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몰래 확인만 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유리가 여기에 있을 리 없으니, 현재 사이나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크레이머 공작이었다.
“이름이 율입니까? 남자?”
비몽사몽의 상태지만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묵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의 목소리와는 완전 달랐다.
하지만 상냥한 목소리였다. 사이나는 그 의도된 상냥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른하게 대답했다.
“율은… 유리. 나쁜 놈…. 톡톡… 얼른…….”
말 그대로 술 취한 자의 술주정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사이나는 잡고 있던 팔에 얼굴을 비볐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볼을 서늘한 기둥에 비비니 한결 시원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손이 그녀의 얼굴 근처로 올라왔다.
손가락으로 톡톡, 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 손은 허공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사이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청량한 향을 풍기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톡톡 안 해주는 거야?
그래도 닿는 느낌은 좋아서 만족스럽다. 눈꺼풀이 잠깐 바르르 떨리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 * *
“으으…….”
다음 날,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사이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왜 이리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거지.
이마를 짚으며 일어난 사이나가 방 안을 훑었다. 점차 기억이 돌아왔다.
‘아 여기, 우리 집 아니지.’
어제 술을 마시고…….
위스키를 들이켠 이후의 기억이 희미하다. 술에 강하지도 않으면서 섞어 마신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아니면, 독주를 마신 것이 잘못이던지.
“물…….”
목이 지나치게 타서 사이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침대맡에 물 주전자가 보였다.
꿀꺽꿀꺽. 가득 따른 물을 두 컵이나 삼키고 나서야 약간은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뱅뱅 도는 것 같은 머리와 메슥거림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살 만했다.
일어났다는 신호를 보내자 어느새 하녀들이 들어와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평소와 달리 먼저 식사를 한 후 씻기로 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자 숙취가 좀 가시는 느낌이다. 그러고 나서 반신욕까지 끝내자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떻게 이 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나네.’
적당히 마시고 안전하게 방으로 돌아가라고 공작이 문까지 열어 고정시켜 줬는데, 문제는 제 발로 돌아온 기억이 없었다.
경계심이라고는 없이 행동한 어제의 자신을 나무라며 사이나는 공작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폭설 때문에 잠시 처리하실 일이 생기셔서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공작의 행방을 묻자 로이터의 대답이 저랬다.
여태껏 자신의 손과 발이 되기라도 하겠다는 듯 항상 그녀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인가. 묘하게 저 대답에 당황스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말씀하셨습니다. 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배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바쁠 것이 당연했다. 영주로서든 가주로서든 말이다. 여태 며칠을 그녀 옆에만 붙어있다시피 한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리 납득했다.
갑자기 이상하게 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태 계속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서라고.
아니면 여기가 제집이 아니라 남의 집이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리, 여겼다.
‘밀린 번역 작업이나 하자.’
공작이 없어 블랙 다이아몬드를 직접 살피지는 못하겠지만 그간 베껴놓은 문양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할 수 있으니 그것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사이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이날. 그녀가 해가 지도록 문자들과 씨름하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 * *
덜커덩!
눈보라에 창문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에 사이나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새벽이네.’
어제 그리 일찍 잔 것도 아닌데 아침도 되기 전에 잠에서 깼다.
아무래도 온도 때문인 것 같았다.
방 안 벽난로에 장작을 어찌나 양껏 채워두었는지 훈훈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뜨끈한 공기가 가득했다. 자는 동안 땀까지 약간 배어 나온 듯했다.
사이나는 길게 풀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테라스는 창 너머 바깥에 눈이 잔뜩 쌓여 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이나는 밖으로 나가 포치 근처나 좀 거닐다가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옷 위로 도톰한 숄을 걸친 뒤 나가려던 그때, 어쩐지 연결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긴 한 걸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공작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어쩌면 아직도 부재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매우, 그의 부재 유무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사람의 심리가 묘한 게, 저 문이 이쪽에서만 열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주 잠깐… 잠깐만 열어서 슬쩍 보자.’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고, 얼른 다시 닫으면 되지.
그리 합리화를 했으나 사이나의 발뒤꿈치는 어느새 훌쩍 들려 있었다. 그런 행동 자체에서 떳떳하지 못함이 풀풀 풍겼지만, 빼꼼히 문을 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문손잡이는 위에 누르는 버튼이 하나 있어서 그것을 누른 채 돌려야 문이 열리는 방식이었다. 이 버튼이 아마도 자동 잠금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버튼을 누를 때 철컥, 하는 소리가 나서 잠깐 움찔했으나 문 자체는 스르르 조용하게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사이나는 슬며시 고개만 먼저 들이밀었다.
벽난로가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방의 주인이 있을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사이나는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벽난로의 불빛에 의지해 침대 쪽을 살폈다.
멀리 있는 침대 위의 형태가 너울너울하게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사람의 형태였다.
‘돌아오긴 했구나.’
잠이 든 모양이고.
확인을 마친 사이나는 다시 몸을 물렸다. 아니, 물리려 했다.
“으윽…….”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잘못 들었나 싶어 사이나는 눈을 더 갸름하게 만들며 공작의 침대 위를 살폈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리며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픈가?!’
사이나는 깜짝 놀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돌보다가 감기 기운이라도 옮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내내 보이는 것이 그의 등판뿐이라서 사이나는 침대 반대쪽으로 멀리 돌았다.
거대한 침대 중앙에 웅크리듯 몸을 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쾅!
그때, 갑자기 크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계속 열려 있도록 고정을 해두지 않고 허둥지둥 들어오는 바람에 연결문이 닫힌 모양이다.
“앗!”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이나의 시야가 뒤집혔다.
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손목이 붙들려 침대에 고정되었다.
“고, 공작님?”
“…….”
잠에서 깬 건 맞는 걸까?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찌푸려진 미간 사이에는 식은땀이 맺힌 듯했고, 눈동자는 어딘가 초점이 흐렸다.
그리고 손길이… 손길이 평소와 달랐다.
“읏… 저, 저기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던 안 들리는 듯, 그는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팔 안쪽 살을 쓸며 내려왔다. 그 와중에도 팔을 누르는 힘은 거세어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사이나…….”
열에 들뜬 목소리가 귓가에 말려들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음성에 등줄기가 오싹해졌으나 어쩐지 또 밀어내기는 힘들었다.
“…어디 아프세요?”
깨어나긴 하신 건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감기, 이런 건 아닌 듯했다. 그녀를 쓸어오는 그의 손은 여전히 서늘하기만 했으니.
“흐익!”
팔을 따라 내려온 손이 겨드랑이를 스쳐 옆구리로 내려갈 때는 정말 너무 느낌이 이상해서 당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의 다리가 그녀를 붙박듯 누르고 있어 불가능했지만.
“고, 공작님?! 읏!”
어느새 그가 고개를 내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선에 입술을 파묻고는 느릿느릿 비비적대는 감촉에 솜털이 모두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것과는 다른데, 비슷하게 쭈뼛한 느낌이라 너무 이상했다.
“하…….”
거기다 그가 폐부 가득 들이쉰 숨결을 내뱉기까지 하자 온몸의 피부가 다 일어나 곤두서는 느낌.
사이나는 목울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흐읍, 숨을 들이켰다.
그의 다른 손은 여전히 사이나의 팔목을 잡은 채 안쪽 살을 엄지로 둥글리며 매만졌다. 느른하게 엉긴 커다란 남자는 드러난 살결을 따라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흣.”
결국 입에서 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사이나의 목덜미를 핥아 올린 것이다. 이상한 기분에 수그러든 어깨 사이를 그가 더 깊게 파고들며 지분거렸다.
“아, 고- 공작님….”
어떡해. 소리를 칠 수도 없고…….
사이나도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그를 밀어내려 둘의 틈새에 손 하나를 끼워 넣었다. 자는 동안 가운이 헐거워졌는지 손에 닿는 게 바로 맨가슴이다.
손바닥에 닿는 단단한 살결의 감촉을 무시하려 애쓰며, 그를 밀었다.
의외로 밀어내니 밀렸다. 밀리는 간격에 따라 목덜미에서 턱 끝으로 입술이 따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이나.”
다행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아래에 있는 여자가 사이나라는 것은 그래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몽롱한 눈이 여전히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 게 문제지.
“저, 정신이 드세요?”
그의 가슴팍에서 손을 떼어 내며 사이나가 말했다. 그 주춤거리던 손을 그가 붙잡더니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으앗!”
목덜미보다는 무딘 살 부위일 텐데도, 만만찮게 느낌이 이상했다. 손가락이 잔뜩 곱아들었으나, 그의 볼에 막혀 완전히 구부릴 수는 없었다.
“사이나, 사이나…….”
그는 어쩐지 그녀의 이름만을 반복해 읊조리며 살결을 탐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