민망해졌는지 그가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이 좀 귀엽게 느껴진다면, 이상한 건가?
공작 혼자 날 덮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아니, 처음에는 좀 그랬지만 나중에는 나도……. 할 말이 없지 않나.
그 와중에 공작이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가린 탓에 얼굴에서 입술만 덩그러니 남은 게 눈에 들어왔다.
쪽. 순간 고개를 쑥 빼 들어 그 입술에 뽀뽀한 것은 매우 충동적이었다.
“헙…….”
한 본인조차 놀랐을 정도로 말이다.
동그랗게 홉뜬 두 시선이 얽혀들었다.
얼음처럼 굳은 사이나가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그가 그녀의 몸을 휘감듯 붙잡아 끌어올렸다.
같은 선에서 마주 보게 된 얼굴.
볼을 휘감은 큼직한 손바닥은 그녀가 얼굴을 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허락입니까?”
“…예?”
“내가 한 행동들을 용납하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까?”
“…….”
“확인은….”
괜찮다는 뜻, 맞았다.
“다시 몸으로 해보도록 하지요.”
또다시 내려오는 그의 고개를, 막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 * *
해가 뜬 바깥은, 언제 그리 날씨가 지독했느냐 싶게 완전히 개었다.
눈이 어느 정도만 녹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레프를 한 번 더 탈 기회는, 다음을 노려보아야 할 듯하다.
“…돌아갈 겁니까?”
“가야죠.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잖아요.”
딱 보아도 그녀가 그의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고 있었다.
미안해서 얼른 돌아간다고 한 건데, 공작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신세라…….”
“…….”
“그럼 이번에도 우리가 키스한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습니까?”
훅 치고 들어온 그의 물음에 사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결혼이 싫다지만, 두 번이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별수 없을 것이다.
“…아니에요.”
면구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그가 웃었다.
“그럼, 또 키스해도 됩니까?”
“…에, 네?”
“언제든, 키스해도 되는 사이라고 여겨도 되는 거냐고 물은 겁니다.”
그런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연인… 말씀이신가요?”
“비혼주의자라는 말은 기억합니다만, 그래도 연애는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이런저런 사건으로 상황이 좀 꼬이기는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억지로 없는 셈 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리 싫지 않기도 하고…….
“결혼해달라고 매달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선은, 만나봅시다.”
“매달리다니요. 공작님께서 어찌…. 보통은 여성분이 더 그러지 않을까요.”
콘스탄틴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물었다.
“제게 매달릴 겁니까?”
“……예?”
“그대는 매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텐데요.”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마음? 무슨 마음?
훅훅 진행되는 대화의 방향에 그녀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대가, 만족할 만한 연인이 되게 노력하도록 하지요. 여러모로 말입니다.”
여러모로… 요?
여러모로가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글한 눈매 위로 어쩐지 의욕에 불타는 듯한 표정은 공작에게서 처음 본 것이라 말문이 막혀왔다.
“저도… 공작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이 만남이 혹시라도 외부에 알려질 경우, 대부분은 다 그녀에게 땡잡았다고 하거나, 공작이 아깝다고 표현할 테니 말이다.
또 일이 이렇게 되기는 했으나, 미래에 나타날 공작부인에게도 괜한 피해를 끼치면 좀 그렇기도 하고.
“신세에 이어 이번엔 누입니까?”
그런데 그녀의 표현이 뭔가 이상했는지, 공작이 나지막하게 사이나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
“그럼 우선, 호칭 정리부터 다시 해봅시다.”
“호칭이 왜요?”
“언제까지 날 공작님, 같은 단어로 부를 생각입니까. 누군가 그대가 날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걸 들으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이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공작님을 공작님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그대와 나 사이의 나이 차를 더 크게 부각시키는 기분입니다. 내가 더 짐승 같도록 느껴지는 효과가 있지요.”
“…….”
실제로 그다지 큰 나이 차가 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저런다.
“콘스탄틴이라고 불러요.”
어쨌든 결국, 공작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 부탁했다.
콘스탄틴 크레이머.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리라.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본래 아는 이름임에도 낯설었다.
“얼른.”
“…네?”
“불러보기 전에는 못 갑니다.”
부르기엔 더 낯선 이름이다.
콘스탄틴. 그는 웃고 있었지만, 입매는 단호했다. 묵묵히 바라보는 눈빛에도 지긋하게 강요가 묻어있었다.
“코…….”
사이나의 입이 달싹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말이 완성이 되질 않는다.
고작 이름. 그걸 하나 부르는 것이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공작은 보채지는 않았으나, 놓아주지도 않았다. 정말 불러보기 전에는 보내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코…….”
“…….”
“…온스탄틴.”
어렵사리 그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그가 씨익 웃었다.
“잘했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내려 이마에 짧게 찍었다.
“사이나.”
그녀는 그의 이름을. 그는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하는 거라는 듯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콘스탄틴.
사이나는 작게 입술을 들썩여 그에게 들리지 않게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이래서 이름을 부르라고 한 걸까?
신기하다. 혀끝에 걸린 그 이름 하나로 그가 아까보다 묘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한편,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자 난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